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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집안배경
<중화민국 육해군 대원수 장공행장> 에서는 장쭤린의 기반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였다."공의 이름은 쭤린이고, 자는 우정이다. 봉천 해성인이며 원적은 산동이고 집안은 번성했다. 청 도광 초에 해성으로 이주했다. 조부대에 농업을 일으켜 소봉(관직 없는 명예직)의 칭호를 받았다."
독군서(督軍署) 참모장 짱스이가 서명하고, 이하 8명의 처장들이 서명한, 장쭤린 신도비(神道碑)에는 또 다른 서술이 써져 있다."공의 이름은 쭤린이고, 자는 우정이다. 선조는 직예인이며, 청조 말에 봉천 해성으로 이주했다."
일반적으로는 대다수의 문헌이 하북성설을 채택하고 있고 장쭤린의 장남 장쉐량도 자신의 원적을 하북성 대성현으로 불렀기 때문에 하북성 원적설이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장쭤린의 선조 장융구이(張永貴, 장영귀)는 먹고 살기 위해 봉천[1]의 동북 지역까지 와서 농지를 개간해서 농업에 종사했다. 그리고 장쭤린의 할아버지인 장파(張發, 장발) 대에 와서 소봉 칭호를 받아 집안이 제법 볼만해졌다. 장파는 아들 4형제를 두었고, 셋째가 바로 장쭤린의 아버지 장유차이(張有財, 장유재)였다. 장파가 죽자 형제들은 재산을 나누어 가졌고, 장유차이는 약간의 돈을 가지고 분가하여 봉천성 해성현 소와촌에 정착, 가장사촌에 잡화점을 열었다.
2. 밑바닥 시절
2.1. 유소년기
하지만 장유차이는 놀기 좋아하는 한량이었고 잡화점은 잘 되지 않았다. 잡화점이 망했음에도 장유차이는 도박만 하다가 결국 도박빚을 갚지 못해 장쭤린이 14세 되던 해에 살해되었다. 이 꼴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장쭤린은 매우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가난을 이기지 못한 장쭤린의 모친은 식구들을 거느려 친정인 봉천성 진안현 소흑산 이도구로 이주했으나 친정 역시 찢어지게 가난한 데다가 먹여살릴 식구도 많았다. 이 때문에 교육을 받지 못하다가 어느 날 양징전(楊景鎭, 양경진)이란 사람이 하던 사숙에 숨어들어 도강을 하다가 양징전에게 걸렸다. 양징전은 이를 의아하게 여겨 장쭤린을 불러내어 자초지종을 묻자 장쭤린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저의 이름은 장쭤린이며 공부하고 싶은데 집이 가난해 학교를 다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주 여기에 와 몰래 선생님 말씀을 들었습니다."
양징전은 장쭤린의 학구열에 감동해 그의 수업료를 면제하고 사숙에 받아주었으며 책과 공책을 사서 공부를 도와주었다. 하지만 장쭤린 역시 부친처럼 도박에 빠져들어 과자를 팔아 돈을 좀 벌다가도 그 돈을 도박장에서 쓰곤 했으며 모친의 강권에 목공일을 시작했으나 이내 싫증을 내며 그만둬버렸다. 결국 장쭤린은 먹고 살 길을 알아내기 위해 집을 나가 영구 고감진까지 흘러들어갔고 마차 점포의 잡일꾼으로 일하게 되었다. 여기서 당나귀를 치료하는 법을 배우게 된 장쭤린은 수의사로 일하게 되어 한동안 먹고 살 수 있었으나 여전히 가난했다.
그러다가 1894년 청일전쟁이 터졌다. 청군은 바다와 육지 양쪽에서 지리멸렬하게 당하고 있었는데 마침내 일본군의 제3사단장 가쓰라 타로는 12월 13일 해성을 함락했다. 해성은 봉천과 요동반도의 가운데 있어 양쪽에 위압을 가할 수 있고, 산해관(山海關)으로 가는 길도 뚫려 있어 만약 베이징까지 진격하고자 한다면 실로 요지였다. 다만 당시 일본의 국력으로는 산해관을 돌파한다는 것 자체가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청나라 조정은 태평천국 운동을 겪은 75세의 노장 쑹칭(宋慶, 송경)을 기용했다. 그는 여순에 주둔하는 의군(毅軍)을 이끌고 급히 내달렸다. 장쭤린은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여겨 20세의 나이로 쑹칭이 조직한 의군에 입대, 마위쿤(馬玉崑, 마옥곤) 휘하의 기병이 되었다. 말을 잘 다뤘던 장쭤린이라서 장쭤린은 곧 초장에 발탁되었으나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는 통에 장쭤린은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다. 천둥벌거숭이로 지낼 때보다야 그럭저럭 여유가 생겨, 1895년에는 21세 나이로 지주 집안의 둘째 딸 자오춘구이(趙春桂, 조춘계)와 결혼하였다. 고향에서 나름대로 한가하게 지내던 장쭤린이었지만 그는 무미건조한 생활에는 쉽게 싫증을 내던 사람이었고, 다른 일이 없을까 하고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2.2. 마적
청일전쟁 후 동북 지방은 몇 가지 문제에 시달리게 됐다. 첫째는 해산된 군인들인데, 한번 전쟁을 경험한 인물들이 시골로 가서 한가하게 지내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시골로 가더라도 가난하여 딱히 할 일도 없었기에 이들은 결국 끼리끼리 뭉쳐다니게 되었다. 또한 거지들이 들판에 넘쳐났고, 게다가 이를 관리해야 할 관부는 썩을 대로 썩어서 치안은 엉망이었다. 그 결과 마적(馬賊)들이 도처에 횡행하게 되었다.세상은 갈수록 무법천지가 되어 가는데 나라는 자신들을 지켜줄 생각이 전혀 없으니, 사람들은 자체적인 치안 확보를 위해 스스로 대단(大團)이라는 무장 조직을 만들어 적을 막아야 했다. 그리고 마적도 마적 나름이라, 마구 약탈하고 사람들을 해치고 다니는 못된 비적(匪賊)들이 있는가 하면, 대단을 이루어 호방한 행동을 하고 주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자체적으로 무력을 갖춰 비적들을 막아 세우는 마적들도 있었다. 장쭤린은 전자가 될 만큼 상황이 나쁘지는 않았기 때문에, 후자가 되려고 하였다.
