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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언어 | 만데어파 | |
인물 | 순자타 케이타 | 만사 무사 | |
문화 | | 젠네 모스크 | |
지리 | | 팀북투 | 사하라 종단 무역 |
젠네 모스크의 동쪽 벽.[1] |
유네스코 세계유산 | ||
이름 | 한국어 | 젠네의 옛 시가지†[2] |
영어 | Old Towns of Djenné | |
아랍어 | مدن جنّة القديمة | |
프랑스어 | Villes anciennes de Djenné | |
국가·위치 | 말리 몹티 주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등재연도 | 1988년 | |
등재기준 | (iii)[3], (iv)[4] | |
지정번호 | 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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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젠네의 대모스크(الجامع الكبير في جينيه, Great Mosque of Djenné)는 말리 젠네 소재의 모스크이다. 현 말리 공화국의 국장에도 들어가 있을 정도로 문화적, 역사적인 가치가 높으며, 말리를 넘어 아프리카의 대표적인 랜드마크 중 하나이다. 1988년 '젠네의 옛 시가지'라는 이름으로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말리의 대표적인 문화재로 손꼽히지만, 사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젠네 모스크는 서아프리카의 전통적인 건축물은 아니다. 현존 모스크 건물은 1900년대에 프랑스 식민당국이 지었는데, 이때 프랑스식 건축 기법을 상당히 섞어넣었다.1930년대까지만 해도 말리인들은 이 건축물이 지나치게 높고 꺼림칙하다고 여겨서 들어가기조차 싫어했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 아름다움을 인정받아 현재는 명실상부 말리를 대표하는 건축물로 자리잡았다.
단순히 역사적인 건물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종교 시설로서 기능하고 있는 장소로, 꾸준히 이슬람 예배가 열리고 있다. 다만 현재는 무슬림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다. 원래 1980년대까지만 해도 누구나 젠네 모스크 출입이 가능했지만, 1987년 보그지가 모스크를 배경으로 화보를 찍는 과정에서 처음에 약속했던 것과 다르게 모델이 모스크 지붕 위에 올라가서 사진을 찍었는데,# 이를 보고 격분한 시민들이 항의하면서 결국 비무슬림들의 출입은 금지되었다.#
젠네 모스크는 후술하듯 보존과 관리에 시민들 전체의 노력이 투입되는 문화 유산이다.
2. 역사
젠네의 모스크가 언제 처음으로 지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지만 보통 말리 제국 시기인 1200년대에서 1300년대 초 사이쯤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젠네 모스크에 대한 첫 언급은 아랍의 여행가 아브드 알-사디가 17세기 즈음에 집필한 여행기에 남아있다. 아브드 알-사디가 당시 젠네 지역을 여행할 당시 그는 구전으로 내려오는 아프리카 전통 설화를 자신의 여행기에 옮겨적었다. 그의 여행기에 따르면 옛 젠네의 쿤부루 술탄이 1240년에 처음으로 이슬람으로 개종한 이후, 자신의 궁전을 모스크로 전환했다고 한다. 쿤부루 술탄은 모스크 바로 옆쪽에 새로운 궁전을 지어 그 바로 옆에 살았고, 그의 후계자들은 모스크에 탑과 벽들을 따로 지었다.아브드 알-사디가 남긴 기록 이외에 젠네 모스크에 대한 또다른 언급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나마 1828년 프랑스의 탐험가인 르네 카일리에가 이 젠네 모스크의 폐허들에 대해서 짧게나마 글을 남긴 적이 있다. 르네 카일리에는 '젠네 지방에는 흙으로 만든 모스크가 있는데 2개의 거대한 흙덩이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높지는 않다. 규모는 크지만 조악하게 만들어져 있다. 현재는 버려져 수 백마리의 제비들이 그 속에 둥지를 틀고 있다. 사람들은 제비똥 냄새를 피하기 위해서 모스크 안쪽에는 들어가지 않고 바깥 안뜰에서 기도한다.'라고 적었다.
