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2-17 16:58:53

장인환(1897)


성명 장인환(張仁煥)
생몰 1897년 10월 25일 ~ 1950년 7월 5일
출생지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 중리
사망지 서울특별시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장인환은 1897년 10월 25일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 중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도쿄로 유학갔고, 1919년 2월 23일 도쿄 유학생인 최승만(崔承萬)·변희용(卞熙瑢) 등 12명과 함께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 민족대회 대표자의 한 사람으로 대회 소집에 관한 취지문을 인쇄하여 24일 일본 히비야 공원에서 취지문을 배포하며 거사를 계획했다가 경찰에 일시 체포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이후 귀향한 그는 그해 6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동아예비교생(東亞豫備校生) 이용노(李龍魯)로 하여금 자금을 조달하도록 했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1921년 1월, 재일 조선청년연합회(朝鮮靑年聯合會)의 집행위원으로 피선되어 청년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고자 노력했으며, 1922년 9월에는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의 교원으로 재직하면서 배일사상을 고취하였으며, 1926년에는 조선일보 대구지국을 맡아 신간회를 지원했다. 1931년 6월 11일 조선일보 대구지국장 겸 특파원으로 재직시 일본경찰의 발검사건(拔劍事件)보도로 체포되었고 그해 7월 3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후에도 구상업학교(大邱商業學校)의 동맹휴학을 유도하기도 했으며 8.15 광복 때까지 일제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필봉으로 일제의 식민통치를 비판했다가 여러 번 고초를 겪었다. 광복 후 서울에서 말년을 보내다 1950년 7월 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9년 장인환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4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