1900년. 장쭤린은 장인 어른인 지주 자오잔위안(趙占元, 조점원)에게 도움을 구했다. 이 조씨 집안의 조가묘(趙家廟)로 힘센 청년들을 불러 모았고, 20여 명이 되자 장쭤린은 그들 사이에서 소두목 노릇을 하며 인근 몇 개 마을의 치안을 책임진다고 나섰다. 장쭤린은 자신의 지역에서 규칙과 규율을 철저하게 지키고 치안을 유지해 나가, 이 지역에서는 비적들이 출몰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가 일을 잘 한다고 칭찬했다.
그의 명성은 이 마을 저 마을 퍼져나갔다. 더불어서 그에게 몰려드는 청년들과 보호를 부탁하는 마을도 늘어나, 그는 20여개 마을을 관할하는 큰 대단이 되었다.
그 조가묘의 서북쪽에는 또다른 큰 대단이 있었는데, 단주의 이름은 진서우산(金壽山, 김수산)이라는 양반이었다. 진서우산 역시 떠도는 건달들을 불러 모아 100여명의 대단을 조직했는데, 문제는 그는 비적이나 다를 바 없는 작자였다는 것이다. 진서우산은 자신의 영역에서 실질적인 왕 노릇을 하며 그 흉악한 일이 비적에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보민(保民)을 해야 할 마적 대단이 되려 해민(害民)을 자행하는 기막힌 일이었던 것이다.
백성들은 참다 못해 장쭤린을 찾아갔다. 장쭤린은 부하들을 보내 진서우산을 내쫒고 그의 구역을 접수했다. 부하들은 더욱 늘어났고 세력 또한 더욱 늘어났다. 하지만 좋은 시절도 잠시였다.
1901년 섣달, 그믐날 야밤에 장쭤린은 진서우산 무리의 기습을 받았다. 느닷없는 일격을 당한 장쭤린은 허둥지둥 딸과 부인을 데리고 포위망을 뚫고 간신히 피신했고, 현재 요녕성 태안현 소속인 팔각대(八角臺)까지 피신했다. 얼마나 급박했던지, 부인 자오춘구이는 도망치는 마차 안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이가 장쉐량(張學良)이다.
본래 장쭤린은 팔각대를 지나 요남의 녹림 펑더린(馮德麟)을 찾아갈까 했다. 그러나 팔각대는 상점이 50개나 있는 큰 마을이었고, 장쭤린 식구와 딸려온 40여명의 일행은 팔각대의 보호를 받으며 머무르게 되었다. 장쭤린이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아 그 평판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팔각대 상회 회장인 장쯔윈(張紫云, 장자운)은 명성 높은 장쭤린을 한번 보고 싶어하다가 드디어 실물을 보았다.
"사람이 북방인이지만 인상이 남방인 얼굴이고, 이목구비도 수려하구만. 행동에도 절도가 있고 말하는것도 속되지가 않고. 명불허전일세. 이곳에 머물게 하게."
당시 팔각대 대단의 두목은 장징후이(張景惠)였는데, 장쭤린은 제법 명성이 있음에도 굴러 들어온 신세라 두 번째 자리를 달게 받아들였다. 이 장징후이는 훗날 장쭤린의 측근으로 맹활약하게 됐다. 지방 유지들도 이름 높은 장쭤린이 팔각대를 지켜준다는 것에 큰 만족감을 표시했다. 많은 고생을 했던 장쭤린이지만 여러 좋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점점 성장하며 생활에 활로가 보였고, 이제 뜻을 펼칠 마음을 크게 먹었던 것이다.
3. 출세가도
3.1. 공직자 전환
팔각대의 대단에서 시간을 보내던 장쭤린은 무장 조직에 대한 경영과 세력 확대에 주력했고, 그곳의 상인들과도 친하게 지내며 신임을 얻고 명성을 날렸다. 하지만 1902년 쯤이 되자, 동북 지역은 점점 혼란을 벗어나 치안 문제에서는 비교적 안전해졌다. 자연히 대단이 있을 이유는 없어졌고, 장쭤린의 조직도 해산 위기에 몰렸다.장쭤린을 팔각대 마을에 받아들인 상회 회장 장쯔윈은 이 무장 조직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다. 만약 그대로 해산한다면, 혹시 이들이 나쁜 마음을 품고 지방에 해를 끼칠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장쭤린과 우정을 쌓은 일도 있고 해서, 웬만하면 이 조직을 그대로 유지해서 나라에 도움이 되게 하려고 했다. 장쯔윈을 비롯한 상인들은 신민부(新民府) 지부인 쩡윈(增蘊, 증온)을 찾아가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장쭤린을 칭찬했다.
지부 쩡윈은 장쭤린을 만났다. 장쭤린은 이때 본능적으로 이것이 대단한 기회임을 깨달았다. 어차피 민간 조직으로 남아봐야 한계가 있는데, 정부 편입이 된다면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장쭤린은 쩡윈에게 제자 신분으로 머리를 숙여 절을 했고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쩡윈은 이야기를 나누어보다가, 그가 인상도 좋고 태도도 온화하고 점잖은 편이라 아주 좋은 인상을 받아 그의 조직을 받을 생각을 했다.
운도 따라주었다. 성경장군 쩡치(增琪, 증기)는 이때 '사사로운 단을 공적인 단으로 바꾸어' 마적 등 도적들을 선량한 백성으로 만들자는 방침을 조정에 건의했다. 그런 형편이라 장쭤린은 바로 비준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장쭤린은 쩡윈에게 "지금 제 밑에는 1개 대대 병력이 있습니다!"라고 거짓말을 했던 처지라, 비준을 얻자마자 팔각대로 달려와 있는대로 말을 사고 단원을 늘리고, 근처의 마적 집단에게 연락하여 자기네 패거리에 오라고 권했다. 이렇게 해서 485명이 모였고, 기병 3소대와 보병 2소대를 책임진 장쭤린은 조직 두목에서 정식 관군이 되었다.
