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5 11:10:54

자이르 다호자

자이르 다 호사에서 넘어옴
브라질의 前 축구선수
파일:Jair da Rosa.jpg
<colcolor=#008558><colbgcolor=#fff72a> 이름 자이르 다호자 핀투
Jair da Rosa Pinto
생년월일 1921년 3월 21일
사망년월일 2005년 7월 28일 (향년 84세)
국적 파일:브라질 국기.svg 브라질
출신지 브라질 제1공화국 자자 지바하 만사
포지션 인사이드 레프트 포워드
신체조건 168cm / 68kg
소속팀 바하 만사 FC (1938)
만두레이라 EC (1938-1943)
CR 바스쿠 다 가마 (1943-1946)
CR 플라멩구 (1947-1949)
SE 파우메이라스 (1949-1955)
산투스 FC (1956-1960)
상파울루 FC (1961)
AA 폰치 프레타 (1962-1963)
국가대표 파일: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39경기 22골 (브라질 / 1940-1956)
감독 EC 비토리아 (1971-1972)
산투스 FC (1972)
상파울루 FC (1961)
플루미넨시 FC (1975-1976)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선수 생활2.3. 이후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4. 뒷이야기5. 수상
5.1. 선수
5.1.1. 클럽5.1.2. 국가대표5.1.3. 개인
5.2. 감독
5.2.1. 클럽

[clearfix]

1. 개요

브라질의 전 축구 감독.

2. 생애[1]

2.1. 어린 시절

자이르는 리우데자네이루주의 자자 지바하 만사(Jajá de Barra Mansa)[2] 출신으로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 자이르는 바하만사와 CR 바스쿠 다 가마의 유스팀에서 뛰었는데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바스쿠에는 선수가 너무 많아서 바스쿠를 떠났다고 한다.

2.2. 선수 생활

2.2.1. 클럽

자이르는 바하 만사에서 데뷔했고 만두레이라(Mandureira)에서 아웃사이드 라이트 포워드로 본격적인 축구 선수 커리어를 시작했다. 1943년, 자이르는 CR 바스쿠 다 가마로 이적했지만 상대적으로 적은 연봉에 불만을 품고 1947년에 CR 플라멩구로 떠났다.

하지만 자이르는 플라멩구에서도 오해를 받아 1949년, SE 파우메이라스로 다시 팀을 옮기게 되었다. 오해의 내용은 플라멩구가 바스쿠에 2대5로 패한 경기에 자이르가 승부조작을 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자이르와 바스쿠 관계자가 함께 식사를 했다는 내용이 와전된 것에 불과했다.

1951년, 파우메이라스는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결승전에서 상파울루 FC와 맞붙었고 우승을 위해서 파우메이라스는 최소한 무승부가 필요했다. 전반에 상파울루의 득점으로 끌려가던 파우메이라스의 하프 타임에 자이르가 나섰다. 그는 팀원들을 독려하며 결국 '머드 게임'으로 알려진 이 시합에서 파우메이라스의 무승부를 이끌어냈고 우승을 확정지을 수 있었다.

1956년, 지투의 제안으로 산투스 FC로 이적한 자이르는 펠레, 페페 등 어린 선수들과 함께 세 번 더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우승을 차지하며 커리어의 황혼기를 성공적으로 보냈다.

자이르는 1963년, AA 폰치 프레타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2.2.2. 국가대표

자이르가 브라질 대표팀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쳤던 대회는 단연 1949년의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이었다. 그는 프리킥 2골을 포함, 총 9골을 넣어 브라질의 우승을 이끌었고 대회 득점왕에 올랐다. 이는 현재까지도 코파 아메리카 대회 최다골 득점왕 기록이다.

1950년 월드컵에서 자이르는 10번[3]을 달고 2골을 넣으며 활약했다. 하지만 브라질이 마지막에 삐끗하는 바람에 자이르는 우승의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저는 이 패배를 무덤까지 가져가야 하겠죠. 하지만 지금까지의 월드컵에서 우승에 가장 가까웠음에도 우리가 타이틀을 잃어야만 했던 이유를 신께 묻고 싶습니다.
자이르 다호자(1950년 월드컵 패배 이후)

2.3. 이후

선수 은퇴 이후 자이르는 플루미넨시 FC에서 감독으로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우승을 거두기도 했다.

2005년, 자이르는 수술 후 폐색전증으로 사망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스피드와 기술, 슈팅 능력이 뛰어났던 인사이드 포워드. 또한 프리킥에도 능한 선수였는데 1949년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의 2골을 포함, 그가 출전한 16경기의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 5골을 프리킥으로 넣었다.
자이르는 훌륭한 슈터였죠. 그는 우리에게 몇 가지에 관해 말을 했는데 경험이 많은 선수였고 몇 번 이런식으로 말을 했어요. "바보야, 내가 말했듯이 내가 한 쪽을 보면 넌 다른 쪽으로 달려가라고. 내가 네 쪽으로 볼을 패스해주면 우리는 상대를 속일 수 있을거야."
펠레
자이르의 플레이를 보지 못했다면 제르송의 플레이를 보세요. 그 둘은 매우 비슷하니까요.
페페

4. 뒷이야기

5. 수상

5.1. 선수

5.1.1. 클럽

5.1.2. 국가대표

5.1.3. 개인

5.2. 감독

5.2.1. 클럽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2] 현재의 이름은 콰치스(Quates)이다.[3] 1950년 월드컵 당시 등번호는 선수에게 배정된 것이 아니라 포지션에 따라 배분되었다. 자이르의 주포지션이 인사이드 레프트 포워드여서 자신이 출전한 경기에는 10번을 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