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05 09:19:08

장 2세 르 맹그르

파일:장 2세 르 맹그르.jpg
이름 장 2세 르 맹그르
Jean II Le Meingre
출생 1364년
프랑스 왕국 투르
사망 1421년 6월 21일
잉글랜드 왕국 요크셔
아버지 장 1세 르 맹그르
어머니 플로리 드 리그니에르
형제 조프루아 르 맹그르
배우자 앙투아네트 드 튀렌
직위 프랑스 원수
1. 개요2. 생애
2.1. 초기 행적2.2. 십자군2.3. 제노바 총독2.4. 아쟁쿠르 전투와 최후
3.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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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귀족, 장군. 일명 '부시코 원수'. 백년전쟁에서 잉글랜드군과 맞섰으며, 니코폴리스 전투에 참여하는 등 십자군에 가담하고 제노바 공화국의 총독을 역임하기도 하는 등 해외에서도 활약했다. 그러나 아쟁쿠르 전투에서 생포된 뒤 잉글랜드로 끌려갔고,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사망했다.

2. 생애

2.1. 초기 행적

1364년경 프랑스 왕국 투르에서 프랑스 원수 장 1세 르 맹그르와 에타블, 브리도레, 라 브레티니에르의 영주 고데마르 1세 드 리니에르의 딸인 플로리 드 리그니에르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아버지 장 1세 르 맹그르는 본래 브리도레 성의 영주로, 백년전쟁 초기에 여러 전투에서 앞장서서 싸우는 모습을 보여 '용감한 자'라는 의미인 '부시코(Boucicaut)'로 일컬어졌고, 1356년 10월 21일에 프랑스 원수로 선임되었다. 1360년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종전 협약인 브레티니 협약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의 별명을 불려받아 생전에 부시코 원수로 일컬어졌다. 형제로 도피네 총독을 역임했고 리옹의 주교이기도 했던 조프루아 맹그르가 있었다.

1372년 아비뇽으로 가서 교황 그레고리오 11세를 접견했으며, 뒤이어 아를과 알리스캄프를 순례했다. 이후 훗날 프랑스 국왕 샤를 6세가 될 도팽 샤를의 측근으로 받아들여졌다. 1378년 초, 프랑스 국왕 샤를 5세는 자신을 해칠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된 나바라 왕국의 국왕이자 에브뢰 백작 카를로스 2세의 노르만 영지를 몰수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부르봉 공작 루이 2세 드 부르봉이 원정군을 이끌고 출진했는데, 그는 부르봉 공작의 부관으로 발탁되어 4월 초부터 7월 말까지 참여해 카를로스 2세의 영지를 모조리 탈취하는 데 공헌했다.

1380년 11월 4일 랭스에서 열린 샤를 6세의 대관식에 참여했다. 이후 잉글랜드 장성 휴 칼블리칼레에서 아르투아와 샹파뉴 등지로 진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자, 샤를 6세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해군 제독 장 드 비엔에게 잉글랜드 해안을 습격하게 했고, 루이 드 상세르 원수에게 기옌을 공격하게 했다. 그는 루이 드 상세르와 동행해 몽귀용 공방전에 참여했다.

1382년, 플란데런 백작 루이 2세는 겐트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애를 먹자 프랑스 왕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프랑스군이 플란데런으로 출진했고, 그도 이 원정에 가담했다. 그는 11월 19일 코민느 다리 전투에서 두각을 드러냈고, 원정군 지휘관 루이 2세 드 부르봉은 11월 26일에 그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프랑스군의 공세로 수세에 몰린 겐트 주민들은 잉글랜드 왕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잉글랜드 왕국은 1383년 5월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를 추종하는 이단 행위를 벌이는 프랑스 왕국을 정벌하는 십자군을 일으키겠다고 선포하고, 노리치 주교 헨리 르 디스펜서의 십자군을 파견했다. 헨리 르 디스펜서의 십자군은 베르그, 부르부르, 카셀, 됭케르크, 푸르네스, 그하블린느, 메시느, 니우포르, 포페링헤, 생피에르, 그라블린, 메시느, 니우포르, 포페링헤, 생페이르 등지를 3주 만에 석권했다.

