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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연/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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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학창 시절3. 교수시절4. 참여연대 시절5. 교육감 출마

1. 개요

조희연의 생애를 다룬 문서.

2. 학창 시절

1956년 음력 10월 6일(양력 11월 8일) 전라북도 정읍군 정주읍 연지리 미창동(현 정읍시 연지동 미창마을) 348-6번지에서 정읍세무서 공무원으로 재직하던 조일환(曺日煥, 1920 ~ 1997)의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선대의 고향은 정읍시 소성면 화룡리이다.

5살 되던 해 어머니를 여의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가정방문을 와 어머님이 계시지 않아도 혼자서 정리정돈을 하고 학교에서도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대견하다는 칭찬에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전주교육대학교 교생 선생님을 무척 좋아했었다고 한다. 당시에 같은 반 아이들 8명하고 전주 경기전 앞에서 찍은 사진은 최근에 봐도 애틋함이 느껴진다고 한다.# 학창 시절에는 정말 별 볼 일 없는 샌님 같은 학생이었고 교회를 열심히 다녀서 주로 학교, 도서관, 교회를 가는 시절을 보냈다. 전주 동북교회를 다녔으며 중등부 때는 회장을 했는데 교회 안 나온 아이들 집을 일일이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닐 정도로 부지런하고 열성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교회를 그렇게 다녔지만 교회오빠로서 여학생들에게 인기는 없었다.# 전형적인 모범생 스타일에 재미가 없었던 그가 여학생에게 인기가 있었을리 만무.

전주풍남초등학교전주북중학교를 졸업한 후, 고등학교 입학시험에서 도덕과목 3문제를 틀려 전기 고등학교에 떨어지고 후기고등학교인 서울중앙고등학교에 1972년에 입학했다. 서울로 유학 오고 2~3개월에 한번씩 아버지께 편지를 써서 건조한 인사말 한두 마디만 급하게 건넨 뒤‘다름이 아니옵고’로 시작해 학비와 생활비를 요청하는 것이 전부일 정도로 부모님과의 관계는 무미건조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마음의 짐을 지고 있다고 한 그는 우연히 발견한 아버지의 삶을 적은 일기를 보았다. 그리고 그 문서를 조일환의 사촌이자 미술교사인 조동환이 주목해서 그의 아들, 조해전과 함께 작업을 해서 <뜻밖의 개인사>[1] 라는 책을 출판했으며 ‘조씨연대기’란 제목을 전시회를 열었다. # 책은 연대기 방식의 드로잉으로 구성되었으며, 조일환의 막내아들인 조희연의 아버지에 대한 회고가 추가되었다. 또한 조동환과 조해전은 조동환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놀라운 아버지, 1937-1974>[2] 라는 책을 냈으며 이 책을 기초로, 이를 형상화한 미술작품을 광주 비엔날레에 재출하여 광주비엔날레 최우수작의 하나로 선정되었다. 현재 광주비엔날레 전시관에서 영구전시 목록에 있다.

1975년에는 서울대학교 사회계열(사회학과)에 입학했다. 고등학교 시절 ‘씨알사상’의 실천가 함석헌 선생의 영향을 받은 복음주의 모임인 ‘겨자씨’에 참여하고 대학 시절 활발한 사회활동을 벌였던 경동교회에 다니면서 사회 비판의식을 키워 나갔다.

1978년 5월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4학년 재학 중에‘유신헌법과 긴급조치를 철폐하라’,‘언론 자유와 학원의 자유를 보장하라’ 등의 문구가 적힌 유인물을 만들어 배포하다가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체포됐다. 당시 긴급조치 9호는 학생의 집회・시위 또는 정치 관여행위, 유언비어를 날조・유포하거나 긴급조치를 공연히 비방하는 행위 등에 대해 1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고 10년 이하의 자격정지를 함께 부과하도록 규정했다. 그는 체포된 후 수사 과정에 폭행을 당했고 구속 기간을 초과해 구금됐다. 재판에 넘겨져서는 징역 2년과 자격정지 2년을 선고받은 뒤 1979년 8월 15일 가석방으로 출소했다.[3] 그로부터 34년 후인 2013년 3월 21일, 헌법재판소는 긴급조치 9호[4]가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렸고, 같은 해 7월31일 서울고등법원 형사6부(정형식 부장판사)는 긴급조치 9호 위반혐의로 기소돼 1979년 징역2년・자격정지 2년을 선고받은 그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긴급조치 9호가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지나치게 제한하거나 침해해 무효라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 따라 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는 무죄 선고 이후 ‘긴급조치 9호’ 피해자 6명이 국가로부터 받을 보상금을 모아 ‘아시아 민주주의와 인권 기금’을 조성하기로 했다. 그는 피해자 6명과 함께 아름다운재단과 5억5000만원 규모의 기금 협약식을 열고 “상대적으로 민주주의 선진국으로 평가받는 한국이 국경을 넘어 아시아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원하는 일에 나서기 위해 긴급조치 세대가 그 마중물을 마련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조희연 외에 김종수 도서출판 ‘한울’대표, 김준묵 전 스포츠서울 회장, 변재용 한솔교육 대표이사, 하석태 전 경희대 교수, 한 익명의 기부자 등이 기금 조성에 참여했다.#

