1. 개요
이이에 대한 평가를 정리한 문서.서경덕 등이 주창한 주기론[1]과 이황이 정립한 주리론을 조화시키려 시도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후학들이 크게 받듦으로써 '기호학파'라는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졌다. 흔히 이기 일원론이라고 하고 심시기(心是氣),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이라고도 하는데, 퇴계학파에게는 주기론이라고 비판받았다.[2]
학자적인 성취는 이후 이황과 함께 조선의 사상을 크게 변화시켰다. 성리학을 주자가 집대성했다면 조선의 성리학은 이황과 이이가 그리했다고 볼 수 있다. 끝까지 '이'와 '심' 중심의 경학적 해석을 제일시했던 이황과 '이통기국'의 기발이승일도설이라는 독창적인 관점으로 이기의 어느 한쪽에 편중되지 않는 해석을 고집했던 이이의 성리학은 '이기론'을 대표하는 입장들이었다. 이후 조선의 모든 붕당은 표면적으로나마 이기론의 해석에 따라 갈렸다.
조선 땅에서 500년의 세월이 지남에 따라 성리학은 이렇듯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 논쟁, 이기론, 18세기 인물성동이론 등의 논의를 거쳐 인간 심성론 쪽으로 치중되어 갔다. 조선 시대의 성리학이 심성학으로 변한 것은 이이 등을 필두로 시작된 이 일련의 논의들로부터 도출된 결과물인 것이다. 이 때문에 이이와 이황의 성리학을 당사자들이 학문하면서 스스로 밝혔던 바와는 판이하게 각각 성리학이 아닌 율곡학, 퇴계학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대표적인 제자로 김장생, 정엽, 조헌, 이귀가 있다. 이이의 학문은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을 거쳐 송준길, 송시열로 이어져 나가며 서인의 뿌리가 되어 조선 후기 사상계를 장악하게 된다.[3]
중국에선 명나라 대부터 과거 시험에서 양명학 등 다른 학문의 논리임이 분명한 견해도 이치에 맞는 훌륭한 답변이라면 정답으로 간주한 반면, 조선에서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답이 아니라면 답변자를 사문난적으로 간주하였다. 이이와 이황은 성리학 논의의 방향성을 완성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니나 말 그대로 '학문을 완성'하였기 때문에, 조선의 주류 유학이 조선 중기 이후 강한 폐쇄성을 나타내면서 변화를 거부하는 경향을 드러내게 되는 폐단의 책임도 본의는 아닐지언정 일정 정도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2. 정치적 능력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선조실록> 전반기를 이이 중심으로 그려낼 만큼 이이의 경장을 높게 산다. 이순신만 아니었어도 <중종실록> 편의 조광조처럼 표지 모델로 썼을 거라는 평가. 다만 사상사 - 제도사 등 큰 그림에서 역사를 보지 못해서 이이의 경장론이 후대의 서인에게 이어지는 대목을 제대로 그려내지 못한 점은 아쉬운 점. 또한 해당 책에는 '경장'이라는 단어만 강조되나 이이는 '시무(時務)'[4]와 ‘무실(務實)'[5]이라는 표현도 즐겨 썼다.이이가 병조판서로 재직하던 시절, 조선이 가장 우려한 외세의 공격은 일본이 아닌 여진족이었다. 여진족들은 바다 건너 일본 열도나 해적들보다 지속적이고 눈에 보이는 위협이었다. 바로 이 시기에 임진왜란 이전에 조선이 경험한 가장 큰 전투가 벌어졌으니 바로 니탕개의 난이다. 이이는 장장 1년에 걸쳐 병력의 선발과 양성, 보급으로 니탕개가 호시탐탐 노리는 함경도에 중앙군 파견을 지속했다.
이이가 관료로서 세운 가장 큰 업적은 바로 이 전시 국방 장관으로서 세운 공이다. 이 시기에 행한 여러 긴급조치들이 동인들에게 지탄받아 "망국의 간물"이라는 하는 공세에 시달렸다.
사실 현실 정치에 있어서 이이는 1564년 급제 직후 차관보~국장급인 6조 좌랑에 오를 만큼 능력이 뛰어났던 관료였다. 불가에 잠시 몸을 담근 적은 있으나 보우, 윤원형 탄핵에 가세하는건 물론 3년 뒤 선조가 즉위할 때는 인순왕후의 외척을 탄핵하는 파이터이기도 했다.[6] 그 직후 즉위 사신단 서장관을 거쳐 홍문관 부교리 - 대사간을 거쳤다.
