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30 19:34:14

제210야전포병여단

210 야전포병여단에서 넘어옴
<colbgcolor=#990000><colcolor=gold> 제210야전포병여단
210th Field Artillery Brigade
파일:제210야전포병여단 마크.png
창설일 1944년 1월 24일
소속 미합중국 육군
상급부대 제2보병사단
모토 Warrior Thunder, Two Ten
규모 여단
여단장 브렌단 툴란 대령
위치 경기도 동두천시 캠프 케이시

1. 개요2. 역사3. 편제4. 여담

[clearfix]

1. 개요

미합중국 육군 소속 포병여단이다.

M270 MLRSATACMS전술 지대지 미사일을 운용하고있으며, 제2보병사단과 전시에 한반도로 증원되는 제8군화력지원 임무를 수행한다. 동시에 북한군장사정포같은 장거리 야포를 견제하는 임무를 수행하고있다. 전쟁 억제력은 물론이고 제2한국전쟁 발발시 한미연합군의 주요 지상화력 전력으로써 활약할 부대로 평가받고 있다.

2. 역사

1944년 1월 24일에 텍사스주 캠프 맥시(Camp Maxey)에서 창설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유럽 서부, 중부 전역에 참가하였다. 종전 후 1946년 1월 26일 뉴저지주 캠프 킬리머에서 해산하였다가 1958년 9월 17일에 제210포병단으로 재창설되고 서독주둔군 소속 제18포병단을 대체하여 10월 15일 제7군단 포병대에 배속되어, 서독 안스바흐에서 주둔한다. 1971년 7월 7일 헤르초게나우라흐로 옮겨갔다. 1972년 3월 15일 제210야전포병단, 1980년 9월 16일에는 여단으로 개편되었다.

1990년 12월, 사막의 방패 작전의 일환으로 독일에서 사우디아라비아로 파견되었다.[1] 사막의 폭풍 작전에도 참가하며 전쟁기간동안 제2기갑기병연대, 전후엔 제1보병사단에 배속되어 화력지원임무를 수행했다.

이후 1991년 5월 독일로 재배치되었다가 냉전이 끝난 뒤에는 본국의 포트 루이스로 돌아가 제18공수군단과 협업하여 태평양 전역으로 신속하게 전개할 수 있는 포병으로서 임무를 수행하다 1996년 4월 15일에 또 다시 해산하였다.

하지만 이후 다시 한번 부대가 소집돼야하는 이유가 생기는데, 바로 북한군의 장사정포 때문이었다. 북한은 1980년대부터 경제난이 시작되어서 대규모 기동훈련이 대폭 축소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80년대 말부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휴전선 지역에서 서울을 타격하기 위해 갱도진지화를 해나간다. 결국 1990년대에 대규모 야전기동훈련이 아예 불가능해지자 지상전력에서의 투자가 여기에 집중되기 시작한다. 170mm 자주포와 240mm와 300mm급 방사포가 배치되기 시작하며 한미연합군은 휴전선에 배치된 북한군의 포병전력이 수도 서울과 수도권을 타격할 수 있을만큼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며 이에 맞춰 대화력전 대비를 시작하는데, 그러던중 그 유명한 서울불바다 발언이 터졌다. 당시 이 발언으로 인해 북한군 포병화력의 위험성이 가시화되며 민간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따라서 미국은 대화력전을 담당하기 위한 주한미군의 포병여단으로써 2006년 11월 30일에 제38야전포병연대 1대대[2]와 제37야전포병연대 6대대[3]를 배속받고 한반도에서 제210화력여단으로서 재소집시켰다. 참고로 이듬해 제702여단지원대대는 제70여단지원대대로 서수가 바뀌었다.

2014년 중순에 다른 화력여단과 마찬가지로 야전포병여단으로 명칭이 되돌려졌다. 9월 18일, 미국 국방부가 제210화력여단과 한미연합군사령부의 기존 위치 잔류를 요청하였다. 대한민국 국방부는 다각적인 연합 전력 조율과 전시 작전통제권의 환수 문제로 조율하고 있기에 잔류 요청을 거부하지 못했다. 동두천시는 경기도 지역에 주둔중인 다른 주한미군 부대와 마찬가지로 캠프 험프리스로 옮겨가기를 바라고, 미국 국방부는 여단이 잔류하기 바라자, 대한민국 국방부는 여단을 포천시의 로드리게스 훈련장으로 이주시키는 방안을 검토하였다.

10월 23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린 제 46차 한미안보협의회에서 대한민국 육군의 포병 전력으로는 아직 조선인민군의 포병 화력에 대응할 수 없고, 2020년까지 제210화력여단의 임무를 대신할 MLRS 부대를 창설할 때까지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여단은 캠프 험프리스나 로드리게스 훈련장으로 이주하지 않고 계속 캠프 케이시에 잔존하는 방침이 이어지게 되었다.

2015년 3월, 연평도 포격전, 연천 대북전단 발원지 격파사격등, 당시 혼란스러웠던 한반도의 정세를 대비해 MLRS 1개 대대가 추가 배치되어 3개 대대로 늘었으며 북한군의 장사정포를 탐지하기 위한 대포병 레이더를 추가 배치했다.

한국군에도 화력여단이 창설되며 동두천을 떠날 것 같았지만, 현재까지도 대북 억제력을 이유로 평택이나 다른 기지로의 이전이 진행되지 않고 있다.#

3. 편제

상시 배치한 2개 MLRS 대대가 한국에 상주중이다.
  • 제210야전포병여단
    • 제210야전포병여단 본부 및 본부포대
    • 제37야전포병연대 제6대대(M270 MLRS)
    • 제38야전포병연대 제1대대(M270 MLRS)
    • 제70여단지원대대
    • 제579지원중대
    • 제580지원중대
    • 제579통신중대
  • 순환배치여단
    • 유엔군 사령부 공동경비구역 분견대

4. 여담

서부전선 포격 사건 진행 4일차이던 23일 자정 당시, 주한미군 소속 210 화력여단MLRS와 탄약보급차량들이 전진배치되던 중 경기도 파주시 통일대교를 건너고 있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북한의 포격에 대비한 미국의 무력시위로 해석된다. 참고로 MLRS는 문서를 봐도 알겠지만 집속탄이 탑재된 MLRS 석 대만 있어도 축구장 수십 개 넓이, 적의 사단견인포대나 자주포대를 분쇄할 수 있는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 '강철의 비'라는 별명이 아깝지 않은 무기이다.



[1] 당시 중부사령부는 쿠웨이트에 주둔중인 이라크군의 병력이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로 증강되는것을 보며 서유럽 방어의 핵심인 7군단 배속을 요구했고, 합참에서도 이라크군의 전력이 매우 강력하다 판단해 중부사령부에 7군단을 배속시키며 화력지원 임무수행을 위해 파병되었다.[2] 약칭 1-38.[3] 약칭 6-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