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fff><colbgcolor=#0047a0> 출생 | 1877년 |
경상도 웅천현 북부동 백일마을 (現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북부동)[1] | |
사망 | 1941년 (향년 65세) |
경상도 밀양시 하남면 수산리 (現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수산리) | |
자 | 우원(于源) |
호 | 석천(石泉) |
본관 | 신안 주씨[2] |
학력 | 서당 |
직업 | 교육자,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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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 진해 웅천동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 교육자2. 생애
1877년(고종 14) 경상도 웅천군 북부동 백일마을에서 출생했다.어린 시절에는 서당에서 수학하였으며 아버지가 웅천현의 관리였던 주기효는 자연히 경향(京鄕)을 오르내리는 관리와 접촉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개항 이후 외세의 영향과 그에 각성하는 민족 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고장도 이에 뒤져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한성에서 구국의 길로 사립학교를 세워 후진을 길러 세계 기운에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민족적 의지를 본 그는 내 고장에도 근대적 민족 교육 기관을 설립할 것을 결심하지만 가장 큰 걸림돌이 재원의 확보였다. 그리하여 어업과 염업을 시작하여 거기에서 나오는 소득으로 학교를 경영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주기효는 36세인 1902년(광무 6) 판임주사로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임하고 오로지 학교 설립의 준비를 서둘렀다. 당시 조선은 청일 전쟁 후 새로이 열강의 각축장이 되고, 일제는 이어 러일 전쟁으로 조선에서 러시아 세력마저 몰아내고 식민지화를 재촉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보면서 주기효는 민족의 비운을 좌시할 수 없었기에 직접 상경하여 한성의 사립학교와 선각자들을 방문하고 돌아온다.
1906년 3월 10일 사재를 들여 자신이 계획하였던 웅천사립개통학교를 김구석, 양주용과 함께 설립해 북부동의 사저에서 개교하였고 초대 교장이 되었다. 이 해 10월 5일에 교실이 협소하여 성내동에 있었던 옛 웅천현 서기청 건물로 옮겼다가 웅천읍성 객사를 교사로 사용했다.
그러나 가정 경제 사정으로 입학하지 못하는 아동이 많을 뿐만 아니라 현대적 교육에 대한 이해 부족, 그리고 남녀 공학의 기피 등으로 경영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고민 끝에 가난한 아동을 위해서 하교 시에 염전에 쓰는 나무를 한 짐씩 주는 방법도 썼고, 유풍에 젖어 현대 교육에 대한 이해를 못하는 가정에도 계도를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지만 남녀공학이 아직 시기상조임을 깨닫고 다음해인 1907년 여학교인 숙명의숙(淑明義塾)을 세웠다.
주기효는 학교만 세운 것이 아니라 웅천 도서원도 차려서 무료로 면민들에게 도서를 빌려 주어 향토인의 교양 양성에도 이바지하였고, 졸업생 가운데 유망한 사람 45명을 뽑아서 장차 유능한 교원으로 확보해 두려고 유학까지 시켜 민족지사의 양성에도 힘쓰니 가산이 기울어졌다.
일제가 자본주의적 침략 수법으로 대한제국에 짊어지게 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국채보상단연동맹(國債報償斷煙同盟)’을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민족 실업의 진흥으로 민족의 저력을 기르고자 실업 조합(實業組合)과 흥업 조합(興業組合)을 발기하기도 하였다.
말년에는 밀양시 하남면 수산리로 이사를 하여 광복의 날만 기다리다 못보고 타계하였다.
3. 여담
주기효 선생님의 공적비는 웅천의 국도변에 선생의 제자들이 선생의 공력을 기리기 위해 1941년 9월에 세운것으로 1983년 11월에 어지럽게 관리되고있는 공적비를 안타깝게 생각한 당시 김준봉 웅천동장이 웅천초등학교의 설립자 공적비이기에 사비를 들여 당시 웅천국민학교(現 곰내유치원) 정문 옆으로 옮겨왔다.〈비석 원문〉
<전면>[3] 熊川私立開通學校設立子石川先生朱基孝公績碑
<좌측면> 前熊川私立開通學校學友一同
<우측면> 昭和十六年九月△日建立
<후면>[4] 光武隆凞年間嶠南一帶初代惟新敎育家中第一人也實績不知有私閱歲十餘但知有敎育英千數槪讚憂時先覺明暗同道臨機達觀窮通一貫
〈해석〉
웅천사립개통학교 설립자 석천선생 주기효 공적비, 전 웅천사립개통학교 학우 일동이 1941년 9월 △일 건립. 대한제국 광무년(1897년)부터 융희년(1910년)사이에 교남(영남) 일대의 초대 신식 교육자 가운데 첫째가는 분이시다. 하신일은 '사사로움을 알지 못하시고 오직 학교만 위하시더니 개교 10여년에 영재 천여명을 길러내셨다' 이에 모두를 청송하노니 나라가 걱정스러움 때 앞장서서 새문명을 깨우치시어 좋을때나 어려울때에도 교육에 한길이셨고 출세영달의 기회가 있어도 마다하시고 생각이 깊어서서 같은 길을 걸어섰다.
<전면>[3] 熊川私立開通學校設立子石川先生朱基孝公績碑
<좌측면> 前熊川私立開通學校學友一同
<우측면> 昭和十六年九月△日建立
<후면>[4] 光武隆凞年間嶠南一帶初代惟新敎育家中第一人也實績不知有私閱歲十餘但知有敎育英千數槪讚憂時先覺明暗同道臨機達觀窮通一貫
〈해석〉
웅천사립개통학교 설립자 석천선생 주기효 공적비, 전 웅천사립개통학교 학우 일동이 1941년 9월 △일 건립. 대한제국 광무년(1897년)부터 융희년(1910년)사이에 교남(영남) 일대의 초대 신식 교육자 가운데 첫째가는 분이시다. 하신일은 '사사로움을 알지 못하시고 오직 학교만 위하시더니 개교 10여년에 영재 천여명을 길러내셨다' 이에 모두를 청송하노니 나라가 걱정스러움 때 앞장서서 새문명을 깨우치시어 좋을때나 어려울때에도 교육에 한길이셨고 출세영달의 기회가 있어도 마다하시고 생각이 깊어서서 같은 길을 걸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