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 ||||
{{{#!wiki style="margin:-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rowcolor=#003478,#C39335>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김두봉 | 최용건 | 황장엽 | 양형섭 | |
<rowcolor=#003478,#C39335> 제5대 | 제6대 | |||
김영남 | 최룡해 | |||
}}}}}}}}} |
1. 개요
북한의 최고 상설주권기관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위원장. 1948~1972년, 1998~2009년 사이 북한의 국가수반으로 기능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며 국가수반 자리를 내어준 지금도 중요한 자리다.2. 법적 근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 제6장 국가기구 제3절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제107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위원장, 부위원장, 서기장, 위원들로 구성한다. 제111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은 상임위원회 사업을 조직 지도한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은 국가를 대표하며 다른 나라 사신의 신임장, 소환장을 접수한다. |
3. 연혁
1948년, 1기 최고인민회의가 선거되고 9월에 최초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조직되면서 시작되었다. 인민민주주의 헌법에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지위와 권한에 대한 그 어떠한 규정도 없었으나, 사회주의권의 맥락에서 볼때 국가수반으로 기능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초대 상임위원장은 당시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겸하고 있던 김두봉이었으나 실권은 김일성에게 있었다. 김두봉은 6.25 전쟁 중 상임위원회의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김일성과 갈등을 빚었으며, 김일성의 노선에 대해 공공연히 불만을 터트렸다. 1956년, 8월 그룹이 김일성에 대한 반기를 들었을 때 김두봉도 여기에 가담하였으나 승산이 없음을 알고 발을 뺐다. 그러나 병을 핑계로 8월 그룹 처벌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는 등 완전히 김일성의 눈밖에 나 1957년 9월, 2기 최고인민회의가 선거되자 빨치산이면서 동시에 내각 사업에서 극도의 무능을 드러내어 인심을 잃은 최용건으로 교체된다. 이후 1972년 사회주의 헌법이 채택되어 국가주석제가 실시될 때까지 최용건이 상임위원장으로 재임하게 된다. 김두봉의 숙청과 더불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독립성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으며 당중앙위원회 행정부가 설치되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와 사법부를 관할하는 등 내각과 마찬가지로 당의 감독을 받는 체제가 되어 이후 우리가 알게 되는 허수아비 자리로 전락하게 된다. 표도르 째르치즈스키는 1968년부터 내각수상이 국가수반으로 호칭된 사례를 발굴하였는데, 이를 보면 이 시기에 북한 내부적으로 국가수반으로 인정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1972년 12월, 사회주의 헌법이 채택된 이후 상임위원장은 그 격이 더욱 떨어진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의장으로 격하된다. 할일도 없어서 이전에는 따로 선거하던 최고인민회의 의장과 겸직하는 수준이었다. 이전 김두봉, 최용건은 정치위원회/상무위원회 위원에 선출됐으며 최용건은 당 비서 및 정치위원회 상무위원까지 지냈으나 황장엽과 양형섭은 모두 당중앙위원회 위원으로 그쳤다. 초대 상설회의 의장은 김일성종합대학 총장 황장엽이었으며, 황장엽이 1979년 과학교육비서에 임명됨에 따라 1983년 4월, 사회과학원장 양형섭으로 교체되어 1998년 김일성 헌법 수정때까지 재임하게 된다.
그런데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고 그 뒤를 이은 김정일이 1998년 주석제를 폐지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사실상의 막부 통치를 실시함에 따라 다시 이전처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으로 그 위상이 격상되었으며, 이전 헌법에 없었던 국가를 대표한다는 내용 역시 추가되었다. 이 때문에 일반적으로 이 시기의 상임위원장은 다시 국가수반으로 돌아왔다고 보는 시선이 일반적이다. 앞서 언급한 째르치즈스키는 헌법상 규정의 모호함을 지적하는데 확실히 1998년 김일성 헌법의 문구가 국무위원장 체제가 도입된 김정은 시대 헌법에도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보면 확실히 기존 헌법의 문구 만으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국가수반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으나, 당시 북한을 상대하던 국가들에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국가원수로 인식했고, 김영남도 실제로 국가원수 자격으로 각종 정상회담에 참석했으며, 남북정상회담 때도 남한 정부는 김영남만 국가원수 자격으로 나오는 것을 우려하였다. 김정일 본인도 김영남이 국가수반이니 답방은 김영남이 가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는 등 이 시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국가수반이었다는 것은 독자연구가 아니다.
그러다가 2008년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2009년 김정일 헌법 개헌 및 2010년 9월, 3차 당대표자회 소집으로 김정은 후계체제를 준비하게 되면서 국방위원장을 국가의 최고령도자로 공식화하게 된다. 그러나 이전의 비공식적 지위를 공식화한 정도에 불과했으며 김영남은 여전히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거되었고, 외교 의전을 대부분 담당하였다. 이러한 시스템은 2016년 국방위원회가 국무위원회로 대체된 후에도 한동안 이어졌다. 그러나 2019년, 14기 최고인민회의에서 김영남이 마침내 은퇴하고 최룡해가 새로운 상임위원장에 선거되면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외교 부문보다는 입법부문에 중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2021년 1월, 8차 당대회에서 최룡해는 정치국 상무위원에 재선되었으나, 조선로동당에 할당되는 부위원장 태형철은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강등되었고, 그 후임인 강윤석은 아예 정치국에서 탈락하는 등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위상이 약화되고 있는 모습이 관찰되고 있다. 최룡해의 서열도 원래 김정은에 이은 2위였으나 내각 총리 김덕훈, 당 조직지도부장 조용원에게 밀려 이제는 반쯤 은퇴한 리병철보다 겨우 앞서는 상황이다.