특히 1574년 대사간에 오른 이후부터는 사실상 대사간에만 6년을 있었다. 이전에는 승진이 늦어진 것 아니냐는 소리일 수 있으나 사림들에게 가장 중요한 직책이었던 3사 중 최고위직을 이렇게 오래 역임했다는 것은[7] 그의 학문적 깊이를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전 기술에는 삐져서 만언봉사를 올렸다 하는데 정작 만언봉사를 올린 시기는 1574년으로 막 대사간에 올랐던 시기이다. 사간원은 임금에게 간언하는 곳이었으니 오히려 이건 이이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입장을 임금에게 피력하는데 더활나위없이 좋은 직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이가 1580년부터 호조판서, 병조판서를 거쳐 1584년에 이조판서가 되었다. 친구였던 송강 정철도 1583년이 되어서야 예조참판으로 갔다가 특별 제수되어 예조판서가 되었고, 3살 정도 어린 이산해도 1580년에 가서야 형조판서가 되었다. 한마디로 이이는 늦게 승진했다기보다는 되리어 호조판서 제수 이후 이이의 승진속도를 봤을 때에는 이이가 조금 더 오래 살았다면 영의정은 무조건 갔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선조의 신임을 꽤나 받았기에 이조판서 다음 직책은 우의정이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당시 분위기상 1590년이 되기 전에 영의정에 제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여하튼 다행히 왕의 신임이 있을 때에 떠나 좋은 평가를 들었다. 하지만 자신을 알아주는 동료들이 적어 홀로 개혁하는데 일생을 바쳤지만, 결국 염원을 이루지 못하고 정계에서 파란만장하게 산 고독한 정치인의 면모가 있다.
3. 십만양병설
그가 서인의 종주로 추대된 이후 임진왜란 종전과 인조반정을 거치면서 서인이 정권을 얻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남명 조식과 그 직계인 정인홍 등의 북인, 특히 대북 계열은 말 그대로 초토화되었고, 상단에서 언급된 이이와 직접 대립했던 이들의 평가도 아작난다. 그리고 이것은 이이에 대한 평가가 대폭 수정되게 된다는 의미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선조실록에는 없으나 선조수정실록에는 실린[8] 십만 양병설이다. 실제로 선조실록에는 이이가 선조에게 여러가지 국방과 세제개혁에 대한 의견을 개진한 기록인 시무 육조는 있으나, 십만이라는 구체적 숫자를 언급한 기척은 전혀 없다. 십만 양병설은 서인들이 이이를 높이기 위해 짜맞추어 만든 기록일 가능성이 높아 여러모로 의심스럽다.우선 이이가 병조 판서로 있던 1583년 올린 시무 육조에는 양병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있지만, 십만이라는 숫자는 확인되지 않는다. 더구나 이이는 양병은 양민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면서 우선 양민부터 하고 나서 논의할 일입니다라고 주장하였다. 이건 마치 중국의 삼국 시대 때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 통용되던 삼국 정립설과 같이 당시에 통용되던 의견들과 비슷하다.
그럼 십만양병설은 이후에 주장했다면 시급하여 의견을 바꾸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십만양병설에 대한 주장은 1582년 선조수정실록에 등장한다. 여기서도 본문에는 없고 덧붙여진 기사로 10만을 양병해야 한다는 주장이 등장한다. 선조실록에는 없고, 서인 집권 이후인 선조 수정실록에만 존재하는 이 내용은 그 외에도 여러 글들에 등장한다. 문제는 이게 모두 이이의 제자인 서인들의 문집으로, 그나마도 양이 점점 불어난다는 것이다. 가장 먼저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주장한 글은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이 1597년 편찬한 율곡행장이다.
'일찍이 경연에서 청하기를 "10만의 군병을 미리 길러 위급한 사태에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10년이 지나지 않아 장차 토붕와해의 화가 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성혼의 제자로 역시 서인이고 이이가 죽었을 때는 겨우 13살이었던 안방준이 '임진기사'에서 그 내용을 보강하고 있다. 그 내용은 역시 서인으로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의 '율곡연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경연에서 아뢰기를 "국세가 부진한 것이 극도에 달했으니 10년이 지나지 않아서 마땅히 토붕와해의 화가 있을 겁니다. 원컨대 10만의 군병을 미리 길러 도성에 2만, 각 도에 1만을 비치하고, 세금을 덜어주고 재주 있는 자를 훈련시켜 교대로 도성을 지키게 하다가 변란이 있으면 도성을 파수하게 하여 위급한 상황에 대비하게 하소서'
이 글들에서는 10만이라는 수 외에도 '도성에 2만 각 도에 1만'이라는 구체적 방법과 더해서 앞서 언급된 글의 10년이 되지 않아서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참고로 임진왜란이 1592년 4월에 일어났다는데, 송시열의 율곡연보에는 1582년 4월 조에, 선조수정실록은 1582년 9월에 기사를 올리고 있는 것은 상당히 작위적인 느낌이 강하다.
