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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식

파일:조동식(1873).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조동협(趙東協)
경렬(慶烈)
본관 풍양 조씨[1]
출생 1873년 1월 22일
충청도 청주목 서강내이상면 고심리
(現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강내면 산단리[2] 고심이마을)
사망 1949년 2월 24일[3] (향년 76세)
가족 아버지 조규하[4], 어머니 남양 홍씨
손자 조남기
묘소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강내면 태성리 요골마을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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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중국 인민해방군에서 상장을 지낸 조남기는 조동식의 손자이다.

2. 생애

1873년 1월 22일 충청도 청주목 서강내이상면 고심리(現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강내면 산단리 고심이마을)에서 아버지 조규하(趙珪夏, 1847 ~ 1888. 3. 14)와 어머니 남양 홍씨(1845 ~ 1905. 12. 5)[5] 사이에서 4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청주군 강내면(現 청주시 흥덕구 강내면) 태성리로 이주해 본적을 두었다.

1919년 3월 23일 밤, 청주군 강내면 태성리에 있는 대성산 정상에서 마을 사람 11명과 함께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사기를 올렸다. 이때 강내면 내 18개 마을과 강내면과 인접한 강외면(現 흥덕구 오송읍옥산면(現 흥덕구 옥산면)·남이면(現 서원구 남이면) 등지에서도 이에 호응해 횃불을 올리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청주군과 연기군 북면(現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등지에 주둔한 일본 제국 경찰, 헌병대, 수비대를 동원해 만세시위 행렬을 제지하고 총기를 이용해 시위대를 연행해 당일 새벽 1시에야 시위가 끝났다.

이튿날인 3월 24일 대성산 정상에서 다시 마을 사람 11명과 함께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당일에는 연기군 동면(現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응암리에서도 이에 호응하는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또한 3월 25일에는 자신의 집에서 김재형(金在衡)이 보낸 심부름꾼 김 아무개로부터 조선독립에 대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만세운동을 격려하는 비밀 격문 45매를 건네받았고, 이를 마을에서 부리던 심부름꾼 허영대(許永大)에게 전하면서 강내면 태성리 행절마을 일대에 배포하도록 지시했다.

3월 26일에도 대성산 정상에서 마을 사람 11명과 함께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외쳤고, 이날에도 연기군 동면(現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응암리에서 이에 호응하는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3월 27일에는 연기군 동면(現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예양리·노송리·송용리와 멀리 경기도에서까지 횃불시위가 전개되었으며, 3월 30일 밤에는 부용면(現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등곡리에서 태성리 대성산 시위에 호응하는 횃불시위가 전개되었다. 이어 4월 1일에는 청주군 청주면(現 청주시)·오창면(現 청원구 오창읍)·강외면·부용면(現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북일면(現 청원구 내수읍북이면(現 청원구 북이면)·강내면·옥산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횃불시위가 벌어졌다.

이후 청주군 일대의 만세시위 주도자로 지목돼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19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이른 바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이에 공소하여 5월 1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 바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이 취소되었으나 형기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에 상고했으나 6월 12일 고등법원에서 이른 바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어 결국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고, 1949년 2월 24일 별세했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 회양공파(淮陽公派)-한산군파(漢山郡派)-학생공파(學生公派) 24세 동(東) 항렬.[2] #[3] 음력 1월 27일.[4] 趙珪夏.[5] 홍순렬(洪舜烈)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