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5 21:15:15

진멸망전

수나라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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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멸망전
陳滅亡戰 | 隋滅陳之戰[1]
<colbgcolor=#2B0B30><colcolor=#F9F9F9,#FFD9E5> 시기 588년 10일 ~ 589년 2월
장소 장강 유역 및 남령산맥 일대
원인 수나라의 중국 통일 시도
교전국 <rowcolor=black>
(공세)

(수세)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sui_dynasty_textlogo.png 문제
파일:sui_dynasty_textlogo.png 양광
파일:sui_dynasty_textlogo.png 고경
파일:sui_dynasty_textlogo.png 양준
파일:sui_dynasty_textlogo.png 양소
지휘관

진숙보
소마하
진혜기
주나후
병력 약 51.8만명 약 22만명
사상자 및 손실 불명 불명
결과 수의 승리
- 진의 멸망, 중국 통일
영향 위진남북조시대 종결

1. 개요2. 배경
2.1. 수나라의 돌궐 제압2.2. 후량 병합
3. 개전
3.1. 수나라의 남정3.2. 진나라의 무능3.3. 낭미탄 전투3.4. 기정·연주 전투3.5. 양광의 도하와 건강 포위3.6. 백토강 전투와 진나라의 멸망
4. 후일담

[clearfix]

1. 개요

서기 588년 연말 수나라가 대대적으로 진나라를 침공하여 멸망시킨 전쟁으로, 이 전쟁을 마지막으로 위진남북조시대가 369년만에 그 막을 내렸다.

2. 배경

2.1. 수나라의 돌궐 제압

북주의 권력자였던 양견이 어린 정제를 핍박하여 황위를 선양받아 581년 수나라를 건국했지만, 건국 시점에서의 수나라는 함부로 남조를 공격할 상황이 아니었다. 여전히 북주의 근왕 세력이 남아 문제의 찬탈에 반대하고 있었고, 북쪽에서는 북조의 분열을 틈타 성장한 돌궐이, 동(요서)쪽에는 577년 멸망한 북제의 잔존 세력이 여전히 저항하고 있었기 때문.

우선 북주의 근왕 세력을 제압한 문제는 진나라를 상대로 겉으로 평화를 추구하는 척 하면서 북쪽에 방어를 위한 장성을 축조하고 돌궐의 사발략가한과 숙부인 보가가한 사이를 이간하는 등 돌궐이 하나로 뭉치지 못하고 분열하도록 유도했다. 한편 이때 사발략가한의 배우자가 북주의 공주였던 천금공주였고 천금공주는 모국인 북주의 복수를 호소하며 사발략가한에게 수나라를 공격하도록 설득했다.

결국 사발략가한이 고보녕 등 북제 잔존 세력과 연합하여 40만 대군을 이끌고 581년부터 수차례 수나라를 침공하지만 모두 격퇴당했고, 오히려 583년 북제의 잔존 세력을 이끌던 고보녕이 토벌된데 이어 수나라의 계획대로 돌궐이 동돌궐과 서돌궐로 분열된 뒤 수나라가 그틈을 노려 동돌궐을 복속시키면서 수나라가 염려하던 북방의 위협이 끝났다.[2]

2.2. 후량 병합

돌궐을 제압하면서 북쪽의 위협이 사라진 문제는 고경의 간언을 받아 본격적으로 남정을 계획하게 됐고, 그 전치 절차로 587년 양국의 국경 사이에 있었던 괴뢰 정권인 후량의 황제 후주를 폐위하고 요충지 강릉을 점령했다. 북조인 수의 입장에서 강릉을 점령한 건 상당히 중요한 전략적 의미를 지니는데, 한국에도 익숙한 위촉오 삼국시대 당시 조위와, 그 뒤를 잇는 서진이 280년까지 쉽게 손오를 멸망시키지 못한 원인이 219년 형주 공방전 이후 강릉을 손오가 점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훨씬 후대의 일이긴 하지만 남송 역시 수도를 빼앗기고 남하한 상황에서 금나라와 몽골의 공격을 길게 막아낼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수비 요충지인 강릉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으로 이런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진나라도 수차례 후량을 공격하여 강릉을 탈환하려 하였다.

