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5 09:13:52

아데미르

아데미르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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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파일:골든슈.png
1950 FIFA 월드컵 골든슈

1949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MVP
아데미르
}}} ||
브라질의 前 축구 선수
파일:ademir brazil.png
이름 아데미르
Ademir
본명 아데미르 마르케스 지메니지스
Ademir Marques de Menezes
출생 1922년 11월 8일
브라질 제1공화국 헤시피
사망 1996년 5월 11일 (향년 74세)
신체 175cm | 체중 73kg
포지션 스트라이커
소속팀 스포르트 클루브 두 헤시피 (1939~1942)
CR 바스쿠 다 가마 (1942~1945)
플루미넨시 FC (1946~1947)
CR 바스쿠 다 가마 (1948~1956)
스포르트 클루브 두 헤시피 (1957)
국가대표 39경기 32골[1] (브라질 / 1945~1953)
감독 CR 바스쿠 다 가마 (1967)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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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번호 9[2]
별명 queix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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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선수 생활
2.2.1. 초기 선수 생활2.2.2. 전성기2.2.3. 1950년 월드컵2.2.4. 비극 이후
2.3. 이후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4. 수상
4.1. 우승4.2. 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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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라질의 前 축구 선수.

2. 생애

2.1. 어린 시절

아데미르는 브라질의 항구 도시 헤시피에서 태어났다. 아데미르는 여느 브라질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해변에서 볼을 차고 노는 것을 즐겼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축구에 대한 열정을 보고 센트루 에스포르티부 두 피나 클럽에의 입단을 허락했고, 아데미르의 재능은 그 지방에서 가장 큰 클럽인 스포르트 클루브 두 헤시피의 눈을 사로잡았다.

2.2. 선수 생활

2.2.1. 초기 선수 생활

아데미르가 입단할 무렵인 1938년의 스포르트 클루브 두 헤시피는 캄페오나투 페르남부카누[3]의 우승을 차지한 강팀이었고, 아데미르는 유스팀에서 1년 정도 있다가 리그에 데뷔했다. 스포르트 헤시피는 다른 주의 팀들과 친선경기를 종종 가졌는데 그 상대 중 하나가 히우 지 자네이루 주 리그CR 바스쿠 다 가마였다. 여기서 아데미르는 처음에 0대3으로 끌려가던 경기를 5대4로 뒤집는데 성공했는데 아데미르는 이 경기에서 5골을 혼자 득점하는 괴력을 선보였다. 이 활약에 매료된 바스쿠 다 가마는 아데미르에게 적극적인 영입 의사를 보였고 아데미르는 결국 바스쿠 다 가마에서 뛰게 되었다.

2.2.2. 전성기

아데미르가 입단하던 당시의 CR 바스쿠 다 가마는 7위 언저리에 머물 정도로 휘청이던 팀이었다. 1942년, 아데미르가 입단한 이후 성적을 끌어올리기 시작했고 아데미르는 1944년, 12골을 넣으면서 팀을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결승전까지 진출시켰다. 비록 바스쿠는 상대였던 CR 플라멩구에게 패해 준우승에 그쳤지만 아데미르의 활약은 쏠쏠했다. 이런 활약을 바탕으로 그는 국가대표팀의 부름을 받게 되었다.

그렇게 아데미르는 칠레에서 열린 1945년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대회에 나가게 되었고, 에콰도르와의 경기에서의 해트 트릭을 포함하여 6경기에서 5골을 넣는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브라질은 아르헨티나에게 패하는 바람에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4]

이듬해의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 아데미르는 무득점이란 실망스러운 성적을 거두며 아르헨티나의 우승을 막아내지 못했다.[5] 이 성적에도 불구하고 리그에서는 플루미넨시 FC에게서 받은 계속된 구애를 받아들여 2년의 계약을 맺고 플루미넨시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당시 플루미넨시의 감독 젠티우 카르도주(Gentil Cardoso)가 팀 수뇌부에 아데미르를 영입한다면 우승을 시킬 수 있다[6]고 호언장담한 일화가 있으며 플루미넨시의 서포터였던 아데미르의 가족들이 아데미르가 플루미넨시에서 뛰도록 설득해 이적이 이뤄졌다.