3.2. 러일전쟁
그야말로 녹림 생활을 하다가 신민부라는 국가 기관에 들어온 장쭤린은 생소한 생활 환경에서도, 그의 가장 큰 장기인 처세술을 발휘하며 금세 자리를 잡게 됐다. 그는 지부 쩡윈이 이 기관의 핵심이라는 것을 알고 그에게 알게 모르게 뇌물을 찔러주는 한편, 항상 예의를 차리면서도 무엇을 시키면 군말없이 수행했고 복종했다. 또한 상인들을 잘 다루는 편이었고 실무에 밝았으며 부하 관리에도 재능을 보였다. 이에 쩡윈은 그를 믿음직한 참모로 여겼다.또한 신민부 순경국장 왕펑팅(王奉廷, 왕봉정)을 교묘하게 따돌려, 신민부의 군사 실권을 장악하는 수완을 발휘한다. 이렇게 조직 생활에 완벽하게 적응하던 그에게 러일전쟁이라는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청 정부는 요하 서쪽을 중립 지구로, 동쪽을 전쟁 지구로 선포했지만 전쟁이 벌어진 마당에 그런 것은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러시아 군대나 일본 군대나 포악하기는 서로 쌍벽을 이루었고, 치안이 불안해지자 잠잠하던 마적떼도 다시 벌떼 같이 일어나 또 다시 혼란에 빠졌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장쭤린은 치안 유지에 노력하기보다는, 과연 무엇이 자신에게 유리할까 고민했다. 그가 보기에 러시아군이 꽤 유리해 보였기에, 그는 러시아군에 접촉해서 무기를 타내고 돈까지 얻어내고는 러시아군을 위해 공권력을 함부로 사용해 자기 휘하의 부대를 동원했다. 하지만 전쟁은 일본 쪽으로 판세가 기울었다.
장쭤린은 삽시간에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처형당할 뻔하기까지 하지만, 여기서 또 다시 기지를 발휘해 이번에는 일본 쪽에 붙어 그쪽의 지원을 받고 싸우기 시작한다. 이런 식으로 시간이 흘러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나게 되자, 이쪽 저쪽으로부터 조금씩 지원을 받은 장쭤린의 부대는 3개 부대가 더 늘어났다. 그러는 사이에 출세까지 해서 신임 성경 장군 자오얼쉰(趙爾巽, 조이손)은 장쭤린에게 3개 부대를 5개 부대로 편성토록 했다.
3.3. 두리싼 토벌
밑에 부하들도 어느 정도 되겠다, 장쭤린은 지방 마적들을 다시 열심히 소탕하고 그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이름을 날리던 마적 톈위번(田玉本, 전옥본)은 세력이 1,000명을 훌쩍 넘는 대마적이었는데, 장쭤린의 부대에 피격되어서 사망했다. 마적 소탕을 하면서 공을 세우고, 마적 무리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동시에 백성들로부터 인심도 살 수 있으니 이 마적 사냥이란 것은 실로 남는 장사였다.다만 두리싼(杜立三, 두입삼)이라는 대마적은 장쭤린조차도 손을 대기 껄끄러운 상대였다. 요중현(遼中縣)에 세력을 두고 있는 두리싼은 자칭 마상황제로 불리면서 관군조차 그를 피해다닐 정도였고, 백성들은 두리싼을 보면 "두 대인" 이라고 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자오얼쉰은 공을 세우기 위해 몇 번 부하들을 보내 두리싼을 잡도록 했으나 번번히 당하기만 할 뿐이었다.
쉬스창의 모습 |
1907년이 되자 이 지역에 쉬스창(徐世昌)이란 남자가 등장한다. 이 사람은 훗날 중화민국 4대 대총통까지 하는 인물로, 전형적인 위안스카이 라인이다. 그는 흑룡강성, 길림성, 요녕성 3개 성을 관할하는 총독에 임명되었고, 두리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똑똑하다고 소문난 지현 인훙서우(殷鴻壽, 은홍수)를 신민부에 보냈다. 신민부에 도착한 인훙서우는 장쭤린의 협조 아래 두리싼을 잡을 계책을 꾸몄다.
두리싼은 말을 타는 재주가 남달랐고, 말 위에서 쌍권총을 쏘는데 솜씨가 백발백중이었다. 본거지의 성곽은 견고했고 따르는 무리들은 흉악한데다 검문 초소도 많아 함부로 공격하다가는 큰 피해를 입을 것이었다. 장쭤린은 계책을 내어, 사람을 시켜 두리싼에게 축하 서신을 보냈다. 두리싼이 봉천성의 높은 자리를 맡게 되었으니, 어서 신민부로 와서 쉬스창 총독에게 감사를 드리라는 것이다.
두리싼은 이 편지를 보고 생각한 끝에 경솔하게 움직이지 않기로 했다. 모친과 형제들이 신민부에 가면 크게 당한다고 반대했기 때문이다. 계책이 실패했지만 장쭤린은 또 다른 계책을 내었다. 두판린(杜泮林, 두반림)을 이용하는 것이다. 두판린은 두리싼의 양아버지로 지역 유지였고 두리싼이 어르신으로 모시며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일전부터 두판린과 왕래가 있던 장쭤린은 직접 두판린을 모시고 오고, 인훙서우는 두판린을 성대하게 대접해서 지금 하는 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두판린은 장쭤린의 말에 따라 두리싼에게 편지를 쓰게 됐다. 유협의 일이야 평생 할 일이 아니니 이 조상의 이름을 빛낼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내용이었는데, 두리싼은 머뭇거리다가 존경하는 어르신의 말이라 13명의 부하만 이끌고 출발했다. 1907년 6월 6일이었다.
움직이기 편한 차림으로 온 두리싼은 인훙서우를 만나, 벽을 등지고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언제든지 쌍권총을 꺼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별다른 문제는 없었고, 곧 이야기가 끝나자 인훙서우는 소리쳤다.
"손님 가신다!"
두리싼은 방문 앞에서 몸을 굽히고 인사를 했다. 바로 그 짦은 순간, 장쭤린의 부하 탕옥상 등이 비호같이 달려들어 두리싼을 꺼꾸러뜨렸다. 자랑인 쌍권총은 금세 빼앗겼고 그는 결박을 당했다.
"시간 끌어 좋을 것 없소! 어서 처리해 버립시다."