샤를 6세는 왕국의 모든 가용 병력을 모아 반격에 착수했다. 프랑스군은 아라스에 재집결했는데, 그도 여기에 가담했다. 이후 프랑스군은 공세를 개시해 디스펜서 십자군을 몰아붙인 끝에, 빼앗긴 도시들을 대부분 되찾고 적군을 그하블린느에 몰아놓고 포위 공격했다. 헨리 르 디스펜서는 처음엔 항복을 거부하고 리처드 2세가 원군을 보내주기를 희망했지만, 리처드 2세가 프랑스와 정면 대결하기 싫어서 군대를 보내주지 않는데다 그하블린느 시민들이 프랑스군에 항복하겠다고 통보하자,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이 잉글랜드로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는 조건으로 항복하겠다고 제안했고, 프랑스군 수뇌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헨리의 십자군은 10월 말까지 영국 해협을 건너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이후 부시코는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과 함께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플란데런 국경 지대를 지켰다.

1384년 6월 루이 2세 드 부르봉이 이끄는 푸아투와 기옌 원정에 가담한 부시코는 베르퇴유를 포함한 여러 마을을 탈환하는 데 기여했다. 1385년 곤트의 존카스티야 왕국의 국왕이 되기 위해 갈리시아에 상륙한 뒤 그곳 영주들의 호응을 얻으며 카스티야의 수도 마드리드로 진격했다. 이에 부르봉 공작이 이끄는 프랑스 원정대가 카스티야로 파견되어 카스티야 국왕 후안 1세와 함께 곤트의 존에 대항했는데, 그 역시 원정군에 가담했다. 곤트의 존은 정면 대결을 회피하면서 청야 전술을 구사하고, 보급대를 습격한 뒤 반격이 오기 전에 물러나는 유격 전술을 구사하는 적의 대응에 고전하다가 결국 포르투갈로 퇴각했다. 곤트의 존을 물리친 뒤, 프랑스군은 본국으로 귀환한 뒤 가스코뉴를 향한 공세를 개시했다. 부시코는 브라스엠푸이 요새를 공략할 때 몸소 성벽에 사다리를 걸고 기어 올라가는 용맹을 떨쳤으며, 뒤이어 아이옌말, 레스카흐, 몽퀴크 등지를 공략했다. 프랑스군의 가스코뉴 원정은 1387년 9월에 마무리되었다.

1388년 초, 전우인 르노 드 로예와 함께 여행을 떠났다. 먼저 베네치아에 들린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한 뒤 갈리폴리에서 3개월간 지내며 현지인들과 평화롭게 지냈다. 이후 불가리아를 거쳐 도나우강에 도달한 뒤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지그몬드를 알현했다. 3개월간 헝가리에 머물던 두 사람은 각자의 길을 가기 위해 헤어졌다. 르노는 튜튼 기사단에 가담하고자 북상했고, 부시코는 베네치아로 돌아온 뒤 예루살렘 순레 혀행을 떠났다. 1389년 1월 다마스쿠스에 도착했다가 그를 첩자로 의심한 맘루크 왕조에 의해 체포되어 카이로로 끌려가 4개월간 복역했다. 몸값을 지불하고 석방된 뒤 시나이 반도와 팔레스타인을 거쳐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수개월간 지냈지만, 베이루트에서 또다시 간첩으로 몰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가까스로 풀려난 그는 10월에 프랑스로 돌아갔다.

2.2. 십자군

이후 잉글랜드와 프랑스간의 평화 협상이 진행되면서 전쟁이 소강 상태가 되자, 부시코는 십자군에 가담하기로 마음먹었다. 1390년 제노바 공화국이 튀니스에서 활개치는 무슬림 해적을 토벌하기 위한 십자군을 준비하자, 그는 여기에 가담하려 했다. 그러나 샤를 6세는 그가 여기에 가담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부시코는 튜튼 기사단 쪽으로 눈길을 돌리고 기사 300명을 이끌고 튜튼 기사단에 가담한 뒤, 폴란드 왕국 국왕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가 지휘하는 루스-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에 맞서 싸우는 튜튼 기사단을 도왔다. 1390~1391년 겨울에 전쟁이 종결된 뒤, 부시코는 샤를 6세의 부름을 받고 프랑스로 귀환했다.