하지만 그 외에도 역시 서인인 이항복의 율곡신도비명, 성혼의 문인이었던 어우당 류몽인이 1622년 편찬한 어우야담, 이정구의 율곡시장 등에서 십만 양병설을 언급하고 있다. 십만 양병설 회의론에서는 이들이 모두 김장생의 율곡행장[9]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보지만, 그렇게 볼 분명한 근거는 없다. 특히 이항복은 조정 내부 사정에 대해 정통한 인물인 만큼 이이가 실제로 그러한 종류의 발언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류몽인은 북인이었고 실제로 류성룡이 한양에서 후퇴하며 '문성(文成, 이이)의 말이 과연 사실이었구나.' 식으로 후회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문성' 칭호는 인조가 내렸으므로 임진왜란 때 류성룡이 이이를 문성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반론도 있다. 그러나 '이문정은 참 성인이다'라는 표현은 뛰어난 선견지명에 대한 당시의 관용구로 쓰였고, 실제로 율곡행장의 초판이나 율곡연보에도 이문정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항복이 쓴 이이신도비에는 이문정은 참으로 성인이었다(李文靖眞聖人也)라고 쓰여있고, 율곡전서에도 문성이 아닌 문정으로 되어 있다. 문성으로 나오는 것은 후대의 것이다. 이문정은 북송 때의 명신 이항으로 류성룡이 이이를 이항에 빗대어 찬탄한 것인데, 율곡전서의 후기 교정자가 문정을 문성으로 잘못 교정한 것이다. 따라서 교정자의 실수에 불과한 것을 십만양병설 후대 조작설의 근거로 볼 수 없다. 수정실록이 편찬되기 전에 지어진 류몽인의 어우야담에도 십만 양병설이 등장하고 류성룡의 후회도 같이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류성룡이 이이를 숙헌(이이의 자)이라고 지칭했다. 참고로 이덕일은 이 꼬투리를 잡아서 십만 양병설을 율곡연보의 저자인 송시열이 조작했다고 우기고 있다...
당시의 조선의 상황으로 볼때 10만 양병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견해도 있다. 당시 조선 인구가 1200만 정도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0만이나 되는 군사를 훈련하고 먹이는 비용은 상상도 못할 비용이라서 그 때 당시 조선으로서는 안하는 것이 상책이었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결과적으로 10만의 군대를 모았다 해도 백성들의 민심이 나라를 떠나버리기 때문에 의병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10]
게다가 그 1200만명 중 절반은 여자임이 명백하고 그럼 나머지 600만 중에서도 왕족, 노비 등의 천민을 제외하면 징발 대상인 평민은 더욱 한정될 수밖에 없다.
반대로 충분히 현실성이 있다는 견해도 있다. 조선이 유지한 상비군인 갑사의 숫자가 14800명이였는데 4교대제라 평시 근무 인원은 3천 ~ 4천에 불과했던 것을 보면 10만의 상비군을 유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겠지만, 상비군이 아닌 예비군으로 해석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이나 류형원의 반계수록 등에는 임란 전 조선의 군액 중에서 보인, 수군을 제외한 정병 기보병을 17만 ~ 18만으로 잡고 있다. 이렇게 10만을 훌쩍 넘어가는 숫자가 가능한 것은 조선군의 기본적인 체계가 교대 근무이기 때문이다. 4교대라면 정병 17만 ~ 18만에 상번군이 4만 남짓이 되며 이 숫자는 여러 문서에서 확인된다. 이러한 17만 ~ 18만에 달하는 정병은 엄연히 전시가 되면 정상적으로 동원될 수 있는 병력이지만, 당시에는 거의 방군수포화되거나 노동 부대로 전락해서 실전에 투입될 수 있는 훈련은 사실상 전혀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에 대해 선조도 "병사들을 농사에 부치는 것을 비록 말하길 좋은 제도라고는 하나, 우리 나라(조선)는 병사가 없다. 다만 농민을 몰아 싸움할 뿐이니 마땅히 그 패함이 있다.(兵寓於農, 雖曰好制, 而我國則無兵, 只驅農民以戰, 宜其敗也)" 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따라서 10만의 상비군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제대로 훈련을 받은 병력 10만을 갖추자는 것은 현실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의 군제에 맞는 대응책이었다는 것이다.