장쭤린은 그날 밤에 바로 두리싼을 총살시켜 버렸다. 그 순간, 장쭤린의 부하 장징후이는 부대를 이끌고 두리싼의 본거지를 습격했다. 두목을 잃은 마적단은 오합지졸이라 상대가 되지 않았고, 결국 조직은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총독 쉬스창은 매우 기뻐서 장쭤린에게 5,000량의 은을 내림과 동시에 봉천성 순방영 전로 통령으로 발령했다. 이제 장쭤린은 5개 대대의 마보군을 지휘하게 된 것이다. 동북 지역에서 장쭤린은 강력한 무장 조직이 되었다.
마적 소탕에서 보인 능력으로 1908년 장쭤린은 요서 북부의 몽골 마적을 상대하게 되었다. 이 몽골 마적들의 뒤에는 러시아 제국이 있었다. 건조한 초원이 끝없이 펼쳐졌고 여름에는 꿀벌만한 모기가 득실거리는 곳이라 이 일은 매우 어려웠지만, 장쭤린은 또 다시 특유의 적응력을 보이며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형에 능숙하고 주민들의 사정에 능한 몽골 마적은 어려운 상대였다.
1909년 고전하는 장쭤린에게 쉬스창은 병력을 더 지원해주었고, 이제 장쭤린은 3,500명을 거느린 동북 만주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 되었다. 쉬스창의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서 장쭤린은 졸병보다 더 고생하며 솔선수범을 했고, 온갖 고생 끝에 유명한 몽골 마적들을 죽이거나 러시아 지역으로 쫓아내었다.
이렇게 순조로운 관리 인생을 보내던 장쭤린에게 신해혁명이라는 기회가 연달아서 찾아오게 됐다.
3.4. 신해혁명
혁명은 무서운 기세로 타올랐다. 남방에서 머나먼 봉천성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혁명단원 장룽(張榕, 장용) 등은 신군부의 란톈웨이(藍天尉, 남천위) 등과 연락을 하며 기회를 엿보았다. 란톈웨이의 신군 제2여단은 봉천성 북대영에 주둔하였고, 성 내에 있는 유일한 주둔군이었으므로 성공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 하지만 이들은 경험이 부족해서 대사를 그르치게 됐다.
1911년 5월, 자오얼쉰은 동삼성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해외 시찰을 하다가 혁명 소식을 듣고 경악하여 재빨리 귀국해서 대책을 짜내느라 고심했다. 논의를 하던 중 순방영 통령 우쥔성(吳俊陞)을 불러들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들은 구군이라 혁명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어 안심할 만했고, 또 우쥔성 등은 자오얼쉰의 옛 부하였다. 자오얼쉰은 즉시 우쥔성을 성 내로 불러들여 수비를 견고하게 하려고 노렸다.
이 정보를 장쭤린이 가장 먼저 파악하게 됐다. 그는 이미 벌써 자오얼쉰의 옆에 자기 사람을 심어 놓았고, 봉천성의 강무학당(講武學堂)에 장징후이, 탕위린, 장쭤샹 등 자신의 측근들을 보내 교육을 시키면서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장쭤린은 이 소식을 듣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7개 부대를 모두 모아 말을 타고 봉천을 향해 쉬지도 않고 달렸다. 오는 도중 우쥔성이 그를 발견하기도 했다.
"무슨 일이오? 아무튼 반갑소이다."
"그냥 그런 일이 있소."
"그냥 그런 일이 있소."
속내를 드러내지 않은 장쭤린은 우쥔성이 사정을 파악하기 전에 봉천성에 입성하는데 성공한다. 그는 즉시 총독 자오얼쉰을 만나 예의를 갖추고 말했다.
"시국이 위급해서 혹시 총독께서 위험에 처하지는 않았나, 하고 급하게 부대를 인솔해서 왔습니다. 총독께서 명령도 안 내리셨는데 함부로 군사를 움직인 것에 대해서는 달게 벌을 받겠습니다. 저희 부대를 거두어주신다면 이 장쭤린은 한 목숨 바쳐 총독 각하를 보호하고 죽을 때까지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실상 급히 군사가 필요하고, 또 때마침 장쭤린이 왔기 때문에 자오얼쉰은 기뻤다. 거기다 장쭤린이 저런 식으로 나오자 감격하여 흔쾌히 허락하였고 부대 이탈에 대한 어떤 처벌도 내리지 않음은 물론, 오히려 상을 주었다.
장쭤린은 수도 방위를 맡는 명령 이외에 중로 순방영 통령을 겸임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장쭤린은 이제 15개의 부대를 통솔하게 되었으며, 봉천 성내에 있는 군부대에서 최고의 실력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3.5. 혁명당원 장룽 살해
장룽 |
장쭤린이라는 군사력을 가지게 된 자오얼쉰은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는 신군부 장령 등을 압박해서 보경안민(保境安民)이라는 주장을 제기, 통과시키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이 주장은 혁명에 반대하고 계속해서 황제 체제를 유지하다는 전형적인 보황(保皇) 노선이다. 그리고 장쭤린이 그 앞잡이로 활약했다.
하지만 이미 전국이 혁명의 기운으로 불타오르는데, 저런 짓을 한다고 해서 혁명의 기세를 막기는 힘들었다. 봉천의 혁명당원들은 시내에 모여 우창 봉기(武昌 蜂起)에 어떤 방식으로 호응할까 논의했다. 격렬한 논쟁 끝에 평화적인 방법을 이용하기로 하고 란톈웨이, 우징롄 등의 혁명당 수령은 손에 피 한방울 묻히지 않고 동북 정권을 탈취할 계획을 세웠다.
우징롄은 봉천성 자의국 의장 명의로 성내 각계 인사들에게 회의를 소집하고, 혁명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자고 했다. 혁명파가 세운 계획은 치안 유지의 명목으로 봉천성 보안회를 조직한 뒤, 청나라 조정에서 임명한 총독 자오얼쉰을 내쫒고 혁명파 신군부 란톈웨이를 관외도독으로 추천, 우징롄을 봉천성 민정장(民政長)으로 추대하여 독립을 선포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북의 군대를 이끌고 관외로 진입, 혁명을 돕자는 계획이었다.
뭔가 굉장히 허술하고, 고생은 덜하면서도 요행수를 바라는 작전이었지만 그 당시 경험 없는 미숙한 혁명당원들은 이 정도가 한계였다.