1391년 12월 25일 투르의 생마틴 대성당에서 프랑스 원수에 선임되었다. 이후 1392년 샤를 6세의 브르타뉴 원정에 동행했지만, 그해 8월 5일 샤를 6세가 르망 숲을 지나가던 중 갑작스러운 발작 증세를 보이면서 원정이 중단되었다. 1393년 5월 중순 아비뇽으로 가서 튀렌 자작 레이몽 드 튀렌과 아비뇽 교황 클레멘스 7세 및 프로방스 여백작 마리 드 블루아간의 전쟁을 중재했다. 이때 프랑스 왕실은 레이몽을 회유하기 위해 그의 딸 앙투아네트 드 튀렌과 부시코의 결혼을 주선했다. 앙투아네트는 처음엔 나폴리 국왕이자 앙주 공작 루이지 2세의 형제이며 타란토 공인 샤를과 결혼할 예정이었지만, 레이몽은 자신은 사위에게 무릎을 꿇고 싶지 않다며 거부했다. 이에 프랑스 왕실은 자신들에게 충실한 원수인 부시코와 앙투아네트를 결혼시키기로 했고, 레이몽도 받아들였다.

1393년 12월 24일, 레보 예배당에서 부시코와 앙투아네트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그는 결혼 계약에 따라 알레스 백작령, 안두즈 남작령, 포르테 베르트랑 영지, 생테티엔 드 발프란체스크 영지를 지참금으로 받았다. 이후 부시코는 장인이 마리 드 블루아와의 전쟁을 돕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내 입장을 바꿔 장인의 본거지인 오베르뉴의 요충지인 퐁지보를 기습 공략했다. 이에 분노한 레이몽은 사위가 자신에게 사기를 쳤다며 비난을 퍼부었지만, 프랑스 원수인 그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지는 못했다.

1396년,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지그몬드오스만 술탄국에 대항하고자 십자군을 모집했다. 부시코는 장 드 비엔, 기 6세 드 라 트레무야유, 앙게랑 7세 드 쿠시, 형제 조프루아와 함께 프랑스 기병대를 이끌고 헝가리로 향한 뒤, 그곳에서 신성 로마 제국, 왈라키아 공국, 폴란드 왕국, 잉글랜드 왕국, 스코틀랜드 왕국, 스위스 연방 등 유럽 각지에서 몰려온 기사들과 튜튼 기사단, 베네치아 공화국, 구호 기사단이 결집한 십자군과 합류했다. 이후 십자군은 니코폴리스로 남하했지만 9월 25일에 벌어진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참패했다. 부시코는 형제 조프루아, 기 6세 드 라 트레무야유, 앙게랑 7세 드 쿠시 등과 함께 생포된 뒤 콘스탄티니예로 끌려가 수감되었다가 몸값을 지불하기 위해 석방된 후 귀국했다.

1399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오스만군의 포위 공격을 받고 있던 동로마 제국의 황제 마누엘 2세는 유럽 전역에 구원을 요청했다. 부시코는 샤를 6세의 승낙을 받고 1,200명의 병력을 규합한 뒤 함선에 싣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했다. 이후 그해 여름에 보스포러스 해협의 동쪽 강둑을 습격해 오스만군에게 타격을 입혔다. 얼마 후 프랑스로 돌아온 뒤 아내 앙투아네트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녹색 방패를 지낸 백부인 기사단을 창설했다.

2.3. 제노바 총독

1395년, 제노바 공화국 내 귀족들간의 심각한 대립으로 초래된 무정부 상태에 질릴 대로 질린 제노바 총독 안토니오 아도르노는 프랑스국왕 샤를 6세에게 제노바의 주권을 대신 행사해달라고 요청했다. 그의 제안은 받아들여졌고, 프랑스 측은 1396년 11월 27일에 군대를 제노바에 파견했다. 부시코는 1401년 프랑스 정부에 의해 제노바 공화국의 총독으로 선임되었다. 그해 9월 1일 투르에서 기병 1,500명을 포함해 3,000명의 군인을 모은 뒤 리옹을 거쳐 9월 15일 밀라노에 도착했다. 1401년 10월 31일 제노바에 입성한 뒤 성문에 군인들을 배치했으며, 총독의 궁전으로 가서 그동안 제노바를 혼란에 빠뜨린 바티스타 보카네그라, 바티스타 드 프란치-룩사르도 등 파벌 지도자들을 체포해 반역죄를 적용해 사형을 선고했다. 다만 룩사르도는 가까스로 감옥을 탈출해 제노바를 떠났다.