4. 역대 위원장
성명 | 임기시작 | 임기종료 | 직책 |
최고인민회의 1기 1차 회의 1948년 9월 2일 ~ 9월 10일 | |||
김두봉 | 1948년 9월 9일 | 1957년 9월 20일 |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
최고인민회의 2기 1차 회의 1957년 9월 18일 ~ 9월 20일 | |||
최용건 | 1957년 9월 20일 | 1962년 10월 23일 | |
최고인민회의 3기 1차 회의 1962년 10월 22일 ~ 10월 23일 | |||
최용건 | 1962년 10월 23일 | 1967년 12월 16일 | |
최고인민회의 4기 1차 회의 1967년 12월 14일 ~ 12월 16일 | |||
최용건 | 1967년 12월 16일 | 1972년 12월 28일 | |
최고인민회의 5기 1차 회의 1972년 12월 25일 ~ 12월 28일 | |||
황장엽 | 1972년 12월 16일 | 1977년 12월 17일 | 상설회의 의장으로 직함 개편 |
최고인민회의 6기 1차 회의 1977년 12월 15일 ~ 12월 17일 | |||
황장엽 | 1977년 12월 17일 | 1982년 4월 5일 | |
최고인민회의 7기 1차 회의 1982년 4월 5일 | |||
황장엽 | 1982년 4월 5일 | 1983년 4월 7일 | |
최고인민회의 7기 2차 회의 1983년 4월 5일 - 4월 7일 | |||
양형섭 | 1983년 4월 7일 | 1986년 12월 30일 | |
최고인민회의 8기 1차 회의 1986년 12월 29일 - 12월 30일 | |||
양형섭 | 1986년 12월 30일 | 1990년 5월 26일 | |
최고인민회의 9기 1차 회의 1990년 5월 24일 - 5월 26일 | |||
양형섭 | 1990년 5월 26일 | 1998년 9월 5일 | |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 1998년 9월 5일 | |||
김영남 | 1998년 9월 5일 | 2003년 9월 3일 | 상임위원장으로 직함 환원 |
최고인민회의 11기 1차 회의 2003년 9월 3일 | |||
김영남 | 2003년 9월 3일 | 2009년 4월 9일 | |
최고인민회의 12기 1차 회의 2009년 4월 9일 | |||
김영남 | 2009년 4월 9일 | 2014년 4월 9일 | |
최고인민회의 13기 1차 회의 2014년 4월 9일 | |||
김영남 | 2014년 4월 9일 | 2019년 4월 12일 | |
최고인민회의 14기 1차 회의 2019년 4월 11일 - 4월 12일 | |||
최룡해 | 2019년 4월 12일 | 재임 중 |
5. 여담
- 최고령 상임위원장은 2014년 4월, 무려 86세의 나이로 선거되어 2019년, 91세로 은퇴한 김영남이며 앞으로도 깨질 일은 없어 보인다.
- 최장기 재임자도 20년 7개월간 재임한 김영남이다. 2번째는 15년 5개월간 재임한 양형섭. 최용건은 15년 3개월간 재임하여 아슬아슬하게 3위다.
- 재임 중인 최룡해를 제외하면 9년간 재임한 김두봉이 최단기 재임자이다. 김두봉은 유일하게 단임으로 그친 상임위원장이기도 한데, 최용건, 양형섭, 황장엽은 모두 3선, 김영남은 4선을 했다.
- 김두봉은 유일하게 남한 출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란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앞으로 이 기록은 깨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 황장엽은 유일하게 임기 중 소환된 기록을 가지고 있다. 숙청된 김두봉도 일단은 1기 임기를 마무리하는 방식으로 소환됐다. 황장엽은 만 49세로 선거되어 최연소 상임위원장 기록도 있다. 또 황장엽은 유일하게 탈북한 상임위원장이다.
- 상임위원장들은 전원 상임위원회가 아니라 다른 부문에서 사업하다가 영입된 경우다. 초대인 김두봉은 제외하더라도 최용건은 부수상 겸 민족보위상, 황장엽은 김일성종합대학총장, 양형섭은 과학교육비서 및 사회과학원장, 김영남은 부총리 겸 외교부장, 최룡해는 사로청 비서, 당중앙위원회의 근로단체와 조직지도 부문, 군 총정치국장으로 사업했다. 과학교육 부문에서 황장엽, 양형섭 둘이 배출됐으니 제일 많이 배출한 케이스다. 황장엽, 양형섭, 김영남이 당외교에 종사한 것을 보면 외교 부문도 비중이 있다고 할 수 있다.
- 최용건은 유일한 군인 출신 상임위원장이다. 다만 최룡해도 총정치국장으로 잠시 군인으로 사업한 적이 있으나 당에서 군인으로 낙하산 파견을 갔다가 몇년 후에 다시 돌아온 경우로 사실상 예외로 봐야 한다. 반면 최용건은 전문 군인 출신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