앞서 말한 우징롄은 봉천교육회 회장, 봉천 자의국 의원 등을 지냈으며 곧 자의국 의장까지 되었다. 그래서 이런 명목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을 수 있었던 것. 그는 진보적 사상을 갖추고 있었고, 일을 처리하기 위하여 1911년 12월 12일 보안회의를 소집했다. 참여한 사람은 각계 인사 200여 명이었다. 물론 자오얼쉰도 장쭤린을 대동하고 회의에 참석했다.
물론 노회한 정치가인 자오얼쉰이 아무 생각 없이 나간 것은 아니다. 그는 장쭤린에게 명령해서 회의장 주변에 총을 든 요원들을 쫙 깔아놨다. 압력을 주는 것이다. 물론 장쭤린 본인도 권총을 들고 회의에 참석했는데, 얼굴에 살기가 충만했다고 한다. 당연히 회의장은 회의는 커녕 살벌한 모습에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분위기가 감돌았다.
하지만 기세등등한 젊은 혁명당원들은 겁을 먹기는커녕 자신들의 주장을 폈다.
"청조에서 독립해서, 자치 기구를 세우고 독립합시다!"
자오얼쉰은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나는 당신들이 문제를 논의하자고 하기에 왔는데, 뭐? 자치? 독립? 그게 그렇게 쉽게 될 수 있는 건가!"
"독립을 선포하시오!"
"독립을 선포하시오!"
사방에서 혁명당원들이 자오얼쉰에게 독립을 요구하던 바로 이때, 자오얼쉰을 수행하던 장쭤린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튀어나왔다. 그는 권총을 들고 탁자를 총으로 탕탕 내려치며 흉신악살 같은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나 장쭤린은 군인이다! 오로지 총독 각하를 보호할 뿐이다, 이 말이다! 불평을 계속 늘어놓는다면, 비록 어제의 동지라고 해도 이 총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지!"
동시에 회의장 주변에 있던 장쭤린의 부하들이 모두 권총을 빼들었다. 이런 마당에 회의가 지속될 리가 없었다. 혁명당원들은 분기탱천해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고, 그들을 지지하는 의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회의장은 보황파 세력밖에는 남지 않았다. 회의 안건도 자연히 자오얼쉰의 뜻대로 되어 국민 보안공회가 만들어졌는데, 말이 보안공회지 보황 단체나 다를 바 없었다. 물론 자오얼쉰은 실권을 그대로 지켰다. 혁명파가 보황파에 제대로 얻어 맞은 사건이었다.
다음날인 12월 13일. 자오얼쉰은 란톈웨이 협통(協統 : 여단장)을 어떻게 요리할까 고민했다. 전날의 회의에서 혁명파가 혁명 사상을 가진 -그리고 쑨원의 동맹회 회원이기도 한- 란톈웨이를 관외도독으로 밀려고 했다가 자오얼쉰에게 저지당했는데, 언제 또 다른 수작을 부릴지 모르므로 그들의 군사력을 모두 빼앗아야 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인물인 베이징의 위안스카이에게 전보를 쳤다.
위안스카이 |
"서루칭(攝汝淸, 섭여청)에게 동북 2혼성군의 협통직을 잠시 겸직하게 하여 봉천에 주둔시키고 치안을 담당하게 해 주십시오."
이 전보는 사실상 모든 군사적 실권을 서루칭에게 주자는 것이었다. 서루칭은 전형적인 구식 군인이었으며 무엇보다도 자오얼쉰의 충식한 수하였다. 위안스카이가 이를 승낙하면서 자오얼쉰은 혁명파 란톈웨이의 권한을 모두 빼앗아 버렸다. 그리고 그를 불러서 점잖게 말했다.
"란톈웨이 협통이 뜻이 크고 식견이 높은 분이라는 것이야 유명하지요. 그래서 이번에 동남의 각 성을 돌아보시도록 하고, 우리의 실정을 널리 알리고 여론을 청취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새로 출발하는 봉천 보안공회가 국민의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는 취지도 널리 알렸으면 합니다. 때문에 협통의 자리는 잠시 맡겨 두고 서둘러 출발하도록 하시고 수시로 보고를 해 주십시오."
실로 교활한 계략이었다. 자오얼쉰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란톈웨이를 치울 수 있었는데, 정작 외부에서 보면 (산해)관외에 있는 사람을 관내로 보내는 것이니, 란톈웨이는 아주 중요한 일을 맡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관외, 그러니까 봉천성의 혁명파들은 자신들의 혁명 지도자를 손도 못 쓰고 잃게 되었다. 장쭤린이 모시는 인물은 그만큼이나 교활했다. 이렇게 충돌하는 과정에서 장쭤린은 란톈웨이의 무장을 직접 해제시키려고 하는 등 은근히 협박을 가했다.
란톈웨이를 처리했으니, 다음은 장룽 차례였다. 장룽은 북경에서 러시아어를 배우다 러일전쟁이 일어난 직후 봉천으로 들어와, 관동자위독립군을 조직하고 비밀리 간행물을 발간하여 혁명을 고취시켰다. 그러다가 일본으로 도망갔고, 그 유명한 혁명가 황싱(黃興, 황흥)과 함께 혁명 활동을 했다. 1910년에 귀국한 뒤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봉천에서도 혁명을 준비하며 조직을 만들고, 군민을 포섭했는데 그 숫자가 1만이 넘어 기세가 대단했다. 그들의 목적은 무장봉기였다.
이 과정에서 장룽은 위안진카이(袁金凱, 원금개)라는 사람에게 할말 못할 말을 다 했으나, 사실 위안진카이는 자오얼쉰의 사람이었다. 또한 자오얼쉰은 장쭤린을 장룽과 친구가 되게 했다. 따라서 이 계획은 줄줄이 자오얼쉰의 귀에 들어갔고, 이제 선수를 칠 차례였다.
1912년 1월 23일. 위안진카이는 장쭤린과 장룽을 불러 조촐한 저녁 식사를 대접했다. 서글서글한 장룽은 무서운 음모를 깨닫지 못했고, 한참 식사를 하던 중에 위안진카이는 문득 장쭤린에게 말했다.
"먼저 일어나시겠습니까?"
"그러지요."
"그러지요."