그는 혼란이 극심한 제노바를 안정시키려면 강경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보고, 여러 강경책을 시행했다. 단검을 소지한 사람에 대해 사형을 선고해 주민들을 완전히 무장 해제했으며, 거리와 교회에서 벌어지는 패싸움을 감시하기 위한 광범위한 정보망을 조직했다. 여기에 귀족들이 요새로 삼을 장소를 없애기 위해 귀족 가문의 탑을 철거했으며, 집정관, 제국 순경, 기수 직위를 폐지했고, 공모자들이 만날 수 있는 장소로 간주된 형제단을 철폐했다. 그리고 도시를 확고히 통제하고자 다르세나 요새를 건설하고 카스텔레토의 기존 요새를 강화했다. 부시코는 공화국의 입법 체계와 경제 계획을 재편성하고 통합하려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리베르 마그누스(Liber Magnus) 로 알려진 법률집과 새 헌법이 반포되었고, 1407년 상 조르지오 은행이 설립되었다. 또한 피렌체의 통제하에 있는 피사 시와 제노바 시간의 통행을 위한 도로를 설계했다.

부시코의 주요 목표는 지중해에 대한 제노바의 통제를 보장하고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의 군대는 밀라노군이 점령하고 있던 해안 도시인 사보나와 사보이아 공국이 장악하고 있던 모나코를 제노바의 영토로 되돌려놨다. 1403년 키프로스 왕국의 국왕 야뉘가 키프로스 내 제노바 도시인 파마구스타를 포위하자, 그는 그해 4월에 갤리선 8척, 중장병, 석궁수를 이끌고 키프로스로 진격했다. 여기에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동맹국 및 제노바 식민지에 사절을 보내 이교도인 야뉘에 맞서 전쟁을 벌일 함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베네치아 측은 13척의 갤리선을 파견했지만, 이는 제노바를 온전히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키프로스 전역을 제노바가 가지는 걸 저지하기 위한 의도로 그렇게 한 것이었기에 전투에 적극적으로 뛰어들 의사가 없었다.

이후 야뉘로부터 평화 협상을 할 의사가 있다는 통보를 받은 부시코는 사절단을 보내 협상을 이어가게 한 뒤, 자신은 오스만 제국에 대한 전쟁을 이끌기 위해 자신의 함대를 이용하기로 마음먹고, 알렉산드레타를 급습했다. 알렉산드레타 항구와 도시는 곧 함락되고 약탈되었지만, 알렉산드레타 요새는 굴복하지 않았다. 이후 로도스로 돌아온 그는 야뉘가 평화 조건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접하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진군하기로 했다. 우선 키프로스로 가서 평화 조약을 조인한뒤 함대가 있는 로도스로 가서 알렉산드리아로 출항했다.

그러나 역풍이 불어닥치는 바람에 항해가 어렵게 되자 시리아의 트리폴리로 향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자신들의 상업적 이익을 보호하기를 열망하는 베네치아 상인들로부터 사전에 경고를 받았고, 즉시 트리폴리에 군대를 배치했다. 부시코는 트리폴리의 수비가 완강한 것을 보고 시돈과 라오디케아에 잇따라 이동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베이루트에 상륙한 뒤 약탈을 벌인 후 파마구스타로 귀환한 후 로도스로 가서 며칠간 머물다가 겨울이 다가오고 병사들이 많이 지치고 병든 것을 고려해 제노바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러나 10월 6일, 모돈 해안가 바다에서 베네치아 갤리선 11척의 급습을 받았다. 어느 쪽도 이 해전에서 우세를 점하지 못했지만, 양측 모두 승리를 주장했다. 이후 부시코의 함대는 제노바로 계속 이동하다가, 도착하기 직전에 베네치아 상선 2척을 발견한 뒤 베네치아 측이 사로잡은 포로 400명과 돌려받기 위해 이 상인들을 체포했다.

