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송진표(宋鎭杓) |
출생 | 1909년 9월 19일 |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陰城邑) 신천리(新泉里) 790 | |
사망 | 1969년 5월 19일 |
학력 | 개성상업학교(開城商業學校) 중퇴 |
독립운동 | 대한민국 임시정부 상하이 교민단의 서기[1] 의경대(義警隊) 간사 한인청년당 이사 겸 서무부장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618호[2] |
상훈 | 대통령표창(1983) 건국훈장 애족장(19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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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충청북도 음성(陰成) 출신으로 여성한국광복군 신정숙의 첫번째 남편이다.2. 생애
1926년 9월에 개성상업학교(開城商業學校)에 재학하던 중 일본인 교장이 학교 운영과 교육을 일본인 위주로 하는 것에 저항하다가 퇴학 처분을 당한 뒤, 1927년에 친형(親兄)인 장현팔(張鉉八)이 거주하는 전라북도 정읍(井邑)에 가서 토리교회(土里敎會)의 주일학교(主日學校) 교사를 하면서 항일정신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등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3. 독립운동
1929년 9월에는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따롄(大連)을 거쳐서 1931년 11월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상하이 교민단의 서기, 의경대(義警隊) 간사, 한인청년당 이사 겸 서무부장 등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1932년 4월에는 한인청년당 기관지 성종(醒鍾)에 "친왜파(親倭派)는 속시(速時)에 반성(反省)하라."는 제목의 논문을 게재하여 일제 앞잡이들에게 경종을 울리기도 하였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 뒤에 일경의 발악적인 검거 선풍으로 상하이(上海) 프랑스조계(佛租界)에서 안창호(安昌浩) 김덕근(金德根) 등과 함께 체포되어[3] 6월 7일에 국내로 호송되었다. 그리하여 일본 경찰의 고문을 받는 등 옥고를 겪다가 1932년 7월에 기소유예 처분으로 석방되었다.
1937년 이후에는 상하이, 만주 등지를 전전하며 민족사상 고취를 위하여 노력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4. 참고문헌
장현근의 공적정보동아일보(1932. 6. 8, 6. 9, 7. 26, 7. 27)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769면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713 729 73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