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존 드 클리퍼드 John de Clifford |
출생 | 1435년 4월 8일 |
잉글랜드 왕국 요크셔 웨스트 라이딩 코니스버러 성 | |
사망 | 1461년 3월 28일 (향년 25세) |
잉글랜드 왕국 요크셔 페리브리지 | |
아버지 | 제8대 클리퍼드 남작 토머스 드 클리퍼드 |
어머니 | 조앤 데이커 |
형제 | 로저, 로버트, 토머스, 엘리자베스, 모드, 앤, 조앤, 마거릿 |
배우자 | 마거릿 드 브롬플릿 |
자녀 | 헨리, 리처드, 토멋, 엘리자베스 |
직위 | 제9대 클리퍼드 남작 |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장미 전쟁 시기 랭커스터 왕조의 편에 섰다가 페리브리지 전투에서 전사했다.2. 생애
1435년 4월 8일 요크셔의 웨스트 라이딩에 위치한 코니스버러 성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제8대 클리퍼드 남작 토머스 드 클리퍼드이고, 어머니는 제6대 데이커 남작 토머스 데이커와 필리파 네빌[1]의 딸 조앤 데이커다. 코니스버러 성은 그의 이모이자 케임브리지 백작부인인 마틸다가 그의 아버지에게 준 것으로, 그녀는 존의 대모였으며, 나중에 유언장에서 존에게 은접시 12개를 넘겼다.존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는 1453년 8월 24일에 처음으로 기록에 등장하는데, 당시 그는 1390년대 이래로 클리퍼드 가문과 동맹을 맺어 온 퍼시 가문 편에 서서 네빌 가문과 맞섰다. 이 무렵 존은 요크셔 동부 지방의 대지주였던 초대 웨스키 남작 헨리 드 브롬플릿의 딸 마거릿 드 브롬플릿과 결혼했다. 1455년 장미 전쟁이 발발했다. 그 해 5월 22일, 아버지 토머스는 제1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에서 랭커스터군에 가담했다가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의 군대에게 사살되었다. 당시 미성년자였던 그는 어머니의 섭정을 받다가 1456년 7월 5일에 상속권을 취득할 수 있었다. 그 후 그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는 복수심을 가슴 깊이 새겼다.
1458년 3월 24일, 헨리 6세는 제1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로 인한 국내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요크 공작 파벌과 그에게 반대하는 파벌에 속한 대귀족들이 서로 손을 잡고 런던 시내를 행진하는, 일명 '화해의 행진' 이벤트를 개최했다. 이후 제16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은 토머스 드 클리퍼를 죽인 것에 대한 보상으로 존 드 클리퍼드와 그의 형제들에게 1,000마크(666 파운드)를 지불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존은 화해에 관심이 없었고, 역시 제1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에서 아버지를 잃은 퍼시 가문의 자제들과 함께 1,5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런던에 도착했다. 그 후 그는 요크의 마르그리트 왕비의 신임을 얻고, 요크 가문에 맞서는 랭커스터 가문의 중요한 지지자 중 한 명이 되었다.
1456년부터 웨스트모어랜드의 보안관이 되었고, 1458년에는 요크셔 서부의 보안관으로 선임되었다. 1459년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 간의 군사적 충돌이 재개되었다. 1459년 10월 12일 러드퍼드 다리 전투에서 요크군이 왕과 대적하기를 꺼리다가 와해된 뒤, 존은 1459년 11월 코번트이레엇 열린 의회에 참석했다. 이 의회는 일명 '악마의 의회'로 일컬어지는데, 요크 지지자 중에서는 무장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사람드만 참석했고, 대다수 인사는 랭커스터파였다. 이 의회에서 요크 공작 리처드를 비롯해 왕에게 무기를 들었다가 도주한 자들의 재산과 작위를 몰수하고, 도주자들을 반역자로 선포하는 안건이 통과되었다. 12월 11일, 존은 국왕, 왕비, 왕위 계승자인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1460년 4월 8일, 존은 스코틀랜드 서부 국경의 관리인으로 선임되었는데, 이는 네빌 가문이 맡았던 직책이었다. 또한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의 영지였던 펜리스 성을 탈취했다. 이 성은 클리퍼드 가문의 브루엄 성과 매우 가까운 곳에 있었기에, 여기가 네빌 가문의 영지에 소속된 점은 두 가문간의 갈등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는 여기에 더해 컴벌랜드, 웨스트모어랜드 및 노샘프턴에서 병력을 소집해 요크 공작을 따르는 반군을 섬멸하라는 지시를 왕실로부터 받았다.
1460년 여름, 워릭 백작이 이끄는 요크 공작의 추종자들이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1460년 7월 10일 노샘프턴 전투에서 왕실군은 패배했고, 헨리 6세는 워릭 백작에게 생포되었다. 마르그릐트 왕비와 그녀의 아들 에드워드는 스코틀랜드로 망명했고, 그녀의 추종자들은 잉글랜드 북부에서 버텼다. 요크 공작은 9월에 잉글랜드로 돌아온 뒤, 10월 16일 의회를 소집한 후 대귀족과 성직자들이 보는 앞에서 왕관에 손을 얹으며 왕이 될 권리를 주장했다. 그러나 대귀족과 성직자들이 헨리 6세에 대한 충성 맹세를 저버릴 생각이 없다며 차디찬 반응을 보이자, 요크파는 한동안 중재한 끝에 10월 25일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 대신에 요크 공작 리처드를 헨리 6세의 후계자로 지명하기로 결의했다.
