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880년[1] 1월 14일 |
충청도 임천군 인세면 장토리 (현 충청남도 부여군 세도면 장산리)[2] | |
사망 | 1942년 7월 26일[3] (향년 62세) |
중화민국 쓰촨성 원장현 난항쯔 20호 (현 중국 쓰촨성 청두시 원장구) | |
본관 | 풍양 조씨[4] |
자 | 운뢰(雲雷) |
호 | 비아(非我) |
묘소 | 중국 충청남도 부여군 세도면 화수리 |
상훈 | 1977년 건국포장 추서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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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2. 생애
1880년 1월 14일 충청도 임천군 인세면 장토리(현 충청남도 부여군 세도면 장산리)에서 아버지 조동식(趙東植, 1856. ~ 1939.2.22.)[5]과 어머니 전주 이씨(1852. ~ 1927.12.10.)[6] 사이에서 4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임천군 초신면 상송리(현 부여군 세도면 청송4리 기왓말 706번지)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다. 아버지 조동식은 1888년(고종 25) 식년 생원시에 3등 137위로 입격했다.1910년 경술국치 이후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중화민국으로 건너갔다. 1914년 펑톈성 둥볜다오(東邊道) 퉁화현[7]에서 김창식(金昌植)·강봉주(姜鳳周)·윤이병(尹履炳)·류병심(柳秉心)·신규선(申奎善)·윤호(尹浩) 등과 함께 광제회(光濟會)를 조직한 뒤 여준, 이승규(李昇奎), 이규준(李奎俊), 김창환(金昌煥) 등과 서로 오가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 동지를 모아 군자금을 조달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이후 경기도 경성부 화동[8] 72번지 강창희(姜昌熙)의 집에 주소지를 두고 미국에서 발간되던 《신한민보(新韓民報)》를 조선 국내에 밀수입하여 발행했으나, 1915년 초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어 복역하였다. 1915년 3월 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강도 및 강도상해 혐의에 대해 면소 판결을 받아 곧 석방되었다.[9]
1917년에 중화민국으로 다시 망명하였으며, 상하이시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에 참여하여 1920년에는 초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후난성 난현(南縣)[10] 성내(城內)로 이주하였다.[11] 1921년 3월 20일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 임시선전원으로 임명된 뒤[12] 이튿날인 3월 21일 후베이성으로 파견되었고[13], 이어 쓰촨성 및 후난성에 파견되어 한국독립을 널리 선전하고 필요한 연락을 취하였으나, 1921년 8월 10일 해임되어 상하이시로 귀환하였다.[14] 1922년 2월 8일부터 6월까지 열린 제10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임시의정원 의원직 사직을 청원했으나 1922년 6월 24일 도인권(都寅權)의 동의로 반려되었고[15], 이어 다시 사직을 청원하여 1922년 7월 1일 양기하의 동의로 사직청원이 가결되었다.[16]
1922년 8월에는 허난성 재정청(財政廳) 대회당에서 한국독립 선전을 위한 연설회를 개최하였다.[17] 1922년 9월 18일 상하이시에서 개최된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 이사회에서 교제과(交際科) 간사에 선출되어[18] 이후 조선과 중화민국 양국의 친선과 공동 항일운동을 위해서 힘을 쏟았다. 같은 해 국민혁명군에 입대하여 무력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1923년 가을에 베이징시에서 동지 이우민(李愚珉)·장승조(張承祚)와 함께 중화민국 일대에 거주하는 조선인 아동을 대상으로 군사훈련을 시켜 장래 조선독립운동에 종사할 선구자를 양성하고자 '육영학원'이라는 기관을 창설할 것을 계획하였고, 선전문을 작성한 뒤 중국인 유지들에게 학교 설립 취지를 설명하여 기부금을 얻어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이후 의열단에 입단하여 1929년 조선에 밀입국하였고, 동지 이우민을 만나 권총을 얻었다. 이어 경기도 안성군에서 어느 부호를 협박하여 거액의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1930년 10월 중순 충청남도경찰부에 체포된 뒤 경성부 서대문경찰서로 옮겨져 취조를 받았고, 10월 말에 이른바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다.[19] 그러나 이후 석방된 것으로 보이며, 다시 중화민국으로 돌아가 국민혁명군 소속으로 산시성 육군 제1사단 사령부 고등고문관, 건국군 상군(湘軍) 제6군사령부 군의처장, 제3사단 사령부 등의사성연군(登議四省聯軍) 총사령부 등군(登軍) 등을 지냈다.
그러던 1942년 7월 26일 쓰촨성 원장현(溫江縣)[20] 난항쯔(南巷子) 20호에서 사망했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1] 풍양조씨세보 6중간 병술보 4권 권80 기편(己編) 1348쪽에는 1881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2] 1915년 3월 4일 경성지방법원 판결문 참조.[3] 풍양조씨세보 6중간 병술보 4권 권80 기편(己編) 1348쪽에는 1937년 7월 25일에 사망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4] 전직공계(殿直公系)-회양공파(淮陽公派)-찰방공파(察訪公派) 25세 구(九) 항렬.[5] 자는 순좌(舜佐).[6] 이인명(李寅明)의 딸이다.[7] 현 중국 지린성 퉁화시 퉁화현(通化縣)[8]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화동[9] 1915년 3월 4일 경성지방법원 판결문[10] 현 중국 후난성 이양시 난현(南縣)[11] #[12] #[13] #[14] #[15] #[16] #[17] #[18] #[19] 1930년 10월 27일 동아일보 기사[20] 현 중국 쓰촨성 청두시 원장구(溫江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