르네 카일리에가 젠네 모스크를 방문하기 약 10여 년 전쯤, 풀라니족의 지도자 세쿠 아마두가 젠네 지방을 침공, 점령했다. 세쿠 아마두는 젠네 모스크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고, 되는대로 방치해 그냥 무너지도록 놔두었다. 이렇게 방치해버렸기 때문에 르네 카일리에가 본 젠네 모스크가 제비 똥에 더럽혀있을 정도로 굉장히 불결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세쿠 아마두는 젠네 지방에 있는 대부분의 모스크들을 폐쇄시킨 다음, 제 궁전 바로 옆에 새로운 대모스크를 지었다. 그가 지은 모스크는 낮고 넓은 형태의 건물로 미나레트나 탑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세쿠 아마두가 지은 모스크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1893년에 프랑스의 루이 아르시나르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젠네 지방을 정복했고, 이 과정에서 모스크 역시 같이 파괴되었다.[5]
프랑스 식민당국이 프랑스 건축을 섞어 대규모 개축하기 이전의 젠네 모스크. 내부에는 썩은 새똥이 쌓여 악취가 그득해서 사람들이 들어가지도 못하고 앞뜰에서 가도를 드릴 정도였다고 한다.
1906년, 젠네 지방을 다스리던 프랑스 식민당국은 세쿠 아마두가 세운 모스크의 폐허 자리에 학교를 세우고, 옛 모스크의 유구가 남아있는 자리에 새로운 모스크를 건립했다. 프랑스 당국은 당연히 강제로 말리인들을 차출해서 새로운 모스크를 짓도록 했다고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말리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하고 난 이후 젠네 모스크는 말리 문화의 상징으로 자리잡으며 말리, 그리고 아프리카 건축문화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20세기 후반에는 전기설비가 모스크 내에 설치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전자장비들이 모스크 안쪽에 설치되면서 건물 구조를 훼손한다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 1988년에는 젠네의 구시가지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면서 함께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인정받았다. 다만 1996년 보그가 모스크 내부에서 패션쇼를 주최했는데, 이 패션쇼에서 얇디얇은 옷들을 걸치고 나온 모델들을 보고 분노한 시민들로 인해 결국 비무슬림들의 출입이 금지되어버리고 말았다. 이 출입금지 조치는 현재까지 유지되어서 무슬림이 아닌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모스크 경내에 입장할 수 없다.
3. 모습
항공사진[7] | 대기도실 내부 |
모스크에서 가장 독특한 특징이 벽에 꼬치처럼 꽂혀있는 야자나무 막대기들이다. 주로 야자나무들로 만들어졌는데, 이 막대기들을 말리어로는 '토론'이라고 부른다. 대략 길이는 60cm 정도이다. 보통 이 막대기들을 건물 지지용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이 막대기들은 매년 외벽을 보수공사할 때 쓰는 발판이다. 부서지고 헐기 쉬운 진흙으로 지어진 젠네 모스크의 특성상 어쩔 수 없이 매년 외벽에 새롭게 진흙 반죽을 발라줘야 되는데, 이때 이 막대기들을 밟고 올라가 공사를 하는 것이다. 물론 장식용의 목적도 있다.
모스크는 젠네 시장통 한복판에 있으며 대략 75m x 75m 정도 되는 큼직한 진흙 기단 위에 지어져 있다. 인근의 바니 강이 범람해서 젠네 시내까지 잠길 때가 종종 있기 때문에 일부러 모스크를 기단 위에 높게 지어 허물어지지 않도록 한 것으로 추측된다.
기단에 파여있는 6개의 계단을 올라 모스크로 들어갈 수 있다. 모스크의 입구는 북쪽 면에 있다.
모스크는 완전한 정사각형 구조가 아니어서 위에서 보면 정사각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사다리꼴 모양에 더 가깝다. 이슬람의 최고 성지 메카를 가리키는 기도벽은 대모스크 동쪽 벽에 있다. 기도벽에는 3개의 거대한 진흙 탑이 세워져 있고 이들 중 가장 높은 중앙 탑은 그 높이가 약 16m 정도이다. 보통 젠네 모스크 하면 떠올리는 모습이 이 3개의 진흙 탑들을 포함한 동쪽 벽면이다. 탑은 원뿔 모양의 첨탑으로 장식되어있고 맨 꼭대기에는 타조알이 한 개씩 꽂혀있다. 동쪽 벽의 두께는 거의 3m에 이를 정도로 굉장히 두꺼우며 벽 곳곳에 꽂혀있는 나무 막대기들 덕분에 더욱 보강되어 있다.