1460년 10월 8일, 존은 잉글랜드 정부로부터 페니스 성을 솔즈베리 백작에게 돌려주고 런던에 출두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헐에서 마르그리트 왕비와 접견하고 요크에서 열린 랭커스터파 의회에 참석해 솔즈베리 백작과 요크 공작의 영지를 약탈하기 위해 무장 분견대를 파견하기로 결의했다. 자기 영지가 연이은 습격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요크 공작 리처드는 12월에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향했다. 이리하여 전투가 벌어지기 전날인 12월 29일, 제3대 서머셋 공작 헨리 보퍼트는 존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찰스 로버트 레슬리(Charles Robert Leslie, 1794 ~ 1859) 작, 러틀랜드 백작의 살인.
1460년 12월 30일, 존은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요크 공작 리처드가 이끄는 요크군을 격멸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때 그는 요크 공작 리처드의 둘째 아들인 17세의 러틀랜드 백작 에드먼드를 잡기 위해 추격대를 보냈고, 에드먼드는 가정교사와 함께 웨이크필드 다리를 건너 탈출을 시도했지만 곧 붙잡혔다. 그 후 에드먼드는 존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 존은 이 일로 '도살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 후 랭커스터파가 남하하여 1461년 2우러 7일 제2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에서 워릭 백작이 이끄는 요크군을 격파하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랭커스터파는 연이은 승리에도 불구하고 런던 주민들이 자기들에게 지극히 적대적인 것을 확인하고 런던으로 가지 못하고 요크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 사이, 요크 공작 리처드의 장남인 마치 백작 에드워드가 3월 4일 런던에 입성한 뒤 잉글랜드 국왕이 되었다. 그는 즉시 군대를 동원한 후 랭커스터군을물리치기 위해 북진했다. 1461년 3월 28일, 요크군 선발대가 에어 강의 페리브리지에서 랭커스터군 선봉대와 맞붙었다. 당시 랭커스터 선봉대는 존과 네빌 남작 존 네빌이 지휘했다. 요크군 선봉대는 워릭 백작의 지휘하에 페리브리지를 돌파하려고 시도했지만 존이 결사적으로 방어했고, 워릭 백작은 부상을 입고 물러났다.
이후 본대를 이끌고 온 에드워드 4세는 정공법으로는 다리 공략이 힘들다고 판단하고, 포콘버그 남작 윌리엄 네빌, 윌리엄 블런트, 로버트 혼에게 병력을 보내 강을 건너 서쪽으로 3마일 떨어진 캐슬포드로 향하게 했다. 이후 이들은 랭커스터군의 측면을 요격했다. 존은 군대를 재편하려고 노력했지만, 그 사이에 에드워드 4세가 병사들을 이끌고 정면에서 공격해오자 삽시간에 무너졌다. 존은 본대가 있는 토우턴을 향해 도주했지만, 요크군 추격대가 그를 맹렬히 추격했고, 랭커스터군 본대가 주둔한 곳에서 멀지 않은 딘팅 데일의 작은 협곡에서 따라잡았다. 그는 움직임을 제한하던 갑옷 칼라를 벗고 맞서 싸우다가 화살이 목을 꿰뚫어 버리면서 사망했다.
존의 유해는 계곡에 그대로 방치되었고, 에드워드 4세는 다음 날 토우턴 전투에서 랭커스터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존의 모든 재산과 작위는 몰수되었고, 워릭 백작이 그의 영지를 가져갔다. 존의 아들 헨리 드 클리퍼드는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고 숨어 지내다가 1485년 헨리 7세가 집권한 후에야 모든 영지와 작위를 회복할 수 있었다.
3. 가족
- 마거릿 드 브롬플릿(1436 ~ 1493): 초대 웨스키 남작 헨리 드 브롬플릿의 딸. 존이 사망한 후 웨스트모어랜드의 지주 랜슬롯 스렐켈드와 재혼했다.
- 헨리 드 클리퍼드(1454 ~ 1523): 1485년부터 제10대 클리퍼드 남작.
- 리처드 드 클리퍼드(? ~ ?)
- 토머스 드 클리퍼드(? ~?): 브레켄버그의 지주 존 스와비의 딸인 헬렌 스와비의 남편.
- 엘리자베스 드 클리퍼드: 로버트 아이스크 경의 부인.
4. 대중문화
- 존 드 클리퍼드는 '클리퍼드 경'이라는 이름으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역사극 '헨리 6세 2부'와 '헨리 6세 3부'에 등장한다. 그의 역할은 헨리 6세 2부에서 역사적 원형에 비해 상당해 확대되었다. 그는 이 연극에서 세인트 올번스 전장에서 아버지의 시신을 보고 격노하여 장문의 연설을 하며, 왕과 왕비를 설득하여 전장에서 도망치게 했다. 헨리 6세 3부에서는 웨이크필드 전투에 참전하여 복수심에 불타 요크 공작을 직접 죽이고, 그의 아들인 러틀랜드 백작을 죽이면서 "내 아버지가 너희 아버지에게 죽었다. 빨리 죽어라!"라고 외친다. 또한 클리퍼드는 토우턴 전투에도 등장하는데, 에드워드 4세의 동생 리처드에게 공격을 받고 워릭 백작이 급습해오자 도주한다. 막판에는 랭커스터 가문의 붕괴를 슬퍼하며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