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인도적 개입(人道的介入)이란 인권을 위해 각 국가의 주권을 제한할 수 있다는 개념이다. 즉, 홀로코스트와 함께 집단 학살과 민간인 학대를 예방하기 위해 한 국가의 내정에 타국이나 국제사회가 개입하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기존 국제사회의 세 가지 원칙(주권sovereignty, 불간섭non-intervention, 무력사용의 금지)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여겨지고 있다.인도주의 개입은 냉전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는데, 이는 인권보다 국가의 주권과 세계질서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소련의 붕괴와 함께 새로운 국제질서가 등장함에 따라 무력을 동원하여 인도적 개입에 대한 필요성이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대표적으로 코피 아난이 1999년 9월 국제연합 총회에서 집단 학살이나 집단 살해 위험에 처한 민간인들을 강제력을 동원해서라도 보호해야 한다는 규범이 형성되고 있다고 선언하였다. 실제 사례로는 보스니아 전쟁[1], 코소보 전쟁, 제1차 리비아 내전 등 이 있다.
2. 상세
국제사회에서 인도적 개입에 대한 명확한 정의나 발동조건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나마 동의할 수 있는 필요조건은 다음과 같다.- 시민들의 안전권리(security rights)에 대한 침해를 중지시키기 위해서 개입할 수 있다.
- 인권침해 정도는 광범하고 체계적이어야 한다.
쉽게 말하면 인도적 개입은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겠다는 차원이지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겠다는 차원의 개념이 아니다. 그렇기에 민간인들에 대한 대한 학살이 광범위하고, 체계적으로 발생하는 경우에 개입하는 것이 인도적 개입이다. 그러므로 지금처럼 민주화 요구 시위를 한다고 해서 인도적 개입이 발동될 수 없는 것이다. 민주화는 정체의 문제이고, 인도적 개입은 인간존엄의 문제이므로 이 두 문제는 완벽히 다른 문제이다.[2] 이 두 조건이 만족되지 않으면 쉽게 개입을 허용하기 쉽지 않다. 인도적 개입이 발생했던 코소보 사태의 경우 유고군대가 300개의 코소보 마을을 전소시키고 30만 코소보인들을 강제 이주시켰기에 그 범위가 컸고, 군대를 통해 체계적인 학살이 전개 되었기에 개입하였다. 리비아 내전의 경우에도 내전 초반에는 상당히 중립적인 태도였지만 민간인에 대한 체계적인 학살이 발생하자 개입하였다. 하지만 시리아 내전의 경우 학살이 발생했지만 그 주체가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았으며, 체계적 요소가 없었기에 인도적 개입이 발동되지 못했다.[3]
3. 인도주의 개입 찬성론
3.1. 법률상 근거
인도주의 개입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이들을 반제한주의라고 하는데, 인도적 개입에 있어서 제한하는 부분이 없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UN헌장에 명시된 모든 국가들은 인권 보호의 의무를 가진다는 항목에 주목한다. 특히 헌장 서문과 1(3)조, 55조, 56조는 인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특히 헌장1(3)조는 인권보호를 국제연합 체제의 가장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로 지목하고 있다. 반제한주의자들은 이를 근거로 인도주의 개입은 무력 사용을 금지하는 국제연합 헌장 2(4)조의 제한으로부터 면책되는 것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는 UN의 승인을 얻지 않은 일방적 인도주의 개입의 경우에는 국제연합 헌장 내에서 법적 근거가 없으나 인도주의 개입에 대한 국제관습법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1827년 영, 프, 러가 그리스 독립 전쟁에 개입한 사례, 1989년 미국이 쿠바에 개입한 사례, 1991년 영국과 프랑스가 이라크에서 안전한 피신처의 설치, 1994년 코피 아난 UN사무총장이 르완다에서 발생한 집단 학살 중단을 위한 개입을 들고 있다.하지만 이러한 관점의 큰 문제는 국제연합 헌장에 명시된 무력사용의 규칙에 대한 합의를 자의적으로 해석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인권보호의 부분에서 무력사용 금지규칙이 면책된다고 주장하나, 국제법학자나 당시 헌장작성에 참여한 사람들의 견해와도 상치된다.
