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 한자: 前無後無
- 중국어: 空前绝后(kōngqiánjuéhòu) / 前所未有(qiánsuǒwèiyǒu)
- 일본어: [ruby(空前絶後, ruby=くうぜんぜつご)]
이제까지 없었고 그 뒤에도 없을 것이다라는 뜻이다. 즉, 독보적인 유일함을 뜻한다.
중국어, 일본어를 보면 알겠지만 한국 밖에서는 \'공전절후'라는 성어가 같은 의미이며 한국도 이 한자성어도 대체어로 사용한다.
2. 어원
<전무후무 제갈무후(前無後無 諸葛武侯)>에서 유래된 고사성어인데, 중국에서는 잘 쓰지 않는다. 오히려 중국에서는 전무고인, 후무래자(前無古人,後無來者)라는 풀버전을 더 많이 쓴다. 청나라 때 소설가 이여진의 '경화록'이라는 소설에 나온다고 한다.전설에 따르면 중국 명나라 시절에 주원장의 개국을 도운 공신 유기(劉基)[1]는 평소 "옛적 제갈량은 삼국 중에 가장 작은 촉땅 만을 움켜쥔 채로 천하를 평정하지 못하였으나 오늘날의 나는 천자를 도와 천하를 평정하였으니 내가 제갈량보다 낫다."라는 말을 하며 자주 제갈량을 폄하하였다. 이후 유기가 벼슬을 내려놓고 중국을 유람하던 도중 옛 촉한 지역인 성도 주변으로 가게 되었는데 날이 어두워 어느 절에 묵게 되었다. 이윽고 새벽이 되었는데 스님들을 제외하고 그 어떤 생물도 살 수 없는 절간에 웬 수탉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는 민가와는 거리가 먼 고적한 산중의 절이었다.
그리하여 이에 궁금증을 품은 유기가 주지스님에게 "웬 절간에 닭울음 소리입니까?"라고 묻자 주지스님이 대답하기를 "옛적 제갈무후께서 우리 절에 하루 묵으시면서 이를 기념하여 흙으로 닭을 한 마리 빚어주셨는데 새벽녘이 되면 신기하게 울음소리를 내어 아침을 알려줍니다."[2]라 대답하였다. 이에 평소 제갈량을 무시하던 유기가 "그러면 나도 한 마리 빚어주겠소."라고 말하고 흙으로 닭을 빚자 유기가 빚은 닭은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대 주변을 시끄럽게 했다.
이에 화가 난 유기가 제갈량이 빚은 닭을 던져서 깨자 닭 안에서 "모년 모월 모일에 유기가 나의 닭을 깰 것이다."(某年某月某日 劉基破土鷄)라고 적힌 종이가 나왔다. 이에 유기는 짐짓 놀랐으나 애써 태연한 척 절을 나와 성도로 향했다. 이로써 유기는 제갈량에 대한 평가를 조금 달리했으나 역시 제갈량을 자신의 아래라 생각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이후 성도에 도착한 유기가 제갈량을 모신 사당인 무후사(武侯祠)를 지나게 되었는데 무후사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말을 타고 있는 자는 말에서 내려 고삐를 잡고 가고 걸어 지나가는 자들도 두 손을 공손히 하여 지나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유심히 보자 하마비(下馬碑)가 서 있었다. 그러나 유기는 자신이 제갈량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말에서 내리지 않고 그냥 지나갔는데 하마비 앞에 다다르자 말의 발이 움직이지 않는 것 아닌가?
그래서 유기는 말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고 어떻게 해도 말이 발을 움직이지 못하자 땅을 파보니 다음과 같은 글귀의 쪽지가 나왔다. "때를 만나면 하늘도 도와주어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만 운을 만나지 못하면 아무리 영웅의 계책이라도 들어맞지 않는 법이라오."
그리하여 유기는 자신의 생각을 뉘우치고 제갈량에게 사죄하고자 제갈량의 사당으로 찾아갔으나 풍수지리적으로 아무리 보나 그다지 터가 좋지 않은 곳이었다. 이에 유기가 "제갈 선생님께서는 다른 것은 모두 잘하셨으나 풍수는 잘 보지 못하셨구나."라고 생각하고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하였다. 절을 하고 일어나려는데 이번엔 유기 자신의 무릎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 아닌가? 이에 놀란 유기가 좌우를 시켜 자신 무릎 아래의 땅을 파게 시키자 이번에도 어김없이 다음과 같은 글귀의 쪽지가 나왔다. "충신(忠臣)은 죽어서도 주군(主君)의 곁을 떠나지 않는 법이라오."[3]
이에 유기는 긴 탄식과 함께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제갈무후 같은 분은 그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前無後無 諸葛武侯, 전무후무, 제갈무후)
위의 내용은 비록 전설이나 중국인들과 중국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은 다른 동아시아 사람들이 어떻게 제갈량을 인식했는지 보여준다. 이 전무후무 제갈무후에서 떼어낸 '전무후무' 란 말은 현대에도 여전히 쓰이고 있다.
[1] 이 사람 역시 서달, 이선장과 함께 명나라의 개국 3대 공신으로 꼽히는 명 태조 홍무제 주원장의 책사였는데, 주원장이 "그대는 나의 장자방"이라고 평하였으며 당대 사람들도 제갈공명과 비견되는 인물이라는 평을 하였던 매우 뛰어난 명재상이었다.[2] 여담으로 촉한 당시에도 불교가 들어간 흔적이 있다. 사천성 낙산시 마호애묘(麻浩崖墓)에 바로 촉한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추정되는 부처와 승려의 도상이 있는 것. 촉한에서도 불교와 민간신앙이 결합되는 형태로 수용되었던 증거라 본다. 단 지배층에까지 미친 흔적은 전혀 없다.[3] 실제로 제갈량의 사당은 유비의 무덤인 한소열묘(漢昭烈廟) 바로 옆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