하지만 배후에 있는 북조의 보호와 지방 군벌들의 반란으로 인하여 강릉을 손에 넣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후량의 병합과 수나라의 강릉 점거는 진나라 입장에서는 한마디로 종언의 카운트 다운이 아닐 수 없었다.

3. 개전

3.1. 수나라의 남정

후량을 병합한 다음해(588년), 문제는 수춘에 회남행성(淮南行省)을 설치하고 진왕(晉王) 양광을 상서령 겸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진나라 정벌을 명령했다. 양광은 장군 90명으로 구성된 50만 대군을 이끌고 남정에 나섰는데 함께 남정에 나선 진왕(秦王) 양준(楊俊) 및 양소와 각각 장강 상류와 중류, 하류에서 8개로 군을 나누어 도하했다.

양준이 행군원수(行軍元帥)가 되어 지휘하는 중류군이 양양과 한구에 주둔하면서 이 지역에 주둔한 진나라 군대가 수도를 구원하러 가지 못하게 그 길목을 차단하는 사이 양소가 형주 자사 유인은(劉仁恩)과 합류해 역으로 장강 상류에 주둔 중인 진나라 군을 한구 쪽으로 몰아넣어 포위섬멸하는 역할을 맡았다.

한편 양광은 행군원수(行軍元帥) 자격으로 본대를 이끌고 장강 하류를 건너 진나라의 수도 건강을 직접 공격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고, 남정을 건의한 고경은 양광의 원수장사로 종군하게 됐다. 양광은 한금호와 하약필에게 군사를 이끌고 건강을 직공하도록 명령했고 동시에 왕세적과 연영을 각각 좌우익으로 나누어 강서와 삼오(三吳)를 나누어 진을 포위하도록 했다. 본인은 동시에 건강을 마주보고 있는 육합(六合)에 주둔했다.

3.2. 진나라의 무능

수나라의 대군이 도하하고 있는 걸 본 진나라의 장수들이 당연히 여러 차례 장계를 올렸으나 진의 권신인 시문경은 의도적으로 이 장계가 진숙보에게 올라가는 것을 차단했다. 문제는 진숙보가 이를 알고 있었음에도 북제와 북주가 과거 침략했다가 물러간 사례를 거론하며 허풍을 떨면서 수나라의 침공을 무시했다는것. 상기한 시문경을 비롯하여 진숙보를 둘러싼 심객경 등 간신들이 이에 동조하며 전혀 대비를 하지 않았다.

더불어 양광은 수나라의 남하 경로가 진나라에 노출되지 않도록 계속하여 건강의 진나라 조정에 첩자들을 침입해 가짜 정보를 흘리며 교란해 혼란을 더 부추겼고, 진나라는 오히려 춘절을 맞이해야한다는 이유로 장강을 둘러싼 전선을 지키고 있던 영가왕(永嘉王) 진언(陳彦)과 남해왕(南海王) 진건(陳虔)을 수도 건강으로 불러들이면서 국경 방위력을 약화시키는 이해 불가능한 자해행위를 펼쳤다.

3.3. 낭미탄 전투

양소와 유은과 영안에서 수군을 이끌고 동진, 대삼협(大三峽)을 넘어 이릉과 사이에 있는 낭미탄(狼尾灘)으로 진격하는데 진나라의 장수 척흔(戚昕)이 이를 알아채고 청룡전선 백여척과 수천명의 병사를 이끌고 이를 막기 위해 출병했다. 낭미탄은 좁고 물살이 험한 곳이었기 때문에 적은 병사로도 대군을 막아내기 좋은 곳이라 수나라 입장에서는 까다로운 곳이기 때문에 척흔이 이곳에서 막아서게 되면 상황이 난감해질 수 있었다.

양소는 전략을 내어 낮에는 청룡전선을 내보내 척흔이 이끄는 진나라의 수비대와 맞대결을 펼치는 척하고, 몰래 유인은에게 강릉에서 서진하여 장강 북쪽 기슭을 따라 진나라의 요충지를 공격하게 했다. 수나라 군대의 수륙 협격에 하루만에 척흔의 수비대는 무너졌다. 척흔은 패배가 다가오자 도망쳤고 부하들은 모두 수나라 군대에 포로로 잡혔다. 양소는 포로들을 위로한 뒤 모두 석방했다.