3.2. 도덕적 근거
사실 인도주의 개입의 주 근거가 바로 이 부분이다. 민간인을 보호하기 위한 인도적 개입은 도덕적인 의무라는 점이다. 이러한 도덕적 의무는 공통된 인간성의 개념을 통해 모든 인간은 기본적인 인권을 지니고 다른 사람들의 기본권을 지키고 존중해야 할 의무를 진다는 점이다.또는 다른 의견으로는 오늘날 지구화된 세계는 어느 한 곳에서의 대규모 인권 위반이 다른 지역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정도로 긴밀하게 통합되어 있다는 점을 들어 개입 의무의 필요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도덕적 관점은 이러한 인도적 개입의 잠재적인 남용을 초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국가가 전혀 인도주의적이지 않은 목적의 개입을 위해 인도주의 개입의 명분을 내세울 수도 있다. 또한 어떤 상황이 인도주의 위기 상황인지를 정의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4. 인도주의 개입 반대론
학자들과 국제법률가, 정책 결정자들은 일곱가지 근거에서 인도주의 개입을 반대해 왔다. 이러한 반대론은 상호 배타적이지 않으며, 현실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 페미니스트, 탈식민주의 이론가들의 저작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국제법에 인도주의 개입의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
제한주의 입장을 취하는 국제법학자들은 국제연합 안보리가 승인하지 않은 어떠한 무력사용도 금지하는 것이 최선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지적한다. UN헌장 제51조에 규정되어 있는 개별적인, 집단적인 자위권을 제외하고는 2(4)조에 어떠한 예외도 인정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지금까지 있어온 인도적 개입은 자국방위(1971년 동파키스탄에 대한 인도의 개입, 1978년 캄보디아에 대한 베트남의 개입)와 국제연합 안보리의 묵시적 승인(1998년 나토의 코소보 개입, 이라크 전쟁)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 국가는 인도주의적 목적을 최우선으로 하여 개입하지 않는다.
국가들은 대부분 복합적인 이유에서 개입을 시도하며, 명확한 이익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개입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현실주의자들은 국가이익, 실익이 없는 인도주의적 개입은 신중하지 못한 정책으로 간주한다. 다른 이들도 강대국들의 개입 전략은 개입 대상국에게 최선의 전략이 무엇인지 고려하기보다는 자국의 국가이익에 대한 고려에 따라 세워진다는 점을 지적한다.[4]
- 남용의 문제
인도주의 개입의 남용사례는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면서 제시한 명분이었다. 당시 히틀러는 독일계 국민의 자유와 안전 보장이라는 인권적 목적에서 침공을 개시했다. 즉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가 독일계 국민들을 핍박하고 있으며, 이를 구원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침공했다는 것이 당시 히틀러의 주장이었다.[5] 사실 인도주의 개입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은 강대국들이 약소국의 내정 간섭을 정당화를 수월하게 할 수 있다. 즉 이러한 개입을 허용함으로써 국가들이 무력사용을 정당화시키고 이는 세계평화를 무너뜨릴 수 있다.
- 개입의 유용성 문제
수단에서 발생한 다르푸르 사건은 이러한 유용성 문제에 대한 논의를 보여주었다. 2003년 수단과 잔자위드 민병대가 다르푸르에서 대규모 공로 최소 25만 명이 사망했으며, 20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이후 학살의 속도는 줄었지만 민간인에 대한 공격은 지속되었다. 인도적 개입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지만, 이러한 결정은 쉽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개입은 2007년에 들어서 시작되었다. 이렇게 개입이 늦어진 이유는 먼저 인도적 개입의 주체가 서구선진국이기 때문에, 수단 등 현지국가들의 반발이 우려된다는 점, 개입 할 경우 수단정부의 원조기관의 접근이 차단되어 또 다른 인권문제를 야기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 민병대의 숫적 증가로 인한 군사적 해결의 어려움, 다르푸르 개입은 수단과 남수단 정부의 평화협정체결에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점 등이 있었다.