보통 전근대 국가에서 상시 유지 가능한 군사력의 한계로 여겨지는 기준이 대략 총 인구의 1% 정도이다. 인구의 절반은 여성이고 나머지 절반인 남성 중에서도 또 대략 절반정도는 징병에 적절치 않은 연소자, 노약자, 환자나 장애인 및 기타 사회 유지에 필수적인 인원이라고 볼 수 있으므로 총 인구중 징병대상인 건강한 성인 남성의 비율은 약 1/4(25%) 정도라고 어림잡을 수 있다. 따라서 총 인구의 1%는 곧 건강한 성인 남성 인구의 4%(1/25)이며, 성인 남성 25명 중 1명이 군인이 되는 정도가 전근대 사회에서 정상적인 사회의 기능의 유지를 전제로 상시 유지할 수 있는 전력의 한계라는 것이다. 이 기준에 따라 보면 당시 조선의 인구가 1200만이면 상비군 10만 유지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물론 정말 상비군 10만을 편성하여 유지하려면 양반 및 노비의 비율 및 징병문제도 따져야 하고 전반적으로 가벼운 세금-작고 검소한 정부를 지향했던 조선 정부의 유지 방침 자체가 제고되어야 하며, 정기적인 군사력 투사를 정책화-산업화하지 않았던 조선에서 이 정도의 군사력을 유지할 이유가 있는가, 정 유지하려면 그를 위한 제도적 기반은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부터 문제가 되겠지만...
결국 지봉유설이나 반계수록 등에 나왔다는 정병 17~18만에 상번군 4만은 총 인구의 1.5% 정도를 전시 동원 가능한 예비군으로 유지하고 총 인구의 0.3%~0.4%를 상시 전력으로 유지하는 선으로써, 조선 정도 규모의 국가면 으레 유지해야 할 병력의 수준으로써도 결코 무겁거나 가혹하여 국가경제에 부담을 줄만한 규모는 아니며, (조선에서 운영하던) 교대근무식 징병제의 모범적인 사례로 꼽힐만 하다. 결국 무(武)보다 문(文)을 더 중시하던 조선왕조에서도 국가의 안전보장에 필요한 수준의 군사력은 합리적인 수준에서 유지되도록 제도적인 장치를 통해 안배되어 있었으나 이 시대에는 그러한 제도가 형해화되어 국가의 군사력 자체가 유명무실한 상황에 이르렀고, 이이의 양병설은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줄 알고 군대를 이렇게 허술하게 내버려두냐. 유사시에 대비하여 유명무실해진 군사제도를 정비해놓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애초에 조선을 포함한 전근대 동아시아는 숫자에 그렇게 민감한 문화권이 아니었기 때문에 10만이라는 숫자에 그렇게 집착할 필요가 있는지는 좀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다.
또한 이이가 주장한 것이 십만 양병설 하나가 아니라 십만 양병설은 그저 그가 주장한 경장의 일부였을 뿐이다. 이이는 기본적으로 사회 개혁을 주장한 경장론자였고 그의 경장에는 대동법의 전신인 수미법(收米法), 세제 개혁 등 여러 개혁이 있었으며 10만 양병론으로 대표되는 것은 그 중 군제 개혁 방안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는 십만 양병론 때문에 이이의 군제 개혁의 기반을 위한 양민 정책이 묻혀 버린 성향까지 존재한다. 이이의 주장은 시종일관 양민 후에 양병이었다.
여하튼 학자적인 성취는 상당해 지금은 여러 나라의 학자들에게 연구대상이며 조선의 엘리트층을 길러낸 밑거름이지만 당파 싸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그의 위치와 서인들의 신격화 흔적 등은 그의 가치를 깎아내고 있다.
이와는 별개로, 이이의 십만 양병설을 주장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이 임진왜란과는 관련이 없다는 주장이 있다. 니탕개의 난으로 위협성이 증명된 여진족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이다.
이 당시의 일본은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으로 사망한 이후 다시 극심한 혼란 상태에 빠졌고, 조선은 일본이 가까운 시일 내에 통일이 되어 안정을 찾을 것인지조차 예측이 쉽지 않았다.[11] 이런 상황에서 조선이 국방상 집중할 곳은 정치 전황 자체를 예측하기 힘든 일본보다는 당장 침략이 자행되어서 위기감을 조성시키고 있는 북방의 여진족이었으며, 이이의 십만양병설도 이와 연계된 것이지 임진왜란이란 일본의 침략과는 별개의 사항이라는 게 이 주장의 핵심이다.
