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2-24 18:44:54

이탕(성한)

성한 추봉 공작
이탕 | 李蕩
<colbgcolor=#CD7F32> 시호 광한장문공(廣漢壯文公)
이(李)
탕(蕩)
중평(仲平)
부황 경제(景帝)
모후 나태후(羅太后)
생몰 ? ~ 303년

1. 개요2. 생애3. 기타4. 참고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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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서진 말기의 인물이자 오호십육국시대 성한을 건국한 이특과 태후 나씨(羅氏)의 아들, 성한의 2대 황제 이반의 부친이다. 자는 중평(仲平).

사후 형 이웅이 성한의 황제로 즉위하자 광한장문공(廣漢壯文公)으로 추봉되었다.

2. 생애

본래 관서 지역에서 거주했으나 제만년의 난 등 그 지역이 혼란해지자 이특을 따라 유민을 데리고 익주로 이주했으며 301년, 서진의 익주지사인 나상(羅尚)과 유민에 대한 처우를 두고 갈등이 생겨 이특과 함께 서진에 반기를 들었다. 이후 서진은 나상을 지원하기 위해 광한군태수(廣漢郡太守) 장징(張徵) 등을 파견했는데 이특은 산 위에서 장징과 대치하다 수세에 몰렸고 당시 그 산은 험준했지만 이탕은 이를 헤치고 아버지가 있는 영역까지 나아가 장징군을 궤멸하는데 일조, 도주하는 장징을 사살했으며 생포한 장징의 아들 장준(張存)에게 그의 시신을 건네고 서진의 진영으로 돌려보냈다.

이 전투를 기점으로 연전연승을 거둔 이특은 청두에 입성하여 건원하고 독립 정권으로서 자립을 선언했는데 이는 성한의 실질적인 건국이였다. 즉 이탕은 성한 건국의 군공(軍功)을 세웠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303년, 혜제의 명을 받은 나상은 다시금 그들을 공격하였고 이번에는 이특의 세력권 일부가 모조리 나상에게 협력하는 바람에 수세에 몰리기 시작, 결국 이 전투에서 이특이 전사했으며 남은 성한 세력은 철수했 이특의 자리는 이류가 계승함과 동시에 이탕은 북쪽을 지키게 되었다. 동년 3월, 나상이 상심(常深)을 이탕이 수비하는 북영(北營)에 파견하여 진압을 시도했고 이러한 상황에서 이특의 상황처럼 이번에는 북영 내의 소수민족들이 이탕에게 반기를 들고 말았다. 결국 이탕 역시 수세에 몰려 치명상을 입고 전사했으며 이웅은 민심의 동요를 막기 위해 전투 동안 그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다.

후에 이웅이 나상 세력을 궤멸시키고 촉한의 땅을 점령하여 성한의 공식적인 건국을 선포하자 이탕은 광한장문공으로 추봉되었으며 그의 아들인 이반을 태자로 책봉하기까지 했다.

3. 기타

그의 모후 나씨(羅氏)가 어느날 무지개가 마치 길처럼 뻗어있는 와중 그 무지개 중 하나가 끊어져 무너졌다고 한다. 이를 토대로 나씨는 "두 아들 중 한명이 죽으면 다른 한명이 성공한다"라고 해석했으며 실제로 이탕이 죽고 그의 동생인 이웅이 황제가 되었다.

4. 참고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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