- 다원주의적 관점에서 도덕원칙 합의의 어려움
인도주의적 개입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도덕원칙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도덕 원칙을 세우기가 어렵다. 특히 다원주의의 관점에서 인권의 개념은 국가마다 사회마다 문화마다 다르기 때문에 어느 한 관점에서 인권의 개념이 다른 곳에서는 인권의 개념이 아닐 수 있다. 그렇기에 인도주의적 위기 자체를 정의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도주의 개입을 위한 도덕원칙이 확립되지 않았기에 개입할 수 없다
- 개입은 성공을 이룰 수 없다.
인도주의 개입을 통한, 외세에 의해 한 사회에 인권이 강제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민주주의는 오직 자유를 위한 국내에서의 투쟁을 통해서만 성취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처럼 외부 세력에 의해 부과되거나 강제된 인권은 뿌리 내리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편, 일부에서는 인도주의 개입이 억압받는 집단으로 하여금 정부가 강경한 대응을 할 것이라고 예상하에 폭동이나 반란을 일으키도록 조장하는 효과를 가진다고 주장한다. 즉 이런 억압받는 집단은 정부를 자극하여 정부의 강경한 대응을 유도하고 이를 기반으로 외세를 끌여들여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 파병국에 막대한 희생을 강요한다.
인도주의 개입은 군사적 개입을 의미하는데, 파병을 의미한다. 이는 필연적으로 파병국 시민의 사망을 불러일으킨다. 당연히 이는 국가의 시민에 대한 책임문제를 일으킨다. 후술하는 것처럼 모든 국가는 시민들의 안전과 생명을 보호할 보호책임을 지닌다. 그런데 인도적 개입은 이 개념과 모순점을 일으키는데, 왜냐면 타국 시민들의 보호책임을 수호하기 위해 자국 시민들의 보호책임을 위반하기 때문이다.
5. 인도주의 개입에 있어서 인도주의적 동기
인도주의 개입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990년대이다. 탈냉전기였던 이 시기는 흔히 인도주의 개입의 전성기 시대였다. 1991년 4월 북부 이라크, 1992년 12월 소말리아에 대한 개입의 경우 인도주의적 목적을 위해 군사력을 투과하도록 압박한 것은 국내여론이었다. 북부 이라크의 경우 1991년 일어난 제1차 걸프전쟁의 여파 속에서 사담 후세인이 쿠르드족을 압박하여 대규모 난민위기가 발생하자 미, 영, 프, 네덜란드가 쿠르드족이 머물 안전한 피신처를 마련하기 위해 개입했다. 1992년 12월 미군의 소말리아 개입도 미국 시민들의 동정심에 근거하여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는 미군 사상자가 발생하자 사라지기 시작했다.반면 1994년 7월 프랑스의 르완다 개입은 남용의 사례로 거론된다. 프랑스 정부는 개입이 인도주의적 성격을 강조했지만, 비밀리에 국가이익을 추구했다는 증거가 밝혀지면서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프랑스는 르완다애국전선이 승리할 경우 르완다가 영어권에 편입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고, 그 결과 프랑스는 르완다애국전선의 승리로 집단 학살이 거의 종식된 무렵에야 개입을 시작했고, 결국 학살범들에게 이웃 국가인 콩고민주공화국으로 안전하게 대피할 길을 마련해 주었다. 물론 프랑스의 개입으로 인명 피해가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1994년 4월 초 집단학살이 확인되었음에도 100여일 동안 약 80만 명이 죽음을 당한 이후에서야 개입한 것이었다.
프랑스 르완다의 개입이 너무 늦게 이루어졌다는 비판을 받았다면, 1999년 NATO의 코소보 개입은 너무 빠르다는 비판이 있다. 전쟁 초기 NATO는 인도주의적 참사를 예방하기 위해 개입할 의사가 있음을 명시했다. 이후 NATO는 빠르게 개입했는데, 당시 주장한 이유는 코소보에서 세르비아는 인도주의 위기를 초래했고 국제법을 심각하게 위반했으며, 세르비아 사람들이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질러 공통된 인간성에 대한 도전을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NATO의 개입은 이러한 인도적인 동기만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먼저 코소보 전쟁은 유럽인근에서 일어났기에 이 전쟁의 장기화는 자칫 주변 유럽국으로 대규모 난민이 유입될 우려가 있고, 코소보의 위기가 자칫 주변국으로 퍼져나가 전쟁의 확대가능성이 우려되며, 마지막으로 밀로셰비치의 군사적 힘이 견제되지 않을 경우 보스니아의 집단 학살이 재현될 우려가 있다는 점이었다.