플루미넨시에서도 2년의 활약 동안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우승컵을 한번 들어올리며 카르도주의 호언장담은 현실이 되었다. 계약 기간이 끝나고 나서 아데미르는 다시 바스쿠 다 가마로 돌아왔다. 돌아온 아데미르는 어느덧 20대 후반의 전성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리그에서도 30골의 득점왕, 자국에서 열린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도 7골을 넣는 활약을 펼쳐 조국 브라질에 27년 만에 3번째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타이틀을 안기는데 성공했다. 그에게 조국에서 개최되는 월드컵은 그의 커리어에 방점을 찍을 최고의 기회였다.

2.2.3. 1950년 월드컵

브라질 전국에서 월드컵 첫 우승을 위해 아데미르에게 거는 기대는 상당했다. 그에 걸맞게 개막전멕시코 전에서 아데미르는 개막 축포를 포함, 2골을 넣어 조국이 꿈꾸는 월드컵 우승의 발판을 마련했다. 브라질스위스와의 2차전에서 비겼기 때문에 유고슬라비아를 꺾어야 조 1위에게만 허락되는 결선 리그에 진출할 수 있었다. 아데미르는 이 경기에서 선제골을 기록했다. 결국 브라질은 지지뉴의 쐐기골을 포함, 2대0의 승리를 거두고 결선 리그에 진출했다.

결선 리그에서도 아데미르의 활약은 계속되어 첫 경기 스웨덴전에서는 4골을 터뜨리면서 7대1의 대승을 이끌어냈고, 스페인과의 다음 경기에서도 1골을 추가, 총 8골을 기록했다.

최종전이자 사실상의 우승 결정전 상대는 우루과이. 브라질은 2승을 거둬 1승 1무였던 우루과이를 상대로 무승부만 기록하면 우승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브라질은 애초에 우루과이도 박살내 버리고 깔끔하게 승리할 각오로 시작하자마자 우루과이를 몰아붙였다. 하지만 아데미르 역시 침묵에 빠지고 말았고, 전반에만 브라질 공격수들이 17개의 슈팅을 쏟아부었지만 소득이 없었다. 후반 2분에 프리아사가 선제골을 넣었지만 브라질은 결국 우루과이에게 뼈아픈 역전골을 허용했고, 결국 우루과이에게 다 잡은 우승컵을 내주고 말았다.
그는 그것이 인생에서 가장 큰 슬픔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축구를 하는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타이틀을 획득했지만 누구도 그의 우승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우승했을 때에만 우승에 대해 이야기했을 뿐 그들은 단지 마라카낭에서의 패배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죠. 도망치기도 했고, 정말 도망쳤어요. 그는 집에 가서 여행가방을 들고 이타쿠루사(Itacuruçá)로 떠났습니다. 여기 리우데자네이루 주에 있는 한 곳인데 그곳에서 15일 동안 숨어 있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바르보자와 연락했었습니다. 그도 매우 외로웠고 아내만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가 범인이라고 말했고 그들은 15일 이상 이타쿠루사에서 머물렀습니다.
비우마 메니지스(아데미르의 부인)

2.2.4. 비극 이후

비록 아데미르가 월드컵 득점왕을 차지했지만 다시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입는데에는 2년의 시간이 걸렸고, 팬아메리칸 챔피언십[7]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그나마 1951년 4월에 CR 바스쿠 다 가마가 월드컵 당시 우루과이 대표팀 선수들이 주축이었던 CA 페냐롤을 3대0으로 꺾으면서 나름의 한풀이는 했다. 그 경기에서 아데미르의 활약은 매우 훌륭했다. 그리고 2주 후인 4월 22일에도 페냐롤은 재대결에서 바스쿠에 0대2로 또 패했고 바스쿠는 8월에 나시오날에게도 2대0 승리를 챙겼다.

1953년에도 아데미르는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 나갔지만 대회 초반에만 기용되었고 후반에는 기용되지 못했다. 결국 브라질은 우승에 실패했다. 이 대회를 끝으로 아데미르는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했다.