이것이 계획을 실행하자는 신호로, 장쭤린은 먼저 일어나 부하들을 불러 준비를 시켰다. 맛있게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던 장룽은 괴한들로 위장한 장쭤린의 부하들의 총격을 받아 반항도 못해보고 현장에서 즉사했다.
장룽이 죽고 난 후 그 피가 마르기도 전에 장쭤린은 패거리를 이끌고 장룽의 집을 수색하는 한편, 장룽의 조수와 혁명당원 등 100여 명을 처형했다. 성내는 공포에 떨었고, 자오얼쉰은 "통령의 직분을 지키고 악질분자를 처단하여 민심을 빠르게 진정시켰다. 그대의 행위는 표창을 받을 만하다."며 그를 치하했다. 장쭤린은 그 대가로 사단장급의 자리에 오르지만, 아직 사단장은 아니었다.
3.6. 위안스카이에게 아첨하다.
한편, 상황을 본 장쭤린은 자기가 더 출세를 하려면 위안스카이에게 붙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는 보황이니 혁명이니 하는 이념 따위에 연연하지 않았고, 어떻게 하면 위안스카이의 마음을 잡을 수 있을까만 연구했다. 처음에 위안스카이가 청조를 지키려고 생각했을 즈음에 장쭤린은 33명의 장령들과 의견을 모아 "결사적으로 황실을 지키겠습니다." 라는 연서를 보냈다. 진충보국하겠다는 말이다.흥미를 느낀 위안스카이는 장쭤린과 몇 번 연락을 하면서, 현재의 황제인 선통제가 물러나는 것은 역사적 필연이라는 식으로 넌지시 운을 떼었다. 그리고 선통제가 물러나면 장쭤린이 동삼성 독판(督辦)이라는 높은 자리에 임명될 것이라는 식으로 말했다. 장쭤린은 매우 크게 기뻐하면서 보황론을 팽개치고 공화제를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장쭤린은 다시 두 번이나 위안스카이에게 전보를 보내 공화제를 적극 지지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위안스카이가 임시 대총통이 되자 누구보다 빨리 아부하는 전문을 보냈다. 이러한 행동은 위안스카이에게 어느정도 인정을 받게 됐다. 마침내 위안스카이의 "성은"으로 장쭤린이 맡고 있던 부대가 육군 제27사단이 되었고, 그는 38세의 나이로 사단장이 된다. 여기에 포병, 공병, 수송대 등 뛰어난 부대도 얻어 면목을 일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부하들로 장쭤샹, 탕위린, 장징후이 등이 기용되어 이 27사단은 사실상 장쭤린의 사병 집단이 되었다.
승승장구하던 장쭤린은 결정적인 눈도장을 찍기 위해 위안스카이를 직접 알현하기로 했다. 장쭤린은 노회한 위안스카이에게 자신이 야망이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베이징의 유명한 술집에서 수하들과 기생을 끼고 잔뜩 놀고 마신 뒤에 위안스카이를 알현했고, 그 자리에서 일부러 연기를 하여 자신은 철저히 무식한 변방의 촌놈 군벌이지만 충성심은 가득하다는 것을 위안스카이에게 전달했다. 그의 연기에 속은 위안스카이는 그를 격려하고 앞으로 자기를 따르면 자리를 보장해 주겠다는 말을 하게 됐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위안스카이가 손만 놓고 있던 것은 아니었고 자신의 옛 친구였던 장시롼(張錫欒, 장석란)을 1914년까지 봉천장군 겸 진안상장군의 자리에 올려 봉천, 길림, 흑룡강 모든 군무를 장시롼이 총괄하도록 해 견제장치를 만들었다. 하지만 장쭤린의 권모술수와 패기가 상상 이상이라, 장쭤린은 오히려 자신의 상관인 장시롼을 동북에서 압도하게 되었다. 당시 장시롼은 나이가 무려 74세나 되어 젊은 장쭤린의 패기를 당해내기 힘들었다.
동북으로 돌아온 장쭤린은 장시롼을 완전히 또 가지고 놀며, 심지어 자신의 상관이었던 자오얼쉰까지 자신의 눈치를 보게 하고 동북의 군사대권을 완전히 손아귀에 집어 넣었다. 그 뒤 위안스카이는 늙은 장시롼 대신 전 흑룡강순무 돤즈구이를 파견하지만 역시 장쭤린은 위안스카이에 대한 충성심을 입증하기 위하여 돤즈구이에게는 껌뻑 죽는 시늉을 하며 떠받들었고, 위안스카이가 이후 노골적으로 황제가 되겠다는 야심을 드러내자 장쭤린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군주제에 대한 찬반 투표를 실시했다. 물론 이건 말만 투표지, 투표장 주변에 군인들이 쫙 깔려 있었다. 결과는 당연히 100% 군주제 찬성. 장쭤린은 그 결과를 위안스카이에게 보고하면서 비굴함의 갑이 뭔지 보여주는 말까지 했다.
"어서 빨리 제제(帝制)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쭤린은 죽고 싶을 뿐입니다!"
사실 장쭤린만 그랬던 건 아니고 전국 각지의 장군들이 다 이런 모습을 보였다. 이에 고무된 위안스카이는 1915년 12월 12일 홍헌제제를 단행하면서 중화제국의 황제가 되었지만, 전 중국인의 저항에 직면하게 됐다. 운남성에서 차이어의 호국군이 들고 일어나면서 호국전쟁이 발발했고 이에 호응하여 제제를 주장하던 장군들마저 각지에서 독립을 선포하였으며 제정 철폐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전 중국을 흔들었다. 다급해진 위안스카이는 장쭤린에게 중국 내륙의 호남성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 출병을 요구하면서 그에게 이후 잘 되면 공후백작의 벼슬을 주겠다고 급전을 날렸다. 그러나 장쭤린은 이미 위안스카이가 끝장났다는 것을 눈치채고 갑자기 태도를 180도 바꾸어 "봉천은 봉천 사람이 다스릴 뿐이다. 황제가 다 뭐냐!"라고 말하며 돤즈구이를 내쫓고 동북지방을 완전히 장악한다. 장쭤린은 혹시 모를 위안스카이의 공격을 막기 위해 자기가 전면적으로 나서지 않고 자신과 함께한 인물인 펑더린을 바지사장으로 내세워 돤즈구이를 내쫓았다. 그렇기 때문에 돤즈구이는 배후에 장쭤린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위안스카이에게 펑더린에 대한 얘기만 했고 위안스카이는 펑더린 견제를 위해 장쭤린을 봉천순안사로 임명하여 봉천 최고 실력자로 만들어주었다.