결론적으로 인도주의 개입은 실익이나 국가이익적 측면보다는 인도주의적 감정, 동정심이 큰 축을 차지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동정심은 실제로 자국에 대한 손해(자국병사의 사상자 발생 등)가 나오는 즉시 급격히 식어버린다는 문제가 있다. 그렇기에 정책자들은 단순히 동정심에 근간한 인도주의적 개입보다는 다른 여러 요인을 고려하게 된다. 주로 개입하지 않을 경우 발생되는 문제점을 많이 고려하는데, 만약 이러한 문제가 적다면 그에 따른 개입도 상당히 더디고 느리게 진행된다.(다르푸르, 르완다.) 반면, 이러한 방임이 큰 국가적 위기를 일으킨다면 상당히 빠르게 개입한다.(코소보 전쟁)
6. 인도적 개입의 성공 판단
인도적 개입이 성공적이었는가는 질문에 사실 대답하기가 애매하다. 결론을 굳이 낸다면 성공한 실패이자 실패한 성공이다. 왜냐하면 단기적인 성과(대규모 학살방지, 기아구제)는 매우 성공적이었지만, 장기적인 성과(분쟁해결, 사회적 체제 수립)에서는 실패했기 때문이다. 북이라크의 개입, 소말리아 개입, 코소보 개입 모두 대규모 학살과 잔학행위를 실제적으로 예방하였다. 그 사이에 학살이 있었고 기존의 학살의 피해가 있었지만 그 학살의 규모를 최소화시켰다는 점에서 충분한 의의가 있다.하지만 장기적인 차원에서 보면 성공한 것이라 보기 어렵다. 장기적으로 보면 근본적인 이 분쟁의 해결을 해야 하는데, 인도적 개입은 분쟁을 국제사회가 공동의 힘으로 억누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강제적인 힘이 사라지면 다시 분쟁이 촉발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말리아의 경우 완전히 실패했다.
- 북이라크에서의 피난처 작전의 경우, 난민 퇴거 문제를 해결했고, 비록 국제연합 구호 활동 조직에 피신처에 대한 통제 및 관리권한이 너무 일찍 이양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르드족은 1990년대 상당한 정도의 자율성을 누릴 수 있었다.
- 소말리아에 대한 미군의 개입 초기도 성공적이었다. 1992년 미국의 개입은 수천 명의 소말리아 사람들을 기아에서 구제했다. 하지만 기아 구제 임무를 넘어 군벌의 무장해제와 법과 질서의 유지의 차원에서는 처참하게 실패했다. 결국 소말리아는 군벌이 각자 국가를 세운 가운데 해적이 날뛰어 우리의 청해부대를 포함한 각국의 함대가 파병된 상황.
- 코소보의 경우에는 논란이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인도주의적 개입을 통해 대규모 학살과 잔학행위를 막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NATO가 원했던 새로운 다인종 국가 건설은 실패했다.
- 이라크/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한 아랍의 봄에 적극 개입했지만, 이쪽은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이 도리어 커지거나 새로운 세력 간의 내전이 벌어지는 등 거의 완전히 실패했다. 특히, 아프가니스탄에선 미국이 탈레반과 철군 합의를 맺고 군대를 하나 둘 빼자 탈레반은 아프간 신정부를 맹렬히 공격했고 오합지졸이었던 아프간군은 일패도지하여 미군이 완전히 철수하기도 전에 탈레반에 항복해버렸고, 탈레반 정권은 20년 만에 부활해버렸다.
