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0 20:04:48

제시 리버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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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투자관4. 어록


제시 로리스턴 리버모어
Jesse Lauriston Livermore
1877년 7월 26일 ~ 1940년 11월 28일 (향년 63세)
미국 매사추세츠 주 스루스버리 출신

1. 개요

주식투자의 전설. 가격이 오르면 사고, 내리면 공매도를 하는, 이른바 추세 매매의 창시자. 즉 위상으로만 따지자면 워렌 버핏, 조지 소로스, 짐 로저스의 대선배격이라고 보면 된다.

2. 생애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리버모어는 여기에 계속 있다간 앞날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10대 초반에 5달러[1]를 들고 보스턴으로 갔다. 보스턴의 증권브로커회사인 페인웨버에서 주식호가판을 정리하는 사환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15세 때 주식, 상품투자로 2천만 원을 벌었다. 사환으로 일하는 것보다 전업투자자로 활동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그는 결국 20세에 2억 원을 벌었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으로 주가가 급락하자 지속적인 공매도로 엄청난 돈을 벌었다. 1907년에 뜬금없는 대폭락이 나타나고 공매도로 또다시 엄청난 돈을 벌게 되었다. 리버모어는 그 때 아침시가에 공매도를 시작해서 투매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1929년 여름에 시장은 초강세분위기였다. 리버모어는 시장이 보합상태에 들어갔다는 것을 파악하고 본격적으로 공매도에 돌입했다. 다른 사람들은 리버모어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해 가을에 대폭락이 이루어지고 그는 많은 돈(약 1억달러)을 벌었다. 언론에서는 리버모어의 매도포지션이 폭락을 촉진했다고 비난했다.

1933년 3번째 재혼으로 38세의 여인 Harriet Metz와 결혼한다.

1934년 연방 법원에 파산신청을 하였다. 4번째 실패이자, 2번째 공식적인 파산이었다. 파산 신청에서 확인된 재산은 $84,000 자본과 $2.5백만의 빚이였다.

1937년 80만 달러 세금을 갚았다.

1939년 재정자문 사업을 시작함.

1940년 11월 28일 리버모어는 아래와 같은 짧은 메모를 남기고 뉴욕의 한 호텔에서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니나에게. 난 지쳤소. 더 이상 버틸 수 없소. 이것만이 나의 탈출구가 될 듯하오. 당신의 사랑은 내 분수에 넘친다오. 난 실패자요. 정말 미안하오만, 이것만이 내게 남겨진 유일한 길이라오. 러브 로리

3. 투자관

그는 시장이 상승장일 때만 주식을 매수해야 하며, 하락장일때는 공매도를 하거나 하락장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주가가 박스권을 유지한다면 인내하라고 말했다.

의외로 현대의 짧은 단타성 매매와는 결이 다른 듯한 부분도 종종 보이는데, 가격을 추적하여 매매하는 트레이더라고 해서 그를 단타꾼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제시 리버모어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이들의 오해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추세추종 트레이더로 일단 추세가 잡히면 그것이 명확히 끝났다고 판단될때까지 포지션을 물고 놓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말해서, 크고 긴 추세가 발생한다면 제시리버모어는 얼마든지 크고 길게 포지션을 유지해 나아갔다는 것이다. 이는 때로 충분히 기간이 긴 매매가 이뤄질 수도 있지만, 추세를 무시하고 소외주를 발굴하여 장투하는 가치투자자들의 긴 매매와는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또한 당시 매매시스템 자체가 현재의 인터넷을 이용한 홈트레이딩시스템과 시대적, 기술적으로 매우 다른 환경에 있었음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물론 단타성 매매의 모습 역시 보인다. 일례로 제시 리버모어는 짧은 시간(하루 안으로 여겨지는) 만에 7 ~ 8 포인트를 먹었다고 했는데, 그가 10배 레버리지를 사용했음을 감안할 때 실제로는 0.7% ~ 0.8%를 먹었다는 뜻이다.

