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명 | 장영조(張永駣) |
본관 | 인동 장씨[1] |
출생 | 1870년 8월 24일[2] |
경상도 인동도호부 장곡면 성곡동 (현 경상북도 칠곡군 석적읍 성곡리)[3] | |
사망 | 1947년 9월 10일[4] |
경상북도 청도군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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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장영조는 1870년 8월 24일 경상도 인동도호부 장곡면 성곡동(현 경상북도 칠곡군 석적읍 성곡리)에서 무과에 급제하여 종2품 경상좌도병마절도사를 지낸 침류정(枕流亭) 장우상(張宇相)의 7대손인 아버지 장두하(張斗河)와 회재 이언적의 후손인 이남상(李南祥)의 딸 어머니 여강 이씨 사이의 네 아들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10대조인 만회당(晩悔堂) 장경우(張慶遇)는 병자호란 때 고향 인동에서 의병을 일으킨 바 있고 진사시에 급제하여 종9품 영릉참봉(英陵參奉)을 지냈으며, 7대조 장성(張晟)은 무과에 급제하여 정6품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그 밖에 9대조 장원(張厡)은 종6품 선교랑(宣敎郞)의 품계를, 6대조 장석겸(張錫謙)은 정5품 통덕랑(通德郞)의 품계를 가지고 있었으나, 5대조 이하로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했다.1905년(고종 42) 3월 13일에 종9품 숙릉참봉(淑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고 이튿날인 3월 14일에 사직하였다.#
1919년 3월 전국 각지에서 3.1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장병규(張柄圭)·박팔문(朴八文)·장준식·장재식(張在植) 등과 만나 성곡동에서도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이후 4월 9일 오후 8시에 성곡동 밭 한가운데서 50명의 마을 사람들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다 20명의 주민과 함께 체포되었으며, 5월 1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2개월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청도군으로 이주해 그곳에서 조용히 지내다 1947년 9월 1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장영조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1989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