물론 율곡 이이가 왜적이 아닌 여진족을 염두에 두고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더라도 니탕개의 난-임진왜란-정유재란-이괄의 난, 이렇게 4개 큰 변란으로 날라간 북방군과 대내외적인 혼란, 그리고 1570년대 말부터 요동총병 이성량의 비호를 등에 엎고 세력을 키워나가던 누르하치[12]를 고려해본다면, 그 현실가능성은 차치했을 때, 필요한 것이었다. 심지어 병자호란 이후로도 루스 차르국(러시아)의 만주 침공이 있었고 이는 결국 나선정벌로 이어졌는데, 비록 조청연합군의 승리로 끝나서 루스 차르국의 한반도 및 중국 본토 침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유럽인의 동아시아 침공이라는 점에서 당시 기준으로는 나름대로 충격적인 사건이었으니, 시대 및 침략자가 속한 문화권을 막론하고 이이의 십만양병설은 큰 의미가 있었던 셈이다.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찬양하는 부분은 '당장은 없더라도 미래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군사적 변란'을 대비해야 한다는 정치인으로서의 식견이지, 미래의 외국 정치 상황을 예언하는 노스트라다무스식 신통력이 아니다. 그러한 '미래의 변란'이 임진왜란으로 상당히 빨리 현실화된 것 때문에 이이의 식견이 더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일 뿐이므로, 이이가 구체적인 변란의 내용까지 예측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무엇보다도 동시대 다른 정치인들 중에는 국방의 허약화에 대해 문제를 확실히 인식, 제기하고 구체적인 개선 정책안까지 표출한 사람은 이이 말고 없으므로 십만양병설의 병사 숫자는 후대의 부풀림이라 해도 상당한 현안인 것에는 변함이 없다.
[1] 서양 철학의 유물론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서경덕의 경우는 기가 이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건 중국 성리학에도 없는 내용이었고, 이후에도 서경덕 계통의 학파는 맥이 단절되었다.[2] 흥미로운 점은 심지어 서인의 두 거두인 이이와 성혼도 논쟁을 했다. 기발이승일도설을 주장하는 이이와 '이기 분속설(理氣 分屬說)'을 주장하는 성혼 간의 율·우논쟁(栗牛論爭).[3] 이이의 친구이자 학문적 동반자인 성혼의 학문은 사위 윤황과 외손자 윤선거를 통해 계승된다. 윤선거는 김집을 사사하기도 했고 아들 윤증으로 학맥이 이어져 나가며 소론의 뿌리 중 하나를 형성하게 된다.[4] 시급한 일, 혹은 그 시대에 중요하게 다루어야할 패러다임과 같은 말이다.[5] 참되고 실속 있도록 힘써야 한다는 뜻. 쉽게 말해 일을 해도 성과가 제대로 나도록 해야한다는 뜻이다.[6] 좌의정 심통원으로 심의겸의 작은 할아버지라는게 압권이다. 하지만 심의겸은 이를 일절 문제삼지 않았고 이것이 이이가 그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 배경이라고도 한다.[7] 심지어 중간에 자리를 잠깐 옮긴 자리도 홍문관 부제학이었다.[8] 다만 이 사례에는 문제가 있는데, 선조실록은 굉장히 부실할 뿐더러 선조수정실록이라고 정철을 비판했다.[9] 율곡전서에는 십만 양병설이 본편에는 없고 부록에 들어가 있다. 물론 율곡전서 역시 김장생의 율곡행장보다는 편찬시기가 느리다.[10] 당시에도 군역을 누가 지느냐에 대한 문제는 왈가왈부가 많았다. 후대로 가면서 개선을 꾀한다고는 하나 불합리하게 군역을 져야했던 대상들에 대한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됐던 당시 상황을 생각해보자. 현재 대한민국에서조차 병역 징집 대상에서 누가 들어가고 누가 빠지고를 결정하는 일은 많은 논란을 불러오는데..[11] 오다 노부나가가 아케치 미츠히데의 배반으로 사망한 것이 1582년 6월이었고 노부나가의 가신 히데요시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제압한 것이 1586년, 규슈 토벌이 1587년이었고 1592년에 조선 침공이 일어났다. 1583년에 왜국의 침략을 예상하기는 어려운 일이다.[12] 비단 누르하치가 아니더라도 조선과 국경을 맞닿은 건주 여진과 야인 여진에서 세력을 키우던 왕고, 왕올당 등의 여진 추장들은 1570~80년대 조선의 주요 감시 대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