4. 천하를 노리다
4.1. 군벌의 중심세력이 되다
1917년 장훈복벽이 일어나자 돤치루이는 이를 12일만에 진압했다. 하지만 장쉰이 해산한 국회와 약법의 복구를 거부하면서 쑨원이 서남군벌 탕지야오, 루룽팅과 연합하여 1차 호법운동을 전개했다. 돤치루이와 쉬수정이 이를 강경하게 진압하려고 나서면서 1917년 호법전쟁이 발발했다. 장쭤린은 환계와 연합하여 호법전쟁에 참여, 북양군벌 내부의 입지를 다진 후에 회군했다. 1918년 9월 7일 대총통 쉬스창은 장쭤린을 동북3성 순열사에 임명하였다. 장쭤린은 1919년 길림독군 멍언위안을 축출한 후 자신의 부하인 쑨리에천(孫烈臣)과 사돈 바오구이칭(鮑貴卿, 포귀경)을 각각 흑룡강성 독군과 길림성 독군으로 임명하였다.그의 세력은 하늘에 떠오르는 태양처럼 나날이 뻗어나갔다. 실패라곤 없었다. 장쭤린의 봉천파는 북양정부의 양대 세력인 돤치루이의 안휘파와 차오쿤의 직예파와도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다. 1920년 6월 안휘계와 직예계의 갈등이 심해지자 대총통 쉬스창은 직예독군 차오쿤, 강소독군 리춘, 장쭤린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차오쿤과 리춘은 거절했으나 장쭤린은 중재 요구에 응해 베이징을 찾아왔다. 하지만 안휘계 쉬수정이 자신을 암살하려 시도하자 봉천으로 퇴각하여 안휘계에 대한 군사를 일으켰다. 7월에 터진 안직전쟁에서 장쭤린은 직예파의 편을 들어 승리하자 그의 야심은 더욱 커졌다. 기회를 보아 직예파를 몰아내고 중원에 자신의 깃발을 꼽겠다는 꿈에 부풀었다.
4.2. 1차 직봉전쟁, 그리고 패배
이런 장쭤린을 막아서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직예파의 우페이푸(오패부)였다. 우페이푸는 1874년 산동성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전통적인 유학 교육을 받은 그는 22살에 과거 시험에 합격했으나 관료 대신 군인의 길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북양군벌의 양성소라 할 수 있는 보정육군속성학당에 들어갔다. 그 후 1907년 장춘에 주둔한 차오쿤의 북양군 제3진에 배속되었다. 차오쿤은 유능하고 야심이 넘치며 명석한 엘리트인 우페이푸를 당장 자신의 오른팔로 삼았다. 직예파의 에이스가 되고 직환전쟁에서 돤치루이를 꺾은 그는 장쭤린을 언젠가 반드시 꺾어야 할 적으로 규정하고 있었고, 그것은 장쭤린도 마찬가지였다.양자간의 전쟁의 빌미는 내각구성에서 터졌다. 직환전쟁 이후 내각을 맡은 진윈펑은 당시 재정난을 도무지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는 상황에서 진윈펑은 국내 자본가들을 설득하지도 못했고 해외로부터의 차관 획득에도 실패했다. 이로 인해 정부 부처는 물론이고 군대도 몇 달씩 월급이 체불되어 아우성이었다. 북양정부는 마비 상태나 다름없었다. 직예파는 그가 봉천파에게 특혜를 준다고 생각했고 장쭤린은 장쭤린대로 진윈펑은 직예파의 끄나풀이라고 생각하였다. 결국 진윈펑은 직예파와 봉천파 양쪽 모두에게 신뢰를 잃고, 1921년 12월 18일 해임되었다. 장쭤린은 쉬스창에게 건의를 해 교통계 양사이 내각을 구성하지만, 우페이푸는 그가 위안스카이 내각에 있었을 당시 친일매국적인 활동을 했다고 선전해 대국민적 분노를 일으켜 그를 자진사퇴시키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내각을 구성시키는데 성공한다. 이에 장쭤린은 직계에 밀려났던 환계의 수령 돤치루이, 2차 호법운동을 전개하던 2차 광동정부의 쑨원과 손을 잡고 전쟁을 일으켰다.
제1차 봉직전쟁은 1922년 4월 26일부터 5월 5일까지 벌어졌다. 우페이푸는 청나라 시절부터 군대에 있었고 직환전쟁을 통해 실전경험이 많았지만, 장쭤린을 포함해 대부분의 봉천군은 동북지방에서 마적질이나 소규모 전투밖에 경험하지 못해 이런 대규모 전투경험이 없었고 결국 장쭤린은 탈탈 털리게 됐다. 이 싸움에서 12만 명의 봉군은 3만 명의 사상자를 냈고 2만 5천명이 투항했으며 5만 명 이상이 싸우지 않고 전선을 이탈하였다.[2] 직예파가 운용하는 항공기와 발해함대로 인해 장쭤린보다 직예파의 화력이 더 우월했던 것도 한 몫을 했다. 쑨원 역시 천중밍이 우페이푸와 결탁하여 영풍함 사건을 일으키는 통에 축출되었다.
다행히도(?) 장쭤린의 뒷배경이었던 일본이 우페이푸가 산해관을 넘어 장쭤린을 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통첩을 날렸고, 그 덕분에 장쭤린은 우페이푸와 강화를 맺고 중원의 모든 기반을 잃는 대신 자신의 원래 기반인 동북 3성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후 그는 봉천군을 대대적으로 개혁하고 일본의 원조를 얻어 동북 3성에 대한 근대화와 공업화에 착수하였다.