7. 보호 책임 (R2P)
인도주의 개입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보호책임(R2P: Responsibility to Protect)이다. 보호책임이란 국제연합, 회원국, 시민사회가 모두 준수해야 하는 책임을 말한다.- 제1원칙: 집단학살, 전쟁범죄, 인종청소, 인류에 대한 범죄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하는데 있어서 국가의 일차적인 책임, 국제연합 사무총장은 이 원칙을 보호책임의 '근본'으로 간주한다. 이 원칙은 국가의 주권적 책임과 국가들이 이미 보유하고 있는 국제법적 의무로부터 나온다.
- 제2원칙: 국가들이 그들의 보호책임을 완수하도록 원조하고 고무할 국제 공동체의 책임, 특히 국제공동체는 국가들이 집단학살과 잔혹행위의 근본 원인을 치유하고, 이러한 범죄를 예방할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하며, 문제가 커지기 전에 이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제3원칙: 외교적, 인도주의적, 기타 평화적인 수단을 동원하여(특히 UN헌장 제6장과 제8장에 준거하여) 네 가지 범죄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적절하고도 단호한 결정을 내리고, 만약 평화적인 수단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입증되고 당국 정부가 자국 시민들을 보호하지 못한다는 것이 명백한 경우 국제연합 헌장 제7장에 규정된 바에 따라 보다 강제적인 수단을 동원해야 하는 국제 공동체의 책임
이 보호책임은 이후 두 번의 안보리 결의안을 통해 재확인 되었다.(안보리 결의안 1674호, 결의안 1894호)
8. 사례
학술적으로 인정되는 인도적 개입으로는 다음과 같다.- 1824년 그리스 독립 전쟁[6]
- 1991년 안락제공작전(북이라크 개입)
- 1992년 통합임무부대(소말리아)
- 1994년 민주주의 유지 작전(아이티)
- 1994년 르완다 내전 개입
- 1995년 보스니아 전쟁[7]
- 1998년 코소보 전쟁
- 2000년 시에라리온 내전 개입
- 2011년 제1차 리비아 내전 개입
[1] 애초에 보스니아 전쟁이 인도적 개입과 보호 책임(R2P)의 개념이 성립되는 계기가 된 사건이다.[2] 한국인의 경우 민주주의를 인간의 존엄과 동일시 여긴다. 이는 한국의 민주화 경험에 기반한다. 하지만 인간의 존엄과 민주주의는 같은 개념이 아니다. 꼭 민주주의 체제여야만 인간의 존엄이 보장된다고 보기는 어렵고, 오히려 민주주의가 다수의 횡포로 발전해 인권을 저해할 수도 있다. 좀 극단적인 사례를 들면 아랍권의 세속주의 독재정권에 맞선 '민주주의'가 결국 인간의 존엄을 여느 독재정권 못잖게 침해하는 이슬람 근본주의로 이어졌던 사례나, 더 극단적으로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주의'가 아돌프 히틀러를 집권시킨 사례가 있다.[3] 사실 이 문제에서 교묘하게 행동하는 사례가 이스라엘이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탄압과 학살이 체계적이거나 광범위하게 일어나지 않으며 돌발사고의 성격이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이것을 강조하며 자신들의 정당성을 유지하려 한다.[4]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인도주의적 개입이 실익을 쫓아 이루어진다는 개념이 아니라는 점이다. 현실주의자들은 인도주의적 개입이 무익한 정책이라고 비판하는 것이며, 다른 이들은 인도주의적 개입이 실익을 따져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더라도 그 정책이 파병국의 입장에서 수립되기에 수혜국의 입장이 배제되어 실질적인 기대효과가 적다는 의미이다.[5]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정부를 네오 나치라 하며 우크라이나의 러시아인 탄압에 맞서 탈나치화를 위해 침공했다고 주장하는 것과 소름돋을 정도로 똑같다.[6] 다만 이는 학술적으로 기원을 찾는 느낌으로 생각해야 한다. 실질적으로 인도적 개입이라는 용어자체가 나온 것이 보스니아 전쟁이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 기원을 그리스에서 찾는 느낌 정도라 보면 된다.[7] 인도적 개입의 개념을 확립시킨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