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4-09 14:13:19

이현우(1894년 1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이현우
李鉉祐[1]로 등재돼 있다.]
<colcolor=#fff><colbgcolor=#0047a0> 길지(吉之)
본관 재령 이씨[2]
출생 1894년 1월 9일
경상도 영해도호부 서면 신리
(現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신리리 350번지)
사망 1925년 4월 29일[3] (향년 31세)
묘소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신리리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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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

1894년 1월 9일 경상도 영해도호부 서면 신리(現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신리리 350번지)에서 아버지 이수발(李壽潑, 1858 ~ ?)과 어머니 진성 이씨[4] 사이에서 2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창수면 오촌동에 거주하다가 인량동으로 이주했다.

1919년 3월 18일, 19촌 지간의 족숙(族叔) 이수각, 20촌 지간의 족제(族弟) 이현설, 권재형(權在衡) 등과 함께 영해면 성내동 시장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미리 제작한 대형, 중형, 소형의 태극기를 지참해 영해면으로 가던 도중, 창수동 주민들 중에 일제의 도로공사로 인해 논밭을 강제로 수탈당한 농민이 많다는 점을 들어 창수동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이에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시위대의 수는 곧 150여 명으로 늘어났는데, 이현우는 시위대와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했고, 그날 오후 4시 창수면 헌병주재소에 이르자 이때의 시위군중은 4백여명이었다. 그는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여 건물을 파괴하고, 기물과 서류를 파기한 후 창수면 객사 및 주임순사 다카기 이사부로(高木伊三郞)[5]의 숙소와 소유물, 조선인 순사보 송상구(宋相九)·권찬규(權燦奎) 등의 비품을 파괴하고 제복과 제모를 빼앗았다. 또한 장총 3정과 대검 2개를 탈취하여 파기한 후 일본인 순사의 가구·의류·식기까지도 완전히 파기하고, 영해공립보통학교(現 영해초등학교)로 가서 교사 및 학생들에게 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권유했다. 그리고 오후 7시에 이르러 자진 해산하였다.

그러나 그후 일본 제국 경찰의 대대적인 검속 때 체포되었고, 1919년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소요·공무집행방해·건조물 손괴·기물 손괴·공문서 훼기·상해·보안법 위반·주거침입 등의 혐의로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고문의 여독으로 고통받다가 1925년 4월 29일 31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198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1] 집행원부에는 李[2] 영해파(寧海派)-석계공파(石溪公派)-평재공파(平齋公派) 23세 현(鉉) 항렬.[3] 음력 4월 7일.[4] 퇴계 이황의 후손으로, 이만정(李晩政)의 딸이다.[5] 1907년 8월 이사청(理事廳) 순사를 역임했고, 1919년 6월 14일 영덕경찰서 순사로서 경상북도경찰부장으로부터 순사정근증서를 몰수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