3.4. 기정·연주 전투

낭미탄을 돌파한 양소와 유인은은 그대로 진격하여 이릉에 있는 기정·연주(歧亭·延州)에 도착했다. 진나라의 형주자사 진혜기는 휘하의 장수 여충숙(呂忠肅)과 육륜(陸倫) 등을 이곳으로 파견하여 수나라 군대의 동진을 막도록 명했다.

진나라 군대는 장강 양안에 쇠사슬 다발을 세 개 연결하여[3] 수나라 수군의 진격을 막았고, 양소는 유인은에게 이 철쇄를 지키고 있는 진나라 부대를 공격하게 했지만 여충숙은 40여 차례 전투를 벌여 이를 모두 격퇴했고 수나라는 5천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렇게 진격을 막아내는듯 했지만 결국 조정의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수나라의 물량공세를 끝까지 버텨낼 순 없었고 결국 여충숙이 이끄는 진나라 군대는 퇴각을 결정했다. 철쇄를 지키고 있던 진영을 차지한 양소는 이를 모두 해체하도록 지시한다음 여충숙을 추격했다.

도망친 여충숙은 전력의 한계를 느낀채로 연주 방어를 포기하고 형문산(荊門山)의 지세를 이용하여 수나라의 수군을 또 한번 막아냈지만, 양소는 이에 대항하여 장대가 달린 누선 4척을 만들어 진나라 전선 10여 척을 격파하고 2천여 명을 사로잡는 대승을 거뒀다. 여충숙은 결국 병력을 버리고 다시 도망칠수 밖에 없었다.

공안(公安)에서 머무르며 상황을 지켜보던 진혜기는 결국 형주 수비를 포기하고 부대를 이끌고 철수해 건강을 지원하려 했지만 한구를 막고 있던 양준이 이끄는 군대에게 딱 걸려버렸다. 이렇게 연이은 승전으로 장강 상류는 완전히 수나라가 장악하게 됐고, 중류의 진나라 군대는 양쪽을 막은 수나라 부대에 갇혀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3.5. 양광의 도하와 건강 포위

이렇게 차례차례 장강 중·상류가 수나라에게 장악되어가자 상서복야 원헌과 표기장군 소마하, 문무관료들이 협의하여 경구(京口)와 채석(採石)에 5천의 군대와 200척의 전함을 배치하여 수나라 군대에 방비할 것을 다시 주청했지만 시문경은 이를 다시 거부했다.

한편 양소의 진격에 발맞추듯 양광 역시 589년 1월, 육합을 나와 도엽산(桃葉山)으로 군을 이동시킨 뒤 강을 건너 진나라의 수도 건강을 포위할것을 명령했고 우문술, 하약필 등 휘하 장수들이 주변 요충지들을 차례차례 점거하며 외부의 지원으로부터 건강을 고립시켰다.

이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진숙보는 대신들을 소집해 명장 소마하에게 지휘권을 맡기고 호군장군 번의(樊毅)와 중령군 노광달(魯廣達)을 붙여 출정을 명한다.[4] 소마하는 건강에 대군을 집중시키고 번의에게 수군을 이끌고 백하에서 양광이 이끄는 본대를 막도록 지시했다.

3.6. 백토강 전투와 진나라의 멸망

수나라 군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소마하는 하약필이 종산(钟山)으로 이동하는 등 계속 군사를 이동하여 건강 포위망을 완성하려는 움직임을 파악한 뒤 진숙보에게 출병을 건의했지만, 진숙보는 황궁을 굳건히 지킬 것을 요구하며 이를 거부했다. 당시 건강에는 10만 대군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포위망이 완성되기 전에 병력을 움직이는 것이 옳았지만 겁에 질린 진숙보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

그 사이 하약필군은 종산을 넘어 백토강(白土岡)에 주둔하는데 성공하고, 우문술은 백하에서 진나라의 수군을 격파하고 석두성(石頭城)을 점령하면서 포위망을 완성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3일 뒤 진숙보가 갑자기 마음을 바꿔 무리하게 출전 명령을 내렸다. 너무나 시기가 맞지 않은 결정이었다.

