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오나라의 인물에 대한 내용은 제갈현(손오) 문서 참고하십시오.
諸葛玄
생몰년도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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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 원술의 부하이자 제갈규의 동생으로 제갈근, 제갈량, 제갈균 형제의 숙부. 서주 낭야국 양도현 사람.2. 생애
정사의 기록이 《헌제춘추》와 <제갈량전>의 기록에서 행적이 대치되며, <제갈량전>에서는 주술이 사망해 예장태수의 자리가 비우게 되면서 원술로부터 예장태수에 임명되자 제갈량, 제갈균 등을 데리고 가서 부임했다. 조정으로부터 주호가 예장태수에 임명되면서 그 자리를 두고 싸우다가 쫓겨나서 유표와 교분이 있었으므로 형주로 가서 그에게 의탁했다.《헌제춘추》에서는 유표가 예장태수로 임명하면서 주호와 예장태수의 자리를 두고 다투지만 주호가 착융, 유요 등에게 원군을 요청했으며, 결국 제갈현은 유요의 공격을 받아 물러나 서성에 주둔했다. 197년 정월에 서성의 백성에게 살해되었다고 하는데, 배송지는 《헌제춘추》에서 말하는 바가 <제갈량전>과는 다르다고 지적했다. 최진열 교수는 진수가 《헌제춘추》의 기록을 무시한 것을 수상하게 생각했다.
《통감고이(通鑒考異)》에서 이르길 원위(袁暐)의 《헌제춘추》에선 유표가 제갈현을 올려 예장태수를 겸하게 했다 하고, 《후한서》 <도겸전>에서 또한 유표가 기용했다고 이르나, <제갈량전>에선 원술이 기용했다고 이른다. 살피건대 허소(許劭)가 유요에게 유표에게 의지하라 권했으니, 필시 그가 기용한 이를 공격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제갈량전>을 따른다고 했다.
《자치통감》에선 '헌제 흥평(興平) 2년(195년), 착융이 주호를 죽이고, 군의 일을 대신해 다스렸다. 유요가 착융을 토벌하니, 착융이 백성에게 살해당했다. 조서로 전의 태부연(太傅掾) 화흠(華歆)을 예장태수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모두 흥평 2년의 일이다. 삼국지집해 저자 노필은 이에 '건안 2년에 제갈현을 살해해, 머리를 보내 유요에게 이르게 했다고 이름은, 사실과 어긋나는 것이기에, 의당 진수가 취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3. 기타 창작물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에서도 제갈량의 과거사를 보여주면서 몇 컷 등장한다. 여기서는 주호와의 전쟁에서 그냥 패배해 죽는 것처럼 연출된다.
진순신의 소설 제갈공명에서는 헌제춘추의 기록을 따라 유표의 부하로 나온다.
낙양으로 유학해 낙양에서 좌중랑장부의 시랑에 있다가 중앙의 정쟁에 질려서 고향으로 돌아와 지방에 부임한 제갈규를 대신해 집안을 맡았다. 이후 형주로 가서 유표 밑에서 벼슬을 하다가 동탁이 죽은 후에 이각 등이 정권을 잡자, 유표를 위해 장안으로 가서 정세를 살펴보기도 했다.
이후 유표로부터 고향에 가문을 살피기 위해 휴가를 청해서 고향으로 다녀왔으며, 직후에는 예장태수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주호도 예장태수에 임명되었기에 그 자리를 두고 다투지만 싸움에 져서 쫓겨난다. 착융과의 싸움에서 부상을 입어 서성에 물러났다가 허소, 유요 등이 사망한 후에 형주로 돌아가려는데, 부임 당시 너무 순진하게 얼굴을 대명천지에 드러내서 손책의 하수인들을 피해다니느라 병이 악화되어 죽었다.
제갈량의 보호자이면서도, 소설 내 제갈량의 인생 중 최대의 위기를 낳게 한 사람. 제갈량은 스스로 성에 남겠다고 자처하다가 착융에게 사로잡히는데, 착융 앞에서 불교의 가르침을 말하며 불승인 양 행동하자 착융이 "내가 너를 공으로 만들어주겠다"고 그를 직접 죽이려 든다. 그 때 이건 아니다 싶었던 불교도들이 착융을 먼저 죽이지 않았다면 제갈량은 그대로 살해당했을 것이다.
사실 진순신은 이전에 쓴 비본삼국지에서는 제갈현이 예장에서 죽었다고 썼으나 여기선 고친 것인데, 해당 장의 뒤에 이에 대해서 사료비교를 덧붙인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