4.3. 와신상담 끝에 정점에 서다
장쭤린을 꺾은 우페이푸는 명실상부 중원의 패자가 되었고 미국의 타임지에서는 우페이푸를 중국에서 가장 강한 남자로 선정하기도 했다.그러나 승리한 직예군 내부에서는 리더인 차오쿤과 우페이푸 그리고 펑위샹 사이에 반목이 생기기 시작했다. 차오쿤은 우페이푸가 자신을 점점 무시하고 일을 독단적으로 처리하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가졌고 둘의 관계는 상당히 껄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이는 다른 직예파의 군지휘관들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이들은 동료인 우페이푸가 자신의 위에 서 있는것을 아니꼽게 여겼으며 그 중에서 펑위샹이 가장 심했다. 펑위샹 역시 뛰어난 역량을 가지고 있었으며 봉직전쟁에서 탁월한 공을 세웠지만 우페이푸는 그러한 그를 견제하려 했고, 결국 펑위샹은 하남 독군의 자리에서 쫓겨나 북경의 육군 검열사라는 명예직으로 옮기게 됐다.
결국 1924년 9월 봉계군벌과 환계군벌 그리고 광동정부의 쑨원이 반 직계군벌 삼각동맹을 결성하였고, 그간 와신상담을 하고 있던 장쭤린은 직예군벌이 안휘군벌인 절강독군 루융샹을 토벌하기 위해 강절전쟁을 일으키자 루융샹을 돕는다는 구실로 관내진출, 9월에 제 2차 직봉전쟁을 일으켰다. 우페이푸는 펑위샹에게 장쭤린을 막으라고 했지만, 펑위샹은 오히려 산해관 근처에서 말머리를 돌려 우페이푸를 공격하는 북경정변(北京政變)을 일으켰다.[3] 그 결과 제 2차 직봉전쟁은 장쭤린의 승리로 끝난다. 북경을 장악한 펑위샹을 내쫓은 장쭤린은 여세를 몰아 남쪽으로 진격하고 제노전쟁을 통해 루융샹, 장쭝창이 선봉으로 10만의 병력으로 산동성을 장악하고 이어 상하이와 난징, 안후이성까지 장악하게 됐다. 이 때가 바로 장쭤린의 리즈 시절이었다.[4]
그리고 일본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만들고 재정도 충당할 겸 1925년 일본과 미쓰야 협정을 체결하였고, 한국독립군을 잡아서 현상금을 받는 형식으로 장쭤린은 일본의 한국 독립운동 탄압에 앞장섰다.
4.4. 장제스의 북벌, 허망한 최후를 맞이하다
그러나 1925년 강소독판 양위팅과 안휘독판 장덩쉬안의 학정 끝에 절강독판 쑨촨팡이 손봉전쟁을 일으켜 봉천군벌은 강남에서 축출당했고, 또한 장쭤린의 참모장이었던 궈쑹링은 그가 일본과 매국적인 밀약을 했다고 양위팅의 해임을 요구하며 장쭤린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거기다 쫓겨난 펑위샹은 다시 군대를 몰아 장쭤린을 치려고 했고, 이에 장쭤린은 우페이푸와 손을 잡고 펑위샹을 내쫓는다. 우페이푸가 더이상 장쭤린에게 덤빌 힘이 없는 이상 장쭤린은 명실상부 중원의 패자가 될 수 있었다.1926년 7월 국민당의 장제스는 국민당의 1차 북벌을 선언했고 우페이푸, 쑨촨팡을 몰락시키고 장쭤린과 대결했다. 국민당은 내부 갈등 때문에 분열되어 잠시 내분에 휩싸였지만 영한합작으로 복귀하고 이전에 갈라진 서산회의파까지 다시 합당하여 장쭤린에 맞섰다. 장쭤린은 1927년 6월, 쑨촨팡, 장쭝창의 추대를 받아 대원수에 취임하여 판푸를 국무총리에 임명하여 맞서려 했으나 1928년에 선포된 국민당의 2차 북벌에선 펑위샹, 옌시산 등까지도 모두 북벌군에 합류했고 장쭤린은 장쭝창, 쑨촨팡 등과 손을 잡고 장제스군에 맞섰지만 결국 패배했다.
장쭤린은 베이징을 버리고 다시 동북으로 돌아가 권토중래를 노리지만 동북을 향해 침공하려는 일본 관동군은 장쭤린이 탄 기차를 폭파시켜 그를 죽이고 말았다. 일본 요시자와 공사가 장쭤린에게 매국적 협약을 승인한다면 북벌군을 격퇴해 주겠다고 제의했지만, 장쭤린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는 더 이상 일본의 요구를 듣는 것은 설령 국민혁명군을 격퇴해도 결국 일본의 허수아비가 되는 것에 불과했고 장쭤린은 이미 장제스에게 굴복하는 대가로 동북 3성 통치만은 인정받기로 밀약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폭발 사건을 현장의 지명을 따서 \'황고둔 사건(皇姑屯 事件)'으로 부른다. 장쭤린은 폭발 직후는 즉사하지 않아서 이송했으나 이미 치명상을 입어서 생존 가능성이 없었다. 장쭤린은 당분간 이 사건을 비밀에 부치게 하고 권력을 장남 장쉐량(장학량)에게 승계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했다.
그의 사후 그의 뒤를 이은 장쉐량은 동북지방의 문턱까지 쳐들어온 공산당과 국민당의 북벌군을 이길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일본과 손잡아 북벌군을 상대했다간 중국에서 끓어오르는 민족감정 때문에 자신의 정권이 무너질 것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국민당과 일본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양쪽을 설득하여 동북역치를 통해 국민당에 복종하였다. 이후 중원대전이 발발하자 장제스 편으로 가담하여 중국 대륙의 패권은 쑨원의 유지를 계승한 장제스가 쥐게 됐다.
[1] 오늘날 랴오닝성 선양시, 방송인 장위안의 고향인 랴오닝성 안산시 근처에 있다.[2] 다만 장쉐량의 제3혼성여단과 궈쑹링의 제8혼성여단은 일본 군사고문단에 의해 훈련받은 봉군 최정예 부대였으며 궈쑹링(郭松齡)은 북경 육군대학 출신으로 봉군 지휘관 중에서 실전 경험이 가장 풍부하였다. 제1차 봉직전투가 끝난 뒤에도 이들 부대는 거의 온전하게 돌아왔다.[3] 이때 핍궁사건이 일어나 선통제를 비롯한 청나라 황실이 자금성에서 쫓겨났다.[4] 참고로 우리가 한국사 시간에 한번 배웠을 미쓰야 협정은 이 다음해인 1925년에 맺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