출소한 뒤에는 고향으로 돌아갔고 그를 본 아버지가 “평생 뭐 먹고 살래? 독립운동 했던 사람들 자녀들은 다 어렵게 산다는데..”하시며 안타까워 하셨다고 한다. 70년대 말에는 대학생들 사이에 현장론이 득세하던 시절이었다. 목적의식적으로 노동자가 되겠다는 현장론이 거셌으며 감옥을 가거나 제적을 당하면 직업을 가질 희망이 없었다. 그는 출소 이후 고향에서 과외를 하다가 다른 출구가 없어서 ‘열관리 기술자’ 자격증을 따 노동자의 삶을 살겠다고 결심했다. 노동자의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기 전, 술을 마시고 괴로워하며 ‘현장에 투신할 것인가, 적성에 맞는 일(공부)을 찾아 2선에서라도 봉사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스스로를 ‘2선 지식인’이라고 표현한다. 당시 100%를 다 던진 친구들에 비하면 기득권도 지키면서 2선에서 따라가는 지식인라는 뜻에서다. 그러한 부채의식을 가지고 2선 지식인으로 30년간 살아오면서 지켜왔던 진보적 가치를 교육 영역에서 실현하려고 나름의 노력을 하고 있다고 한다.#

"나도 감옥에 가 있고 그랬지만, 우리보다 훨씬 자기를 던져서 시대와 싸웠던 친구들이 있었어요. 그 친구들에 대한 미안함도 있고 죄의식도 있고, 그래서 2선에서라도 최선을 다하는 노력을 해왔던 것 같아요. 솔직히 2선 지식인이지, 1선 지식인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물론 1선 지식인이 없어지면, 뒤에 있던 사람이 맨 앞에 있는 것처럼 보이긴 하죠. 80년대 그 많던 레닌들이 다 없어지니 내가 일선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우리사회가 좀더 혁명적 상황에 처한다면 일선 지식인과 민중들이 나타날 거라고 봐요."

시험에는 일가견이 있어 필기시험은 한 번에 통과했지만 보일러를 본 적이 없어서 실기시험은 어떻게 손을 댈 수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실기시험을 준비하려던 차에 1979년 박정희가 죽고‘서울의 봄’이 오고나서야 겨우 복학할 수 있었다.

다시 대학을 다니게 된 그는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마련해준 은사를 만났다. 서울대 사회과학대학 교수였던 고 김진균 교수(1937~2004)[5]이다 그가 제2014년 교육감 선거 때 ‘진심 교육감’이라는 구호를 내걸었는데, 이는 김진규 교수의 이미지를 닮고 싶고 견지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1980년대 김진균 사단으로 있었다는 것은 굉장한 행복이자 자랑입니다. 아직도 마음 속에 김진균 선생이 살아계십니다. 선생이 꿈꾸셨던 세상을 만들어 가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

3. 교수시절

1990년부터 성공회대학교 교수로 부임해 신영복, 김창남(언론학), 김동춘(사회학) 교수 등과 함께 개혁적 대학의 이미지를 만드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성공회대에 재직하면서 시민사회복지대학원장, 일반대학원장, 기획처장, 교무처장, 민주자료관장, 민주주의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 1991년 5월부터는 《월간 사회평론》의 편집기획주간을 맡았다.

* 1995년부터 1996년까지 미국 USC(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에 초청되어 한국 관련 과목을 가르쳤다.

* 1999년에는 국내 처음으로 대학원 과정에 NGO학과를 만들어 새바람을 일으켰는가 하면 2000년에는 협동조합학과 신설, 시민운동 재교육강의 개설 등 대학의 틈새시장을 찾았다.