제노바에 귀환한 뒤, 부시코는 자신을 방해한 베네치아를 응징하기 위해 전쟁을 선포하고 배와 병력을 준비했다. 이에 베네치아는 샤를 6세에게 사절을 보내 부시코가 자신들의 상업 기지였던 베이루트를 함부로 약탈해 손해를 입혔음에도 도리어 자신들에게 전쟁을 일으켰으니 막아달라고 청했고, 프랑스 정부는 부시코에게 전쟁을 자제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부시코는 승복했고, 프랑스의 중재하에 제노바와 베네치아간의 평화 협상이 이어진 끝에 1406년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다.

부시코의 통치 아래 제노바는 안정을 되찾고 위상을 회복했다. 이에 베네치아의 여러 동맹국이 제노바 쪽으로 편을 바꿨다. 파도바의 영주 프란체스코 노벨로 카라레시는 베네치아가 파도바를 점령했을 때 제노바로 피신했다. 15년 동안 제노바를 상대로 반란을 이어가던 코르시카는 부시코가 파견한 토벌대에게 진압되었고, 도적떼가 들끓었던 볼트리 계곡 역시 진정되었다. 하지만 그에게 처형될 위기에서 벗어나 바르치의 말라스피나 가문 영지로 피신한 바티스타 데 프란치-룩사르도는 권력을 되찾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1407년, 그는 발 비사뇨, 발 폴세베라, 발레 아로시아에서 대중 봉기가 일어나도록 조장한 뒤 사셀로에 군대를 모은 후 제노바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이에 부시코는 봉기를 진압한 뒤 바르톨로메오 그리말디가 이끄는 6천 병력을 사셀로로 파견했다. 룩사르도는 이들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뒤 다시 도망쳐서 몬페라토 후작 테오도로 2세의 보호를 받았다.

부시코는 사셀로를 정복한 뒤 동부 리비에라로 진군해 키아바리에서 룩사르도의 잔여 반란군을 섬멸했다. 뒤이어 주민들이 봉기한 스투를라 계곡으로 향했지만, 그들이 룩사르도를 지지한 게 아니라 단순히 막대한 세금 부담에 항의하려고 봉기한 것임을 알게 되자 제노바에 충성 맹세를 하는 대가로 1년간 세금을 면제해주기로 했다. 이후 리구리아 해안을 따라 이동하면서 치안을 안정시켰으며, 제노바 공화국을 상대로 적대 행위를 서슴지 않았던 피옴비노 공작 게라르도 아피아노의 영지로 진군해 그를 굴복시킨 뒤 연간 10,000 골드 스쿠디의 벌금을 부과했다. 여기에 북이탈리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용병대장 파치노 카네로부터 프랑스 왕실의 보호를 받고 있는 제노바의 권위를 존중하겠다고 약속하는 조약에 서명하도록 강요했다.

룩사르도의 반란을 평정하고 제노바로 귀환한 부시코는 공공사업에 착수해 새로운 요새, 부두, 방파제 등을 건설했다. 그러나 제노바 공화국 내부의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반프랑스 정당은 계속해서 존재했고, 룩사르도는 도시와 관계를 유지했다. 민중은 부시코의 통치에 만족했지만, 귀족들은 그를 고깝게 여겼다. 이에 부시코는 룩사르도를 따르는 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처형, 투옥 및 추방을 감행해, 제노바에 남아있는 룩사르드 정파를 박멸하려 했다. 1408년, 비스콘티 가문과 말라스피나 가문, 몬페라토의 테오도르 2세, 제노바의 기벨린 망명자들이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의 지배에 맞서 연합하고 제노바 내 인사들과 서신을 주고받은 정황이 포착되었다. 이에 부시코는 가브리엘 마리아 비스콘티를 음모의 리더로 간주하고 체포한 뒤 곧바로 처형했다.

그러나 부시코의 탄압은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룩사르도는 몬페라토에서 계속해서 반 프랑스 정파를 지휘했고 제노바 시 및 지중해 내 제노바 식민지들과 접촉을 유지했다. 1408년 말, 그는 키오스에서 봉기를 일으키도록 유도했다. 부시코는 해군 제독 코라도 도리아에게 갤리선 4척을 맡겨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 얼마 후 노비 리구레와 사보나에서도 반란이 일어났고, 부시코는 그쪽에도 군대를 파견해 진압하려 했다.

