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21:16:07

장채극


성명 장채극(張彩極)
이명 왕자명(王子明)·산해대관(山海大觀)·성룡(成龍)
본관 울진 장씨
생몰 1897년 8월 26일 ~ ?
출생지 함경북도 부령군 청암면 반죽동[1]
사망지 미상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장채극은 1897년 8월 26일 함경북도 부령군 청암면 반죽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서울로 상경해 보성고등보통학교에서 재학했다. 그러던 1919년 2월 28일 밤, 그는 독립선언서 약 200매를 가지고 송현동에 소재한 자신의 숙소에서 이철(李喆) 등 3명과 함께 협의한 후 선언서 8∼10매를 보관하고 또 동교생 이태영(李泰榮)·김장열(金長烈) 외 6명 등에게 배포하게 했다. 이튿날인 3월 1일, 그는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등교하여 이철 등과 함께 오후 2시를 기하여 탑동공원 앞 종로 남쪽 지역 부근에 배포하고 시위대에 참가해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했다.

1919년 3월 4일, 장채극은 경성 배재고보 기숙사에서 학생대표인 한위건(韓偉健)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고 <독립신문>을 발간하려 했다. 이때 용지 조달이 곤란하자, 그는 차영호에게 부탁해 동양용달회사에 의뢰해 백지 2만 매를 준비하게 했다. 이렇게 해서 인쇄된 독립신문은 각 학교 배포 담당자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홍진 등의 특별 지시에 따라 한성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대회 개최 준비에 착수한 그는 4월 22일 밤 김사국 등과 함께 <선포문>과 <국민대회취지서> 약 6,000매 및 국민대회의 개최를 알리는 간판을 제작한 뒤 이철(李喆) 등에게 전달했다. 또한 4월 23일에는 집합 장소인 남대문 앞에서 시위 군중들에게 선포문과 취지서 등을 배포하고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전개했다.

이 일로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19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공소하여 1920년 3월 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으로 감형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공산주의에 감화된 그는 1922년 10월 경성에서 김사국, 이영(李英) 등과 함께 비밀리에 공산주의그룹을 결성했으며 같은 해 12월 말에는 이 그룹의 합법 청년단체인 서울청년회에 가입했다. 이후 경성파 공산주의그룹의 핵심 인물로 떠오른 그는 1923년 2월 경성파 고려공산동맹 결성에 참여하고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1923년 8월 출판법 위반으로 종로경찰서에 검거되어 며칠간 고초를 치렀고, 1924년 4월 1일 조선청년총동맹(朝鮮靑年總同盟) 창립위원회에서 전북지방 시찰원에 발탁되었으며, 4월 21일 노농총동맹(勞農總同盟) 집행위원 및 전형위원으로, 9월에 함경북도에서 고려공산청년동맹 조직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했다. 동년 11월 전조선 노동교육자대회 준비위원이 되었으며 12월 8일 사회주의자동맹(社會主義者同盟) 창립식에서 집행위원이 되었다. 또한 1925년 3월 26일 서울파 공산주의그룹이 주도한 재경조선해방운동자단체연합간친회에 조선노동대회 대표자격으로 참가해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반대단체 전국연합위원회 소집준비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5년 가을 함경북도의 청진으로 옮겨 청진노동회 상무, 신간회 청진지회 집행위원, <동아일보> 청진지국장이 되었다. 1930년대 중반 검거되어 청진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지만 경성복심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석방되었으며,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장채극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울진 장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장금송·장채남도 이 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