* 2000년에는 총선 전에 동료인 김동춘 사회학 교수 등과 함께 교내에서 ‘특별 총선 토론회’를 마련해 학생들의 관심을 불러있으켰는가 하면 총선연대 정책자문 교수단 2백75명의 대표 간사로 낙천낙선 운동에 대한 학술적 정당성을 확립하는 데 앞장섰다.#

* 2003년에 가장 영향력 있는 지식인 선정,‘시사저널’ 링크

* 2010년에는 중화민국 국립교통대학의 '사회조사 및 문화연구대학원'에 초청되어 1학기 동안 가르쳤다

* 2011년에는 일본 도쿄의 게이센 여학원 대학에서 1학기 동안 가르쳤다. 학술단체협의회 상임대표(2004-06년), 비판사회학회 회장(2006년)을 지냈다.

4. 참여연대 시절

참여연대 웹사이트

김기식이 주도한 학생운동 출신의 운동가 그룹, 박원순 중심의 인권변호사 그룹, 조희연을 중심으로 한 진보적 학자 등 세 그룹이 주축이 되어 1994년 9월 10일에‘참여민주사회와 인권을 위한 시민연대’(참여연대)를 창립했다.#

참여연대가 반부패운동과 사법개혁활동 등을 벌이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시민단체로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 역할을 했다. 대표적으로 사법개혁운동, 소액주주운동, 국회의원 낙선 운동 등을 펼치며 합법적인 방식으로 특권층에 맞섰다.# 열악한 환경에서 참여연대를 이끌었던 두 사람은 모두 워커홀릭으로 평가 받았다. 당시 참여연대에서 간사로 일했던 한 대학교수는 “조희연 집행위원장은 부지런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의견을 끝까지 경청하고, 절대 화를 내지 않는 포용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했다.#

* 초대 비상근 사무처장을 역임했다
* 1997년 9월부터 2000년 9월까지 정책위원장 및 협동사무처장으로 활동했다.

5. 교육감 출마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화를 위한 전국 교수 협의회(민교협), 학술단체협의회(학단협), 전국 교수노동조합(교수노조), 한국 비정규교수노동조합(한교조) 등 교수학술 4단체에 의해 추천되었고, ‘2014 서울좋은교육감 시민추진위원회’의 교육감 후보 단일화 경선에서 민주·진보 진영 단일 후보가 되었다.

선거 유세 초반은 문용린과 고승덕 두 보수 후보의 양강 구도로 흘러갔으나 조희연의 둘째아들이 다음 아고라에 작성한 지지 호소문이 인터넷에서 호평을 받았고,# 결정적으로 선거 전날에 고승덕 후보의 못난 아버지를 둔 딸에게 정말 미안하다! 사건이 터지며 중도층 표를 대거 흡수, 39.08%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2018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민주·진보 진영 단일 후보로 출마했고, 46.58%의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한 첫 서울시교육감이 됐다.

2022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민주·진보 진영 단일 후보로 출마했고, 3선에 성공한다.[6]
[1] <뜻밖의 개인사>, 새만화책, 2008.09.09.[2] <놀라운 아버지 1937-1974> #, 새만화책, 2008.09.05[3] 이때 생긴 전과로 인해 병역은 면제 처리됐다.[4] 유신헌법 제53조에 규정된 대통령 긴급조치권은 단순한 행정명령 하나만으로도 국민의 자유와 권리에 대해 무제한의 제약을 가할 수 있는 초헌법적 권한으로서, 이러한 긴급조치권의 발동을 요하는 비상사태의 발생 여부에 관한 판단은 대통령이 독자적으로 내릴 수 있도록 되어 있어 사실상 반유신세력에 대한 탄압도구로 악용되었다.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제1호를 시작으로 1975년 5월 유신헌법의 부정・반대・왜곡・비방・개정 및 폐기의 주장이나 청원・선동 또는 이를 보도하는 행위를 일절 금지하고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한다는 내용의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되었다. 특히 긴급조치 9호는 10.26 사건 직후 폐기될 때까지 무려 4년 이상이나 지속되면서 국민의 기본권을 여지없이 짓밟고 8백여 명에 달하는 지식인·청년학생 구속자를 낳았다.[5] 한국의 사회학자이며 교수. 진보적 소장학자들과 산업사회연구회를 설립하였으며,민주노총 지도위원,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공동의장,사회진보연대 대표, 학술단체협의회 공동대표, 4월혁명연구소 소장, 김낙중석방대책위원회 대표 등을 역임한 선구적 사회주의자[6] 다만 보수 표가 분산되어서 그렇지 조희연 본인의 평판이 좋아서 그런 건 아니다. 실제로 여론조사에서 최하위권을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