이미 타이밍을 놓쳤지만 울며 겨자먹기로 나선 진군의 마지막 공세가 시작됐는데, 백토강에서 이들과 마주친 수나라의 하약필은 갑사 8천기를 동원한 기만 전술을 사용해 4번 연속으로 패배하는 척 후퇴하며 진군을 끌어들였고, 진의 본군이 여기에 넘어오자 반격을 가해 상대 5천명을 전사시키고 승리를 거뒀다. 이때 소마하를 비롯한 진군의 수뇌부 다수를 포로로 잡는 대성과를 거뒀다.

승리를 거둔 하약필군은 기세를 몰아 건강의 낙유원(樂游苑)까지 몰아닥쳤고, 진의 멸망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진숙보는 측근 10여 명을 데리고 경양전을 나와 우물에 뛰어들려고 하자 후각사인 하후공운이 막았으나 진숙보는 기어이 우물에 들어가 숨었다.

궁성으로 진입한 수나라 군사들이 우물을 살펴보고 불렀으나 대답이 없자 돌을 던지려고 했는데 맞아죽을까 당황한 진숙보는 자신이 있음을 알리는 추태를 부렸다. 결국 수나라 군사들이 진숙보를 새끼줄로 끌어 올렸으며 진숙보는 하약필을 보자 무서워 식은땀을 흘리고 벌벌 떨면서 연거푸 절을 했다. 이렇게 어이없게도 진나라가 멸망을 맞이하고 말았다.

4. 후일담

건강이 수나라 손에 떨어진 이후 589년 1월 22일 총사령관인 진왕 양광이 건강으로 입성했다. 양광은 진숙보에게 형주에 잔존한 진나라 군대에게 항복할 것을 명하라고 요구했고 진숙보는 이에 따라 항복 명령을 내렸다. 형주에 고립된 채 저항하던 진혜기와 주나후에게 진숙보의 항복 명령이 전달되자 곡을 하고 군사를 해산시킨 후에 양양 및 한구에 주둔중이던 양준에게 가서 항복했다.

양광은 군을 남하시켜 삼오 등에서 저항하는 진나라 잔존 세력을 토벌하면서 후속 작업을 마무리했다. 실제로 당시 명목상 진의 세력권에 속해있던 영남(嶺南) 지역은 실질적으로는 이민족 수령 선부인(冼夫人)이 통치하고 있었는데, 수나라 군대가 쉽게 진입하지 못해 양광이 다시 한번 진숙보를 압박했고 항복을 요구하는 서찰이 선부인에게 전해진 이후에야 이 지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렇게 진나라를 멸망시키면서 조위의 건국 시점인 220년을 기준으로 369년, 후한 시절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 184년을 기준으로는 무려 405년만에 위진남북조 시대가 막을 내리고 중국이 다시 하나가 되었다. 수 문제를 이렇게 확장된 영토를 다스리며 제도를 정비했으며 과거 제도의 전신인 선거제를 통해 수나라를 중앙집권국가로 발전시키는 업적을 세웠고, 이 시기를 개황의 치(開皇之治)라 부르게 됐다.

이렇게만 보면 수나라 입장에서는 해피엔딩이겠지만, 진나라 멸망의 공훈을 세운 것이 바로 진왕 양광이었고, 그가 이후 황태자 지위를 빼앗은 뒤 즉위하여 악명 높은 수양제가 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아이러니한 부분.


[1] 수멸진지전[2] 물론 이때 고구려와 접경하게 되지만, 고구려와의 본격적인 갈등이 시작되는 건 남북조 통일 이후로 아직은 수나라에 있어서는 안원왕 시기 이후 이어진 혼란을 겨우 수습하고 있던 고구려는 우선 순위인 위협 세력이 아니었다.[3] 오멸망전 때도 오나라의 건평태수 오언이 쇠사슬과 쇠말뚝으로 강을 막는 진을 쳤던 점을 고려하면 유래 깊은 수비 방식이다.[4] 이 와중에 시문경을 감군으로 삼는 병크도 같이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