그는 1957년에 친정팀 스포르트 클루브 두 헤시피에서 선수 생활을 마쳤다.
축구가 나를 버리기 전에 내가 축구를 포기합니다.[8] 선수가 선수 생활을 마치는 것은 곧 자기 자신과 맞서는 것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아데미르의 은퇴사

2.3. 이후

아데미르는 은퇴 후 자신이 전성기를 보냈던 CR 바스쿠 다 가마의 감독을 맡았지만 신통치 않았고 대신 라디오 축구 방송 해설자로 이름을 날렸다.

아데미르가 라디오 해설자로 활동할 때의 일화가 하나 있는데, 1970년 멕시코 월드컵 당시 라디오 중계를 맡고 있던 아데미르는 브라질의 4강 상대가 우루과이로 결정되자 지지뉴와 함께 전격적으로 브라질 대표팀 숙소를 방문했다. 그 자리에서 아데미르는 후배들에게 월드컵 우승을 못해도 좋으니 우루과이만큼은 꼭 꺾어서 우루과이가 가진 오만함을 꺾어주기를, 그리고 후배들에게 자신들의 복수를 해주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펠레 등 어린 시절에 당시의 비통함을 겪었던 선수들이 남아 있어서 그들의 투지를 자극했고, 후배들은 선배들과의 약속을 결국 지켜냈다.

아데미르는 골수암으로 1994년부터 투병했고 1996년에 별세했다. 그의 무덤은 히우의 상주앙 밥치스타 공동 묘역에 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브라질 최초의 넘버 나인.[9]

그는 양발 사용에 모두 능했으며 당시 기준으로 적당히 큰 키와 좋은 탄력으로 공중볼 다툼에도 우위를 점했다. 또한 발재간도 훌륭해서 대표팀 동료 지지뉴 등과 더불어 관중들의 눈을 즐겁게 했는데 빠른 스피드[10]가 기반이 되었기 때문에 더 막기 힘든 공격수였다.

또한 그는 브라질 대표팀에서 39경기에 출전, 총 32골을 넣었는데 이는 브라질 역사상 10번째로 많은 득점수이다.

4. 수상

4.1. 우승

4.2. 개인 수상



[1] 대표팀 역대 득점 공동 10위.[2] 1950년 월드컵 당시에는 등번호가 포지션에 의해 정해졌다[3] 페르남부쿠 주 리그[4] 여담으로 아데미르는 열달 후에 열린 아르헨티나와의 친선 경기에서 아르헨티나의 수비수 호세 바타글리에로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그 이후의 경기는 난투극으로 흘러갔다.[5] 이 대회에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브라질의 자이르 다호자가 아르헨티나의 주장 호세 살로몬의 다리를 부러뜨린 것을 시작으로 역사에 남을 초유의 난투극을 벌였다. 관중들이 난입했고, 경찰이 나서서 소요를 진정시킨 후에야 다시 경기가 진행되었으며 이후의 시합은 싸움 그 자체의 양상을 띠었다. 그 이후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10년 간 시합을 하지 않았고 아르헨티나는 여기에 브라질이 1950년 월드컵 개최권을 가져간 것에 반발하여 월드컵 출전 자체를 거부해버렸다.[6] 카르도주가 정확히 이렇게 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뉘앙스의 말은 여러차례 했다고 전해진다.[7] 중남미 국가들의 축구 경기. 브라질은 초청팀 자격으로 참가했다.[8] 아르헨티나의 축구 선수 베르나베 페레이라도 먼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9] 브라질 대표팀에는 그 이전에도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레오니다스 다시우바같은 스타 스트라이커들이 있었지만 9번의 등번호를 달고 필드를 누빈 스타 스트라이커는 아데미르가 최초이다.[10] 아데미르가 처음 데뷔할 때의 포지션은 아웃사이드 레프트. 오늘날의 레프트 윙어였다.[11] 페르남부쿠 주 리그[12] 리우데자네이루 주 리그[13] 이전 문서와 위키백과 등지에서는 이때 브론즈볼을 아데미르가 받았다고 했으나 정작 피파 공홈에는 이 당시 수상자 명단은 나오지도 않았다. 1982년 이후 수상자만 피파 공홈에서 인정받을 뿐이고 후대 평가 중 피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건 신인상 뿐이다.자세한 내용은 월드컵/수상 문서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