한편, 밀라노에서는 밀라노의 첫번째 공작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가 사망한 뒤 그 뒤를 이어 공작이 된 잔 마리아 비스콘티가 형제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다. 잔 마리아 비스콘티는 프랑스의 보호를 받기로 마음먹고 부시코에게 사절을 보냈다. 당시 각지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여기저기에 병력을 보낸 터라 제노바의 방비가 허술해졌지만, 부시코는 밀라노로 직접 가기로 마음먹었다.

1409년 여름, 부시코는 위그 도베르뉴를 제노바 사령관으로 선임하고 1,500명의 소규모 수비대를 배치한 뒤, 11,000명의 병력과 4,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밀라노로 향했다. 이후 알레산드리아, 피아첸차, 파비아에서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와 가담한 반군을 연이어 격파하고 밀라노에 입성한 뒤 1409년 8월 30일에 밀라노를 프랑스 왕실의 영지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밀라노 성채는 여전히 필리포에게 가담한 구엘프 군대가 점령하고 있었다.

한편, 제노바에서는 부시코가 부재한 틈을 타 반란의 조짐이 일고 있었다. 룩사르도는 반 프랑스 연합군 12,000명을 결성한 뒤 밀라노를 공격하려는 것처럼 위장한 채 비나스코 인근에 배치했다. 부시코는 이 소식을 듣고 이들을 막을 준비에 착수했지만, 룩사르도군은 밤 동안에 2개의 기둥으로 나뉘어 제노바로 쳐들어갔다. 부시코는 적의 속임수를 눈치채지 못한 채 비나스코로 이동해 적군이 남겨놓은 후방 경비대를 상대로 교전했다. 얼마 후 테오도르 2세의 군대가 제노바에 도착하자, 공모자들이 성문을 열고 이들을 받아들였다. 위그 도베르뉴는 피살되었고, 프랑스 수비대는 카스텔레토 요새로 도피했다. 이후 테오도르 2세는 제노바 총독으로 추대되었다.

1409년 9월 8일, 제노바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부시코는 제노바로 급히 향했지만, 탈영병이 갈수록 늘어나면서 궁지에 몰렸다. 알레산드리아 인근에서 파치노 카네의 군대와 맞붙은 뒤, 밀라노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부시코는 피에몽테로 후퇴한 후 프랑스 왕국의 지원을 기다리며 겨울을 보냈지만, 단지 수백 명만 가담했고 사보이아 공작 아메데오 8세로부터 1,000명의 병력을 제공받았다. 1411년 초, 그는 4,000명의 장병을 겨우 끌어모은 뒤 공세를 재개해, 제노바 성벽 앞에 도착한 뒤 공세를 개시했지만 격퇴되었다. 이후 탈영병이 잇따라 발생하면서, 병력은 1,500명으로 줄어들었다. 결국 부시코는 제노바를 포기하기로 결심하고 사보이아로 후퇴한 뒤 그곳에 한동안 머물렀다가 파리로 이동했고, 1411년 7월 31일 파리에 도착했다.

2.4. 아쟁쿠르 전투와 최후

제노바 총독 직에서 실각한 뒤 파리로 돌아온 부시코는 랑그독 총독에 부임했다. 1413년 장인인 레이몽 드 튀렌이 사망하고 아내 앙투아네트가 튀렌 여백작이 되면서, 그는 튀렌 자작이 되었다. 1415년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가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 북부를 침공하자, 그는 이에 맞서 싸우기 위한 프랑스군에 가담했다. 그러나 뒤이은 아쟁쿠르 전투에서 선봉대를 이끌고 돌격했다가 참패를 면치 못하고 생포된 뒤 잉글랜드로 끌려갔고, 1421년 6월 21일에 요크셔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프랑스로 보내졌고, 투르의 생마르탱 성당에 안장되었다. 그의 비문에는 "황제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제국의 대순경"이라는 문구가 적혔다.

3. 저서

  • <부시코로 알려진 선한 영주 장 르 맹그르의 사실집> (Le Livre des faicts du bon messire Jean le Maingre, dit Boucicaut): 부시코의 회고록.
  • <장 드 부시코의 시간>(Les Heures du maréchal Boucicaut): 성무일도 전례집. 각 시간별로 가톨릭 신자가 해야 할 일을 시각화한 삽화를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