기업의 내부정보라며 떠도는 얘기들은 믿지 말라고 했다.

현대 주식시장의 많은 개인투자자들이 그의 방식을 동경하고 따르길 원하지만, 깊은 이해없이 피상적인 접근만으로 흉내내는 것은 금물이며, 개개인 성향에 맞는 신중한 판단이 필요할 것이다.

사실 공매도는 위험이 큰 투자법이며 한국에서 개인에게 완전금지는 아니지만 규제가 상당히 강하다. # 반면에 개인투자가의 신용,미수 등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는 기관 등의 큰 손들은 오히려 어른의 사정으로 허가된 공매도를 악용해 개미털기에 여념이 없다.

리버모어가 주의를 기울여 준비했던 부분, 그리고 미래의 투자가들이 반드시 본받아야 할 다른 부분은 실패를 대비한 자금관리이다. 제시 리버모어는 자신의 재산이 빠르게 늘어날 때, 모든 수익을 재투자 하지 않고 일부 수익을 계속해서 인출하며 수익을 실현했다. 또한, 자산 신탁 회사에 미리 자산의 일부를 맡김으로써 혹시 모를 파산리스크에 대비했다. 그 결과, 제시 리버모어는 파산 후에도 가족이 부유하게 살 재산을 지켜낼 수 있었다. 사실 이 순간에도 수많은 주식고수들이 한 번의 큰 투자실패로 모든 자금을 잃고 자살 또는 인생파탄으로 마감하는 것은 씁쓸한 현실. 반면 주식의 위험성을 잘 아는 투자가들은 주식으로 큰 돈을 벌고 이익금이 쌓일수록 은행 적금, 국채, 실물자산 등의 비중을 함께 높이고 주식 비중은 어느 선에서 제한하여 미래를 도모한다.

리버모어의 자살은 아내의 알코올 중독 등 가정사가 망가짐에 따른 우울감에 의한 것이지, 파산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했다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리버모어의 유언장을 보더라도, 파탄난 아내와의 관계를 비관하는 내용 뿐이지 돈과 관련된 내용은 없다.

마지막 파산 이후에도 밀, 목화, 옥수수 투기 등으로 많은 돈을 벌었으며, 그의 파산은 트럼프의 파산과 같이 전략적 파산이었다. 전략적 파산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부 사람들은 리버모어가 파산 때문에 죽은 것으로 몰아가려 하며 지속적인 반달 시도를 이어가고 있지만, 이는 거짓이다. 애초에 파산은 그의 남은 재산을 지키고 부채를 없앤 회생 수단이었는데, 그가 이를 부정적으로 생각할 여지는 없다.

4. 어록

I have said many times and cannot say it too often that the experience of years as a stock operator has convinced me that no man can consistently and continuously beat the stock market though he may make money in individual stocks on certain occasions. No matter how experienced a trader is the possibility of his making losing plays is always present because speculation cannot be made 100 per cent safe.
(내가 여러 번 말했으며 아무리 자주 말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으로, 주식 투자자로서의 다년간의 경험으로 내가 확신하게 된 것은, 개별 주식에서 특정한 기회에 돈을 벌 수는 있을지언정, 누구도 일관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주식 시장을 이길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숙련된 트레이더이더라도 지는 게임을 할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하는데, 투기란 100퍼센트 안전하게 이루어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느 주식투자자의 회상》 마지막 문단의 앞부분. 뒷부분은, 주식투자에는 왕도가 없으므로 내부자 정보로 득을 보려고 하면 망한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이긴다는 말은 시장 수익률을 상회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늘 맞는 예측을 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2] 따라서 레버리지나 빚을 낸 거래를 하면 한방에 다 잃을 수도 있음을 경계하는 내용이다.


[1] 참고로 이 당시의 5달러는 지금의 가치로 따지면 120달러(약 13만원) 정도.[2] 시장수익률을 상회한 투자자는 많다. 적립식 투자를 강조하는 버핏이나 존 보글도 늘 시장수익률보다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