동쪽 벽 바로 뒷쪽에는 대기도실이 있다. 기도실의 크기는 26m x 50m 정도로 모스크 전체 면적의 절반 정도를 차지할 정도지만 천장을 떠받치기 위해 안쪽에 세워진 기둥들의 두께가 워낙 두꺼운 탓에 안에 들어가보면 생각만큼 넓다는 생각은 들지 않고 기둥들 때문에 시야도 굉장히 좁은 편이라 답답한 느낌을 받는 사람들도 많다. 대기도실에는 90여 개가 넘는 두꺼운 진흙 기둥들이 열열이 늘어서 있으며, 때문에 내부의 모습을 보면 마치 동굴의 종유석을 보는 느낌을 준다. 바닥은 그냥 모래 위에 양탄자를 깔아놓았으며, 북쪽과 남쪽 벽에 뚫려있는 조그만 창문들로 햇빛이 조금씩 들어오기는 하지만 워낙 창문이 작아서 앞을 보는 데에 큰 도움은 되지 않는다.
동쪽 벽에 붙어있는 3개의 탑들 뒤쪽으로는 공간이 파여있다. 개중 가장 공간이 널찍한 중앙 탑 뒤편 방은 이맘이 앉는 자리로 기도실에서 매 금요일마다 기도를 주재할 때마다 이 곳에서 예배를 주재한다. 이맘의 방 위쪽으로는 조그만 방이 하나 더 있는데, 옛날에는 이 곳에서 아잔들이 아침마다 사람들에게 기도 시간을 알렸다. 참고로 동쪽 벽을 통해서 옥상으로 올라갈 수는 없다. 정 옥상으로 올라가고 싶으면 기도실 내부로 들어가 남서쪽 모퉁이에 있는 탑 내부의 계단을 통해서 옥상으로 올라가면 된다. 옥상에는 조그맣게 환기구들이 나있어서 평상시에는 바구니로 닫아놓는데, 가끔씩 기도실 내부의 공기가 너무 덥거나 냄새가 심할 때에는 이 환기구를 열어서 위쪽에 있는 더운 공기를 빼낸다고 알려져 있다.
기도실 앞쪽에는 20m x 46m 크기의 꽤나 넓은 앞마당이 있다. 3면의 회랑들이 앞마당을 둘러싸고 있는데 이 회랑들 모두 아치로 이루어져 있다. 개중 서쪽 회랑은 여성들만이 통행할 수 있다.
4. 각종 행사
보수공사의 모습 | 축제 |
이 과정에서 경주가 벌어지기도 한다. 구덩이에 있는 진흙을 공사장의 인부들에게 퍼서 갖다주어야 하는데, 누가 제일 먼저 구덩이의 진흙을 공사장까지 나르는지를 두고 경주가 벌어지는 것이다. 보통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여성과 아이들이 구덩이에 물을 채워 최대한 연하게 만들어놓으면 오전에 남성들이 경기를 치르고 우승자를 가린다. 이 중에서 가장 먼저 공사장에 도착한 사람은 그해의 승리자라는 명예를 얻는다고. 이렇게 공사장에 진흙이 도착하면 원로 장인들이 공사를 총감독한다. 공사는 보통 며칠에 걸쳐서 이루어진다.
5. 대중 매체에서
Europa Universalis IV 에서 기념물로 구현되었다.대항해시대3,4의 발견물 유적으로 등장한다.
[1] 사실상 젠네 모스크의 상징이다.[2]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3]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4]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5] 아르시나르 장군의 점령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 저널리스트 펠릭스 뒤부아가 젠네를 방문했다. 그는 당시 젠네 모스크가 공동묘지로 쓰이고 있었다고 적었다.[6] 참고로 뒤부아는 모스크 완공 후에 젠네를 방문했는데, 그는 새로운 모스크를 보고 프랑스의 색채가 지나치게 많이 섞이면서 고유의 옛 풍취가 없어졌다며 경악했다. '멧돼지와 교회 오르간 중간의 어딘가'라고 혹평을 했을 정도. 다만 아프리카식 건축을 그대로 보존했다는 평을 한 사람들도 있기는 있었다.[7] 3개의 탑들이 있는 쪽이 동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