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을 살해 하려다가 실패한 독립운동가에 대한 내용은 이재명(독립운동가)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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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3년 11월 7일 |
평안북도 자성군 中江 中上 627 | |
사망 | 1976년 6월 4일 (향년 83세) |
종교 | 기독교 |
묘소 | 경기도 남양주시 현충원 |
서훈 |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 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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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완용을 살해하려다가 실패한 독립운동가 이재명과 동명이인 독립운동가이다.1919년 3.1운동 당시 중강진의 주모자로서 큰 역할을 하다 체포되어 신의주지방법원에서 1년 6월형을 받고 복역하고 출옥 후 계속 군자금 모집 독립신문 선전 등을 하다가 10여차 구속되었다.
2. 생애
1893년 평안북도 자성군에서 태어났다.1919년 3월 23일 여연면 중상리(閭延面中上里) 일대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그는 당시 신성학교(信聖學校) 교사로서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시위가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동료 교사이자 아내인 이창신(李昌信), 전 희망소학교(希望小學校) 교사이던 김인형(金仁亨),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總督府臨時土地調査局) 측량기사인 이기용(李基容), 신성학교 졸업생인 김종하(金宗河)·김종선(金宗先)·박윤성(朴允成) 등과 상의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초 우연히 만주 임강현(臨江縣)에 살던 정단(鄭丹)을 길에서 만나 독립선언서를 전해 받았다. 이에 그는 김종하(金宗河)·김종선(金宗先) 형제에게 이를 등사하게 하고 태극기도 제작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그는 거사일자를 기독교 신자들의 동원이 용이하도록 일요일인 3월 23일로 결정하고, 더 많은 시위군중을 동원하기 위하여 자기가 다니고 있는 제일교회를 지정하여 연락하기로 하고, 김인형은 공립보통학교 학생동원을, 김종하는 신성학교 학생동원을 분담하였다.
3월 23일 아침에 그는 시가지 주민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하여, 김종하로 하여금 자전거 뒤에 대형 태극기를 달고 시가지를 한바퀴 돌아 주민들의 사기를 북돋우었다.
거사 예정시간인 오후 1시 중강 다리 밑에 수많은 기독교인과 주민들이 모이자, 그는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그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가두로 나와서 시위행진을 시작하였다.
이때 중상리와 헌병대를 거쳐 건하리(乾下里) 일대를 두바퀴 시위행진하고 3바퀴째 행진하던 중,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출동한 일본 헌병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그는 결국 체포되어, 이해 7월 21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르었다.
출옥 후 그는 고향인 자성군 여연면에서 청년공신회(靑年公新會)의 대표로서 활동하다가, 1920년 12월 2일 서울 종로(鍾路)의 기독교청년회관에서 거행된 조선청년연합회(朝鮮靑年聯合會) 창립총회에 전국 116개 단체, 124명의 대표자 중 한사람으로 참석하는 등 민족계몽운동을 계속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