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장제덕(張濟德) |
이명 | 장순명(張順明, 張順命) |
생몰 | 1882년 4월 8일 ~ 1937년 1월 3일 |
출생지 | 경기도 남양도호부 우정면 칠동 (현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주곡리) |
사망지 | 경기도 수원군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장제덕은 1882년 4월 8일 경기도 남양도호부 우정면 칠동(현 화성시 우정읍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4월 2일 차희식, 차병한, 차인범, 장소진, 차병혁, 이영쇠 등과 함께 만세운동 계획을 상의해 4월 3일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했다. 이윽고 거사 당일인 4월 3일, 그를 비롯한 시위 주동자들이 다른 동네 사람들에게 모두 몽둥이를 가지고 장안면 사무소로 모일 것을 전했다. 당시 면사무소에서는 면장 김현묵(金賢默)이 200명의 군중 앞에서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취지를 연설했다. 연설이 끝나자, 장제덕은 군중의 선두에 서서 투석과 몽둥이로 면사무소를 부수고 공문서를 파기했다.이후 군중의 숫자가 천여 명으로 늘어나자, 그는 이들을 인근의 쌍봉산으로 인솔하여 그곳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게 했다. 이어서 차인범 등의 동지와 함께 2천여 명으로 불어난 군중을 인솔하여 우정면 사무소로 달려가 면사무소 건물과 집기, 공문서를 파괴했다. 이후 그는 같은 면내인 화수리에 있는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해 투석하고 불을 질렀다. 이때 일본인 순사 카와바타 토요타로우(川端豊太郞)가 도주하면서 권총을 발사해 시위군중 1명이 맞아 죽자, 그는 차희식, 정서송, 이순모(李順模), 장소진, 차인범, 차병한 등과 함께 추격하여 붙잡은 뒤 쳐 죽였다.
이후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20년 12월 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요, 살인, 방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첬다. 출옥 후 수원군에 은둔했고 1937년 1월 3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장제덕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