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330? ~ 1387.01.22.Çandarlı Kara Halil Hayreddin Paşa. 1364년부터 1387년까지 오스만 제국의 재상을 지낸 인물. 역대 재상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재임했다.
2. 생애
카라만 베이국 출신으로, 이즈니크에 있는 마드라사에서 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기간 동안 마드라사의 교사 가운데 한 명인 타제딘 쿠르디(Tâceddin Kurdî)의 사위가 되었으며, 그로써 셰이크 에데바리(Sheikh Edebali)의 처남이 되었다. 그리고 에데바리는 오스만 1세의 장인이기도 했으므로, 이 결혼으로 오스만 황실의 인척이 되었다.이후 오르한 재위 기간에 이즈니크의 재판관을 거쳐 부르사의 재판관이 되었는데, 이즈니크는 몇 년 동안 잠시 오스만의 수도였던 곳이고 부르사는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기 이전까지 에디르네와 함께 오스만의 공동 수도였던 곳이니 지위는 높지 않지만 나름대로 중요한 자리를 역임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1362년에 무라드 1세가 즉위한 이후에는 무라드가 새로 창설한 카자스케르(Kazasker) 직에 올랐는데, 이 자리는 직역하면 "군사 재판관" 이지만 실제로는 현대의 대법원장 겸 법무장관 쯤 되는 자리였다[1].
재상이 된 이후로는 동남부 유럽에서 오스만의 영토를 넓히는 정복 활동에 직접 참여하여 군을 이끌었는데, 무라드 1세는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주로 머물렀으므로[2] 사실상 총사령관 역할을 한 것이다.
1387년에 향년 56세나 57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재상직은 아들인 찬다를르 알리 파샤가 이었다.
3. 기타
지명도가 그다지 높지는 않으나, 오스만 제국 역사상 꽤나 중요한 인물이다.먼저, 그를 계기로 재상직의 성격 자체가 변화했다. 이전까지 재상은 군사를 직접 이끈 적이 없고 행정 업무만 담당했으며, 그 때문에 재상 자체가 최고 행정관 이상은 아니었다. 반면 찬다를르 카라 할릴 하이렛딘 파샤는 역대 재상들 가운데 처음으로 군을 지휘했으며, 이로 인해 재상은 최고 행정관인 동시에 황제 바로 다음 가는 군사령관으로도 여겨지게 되었다. 실제로 이후 재상들은 황제가 친정을 할 경우 부사령관을 맡고 황제가 황궁에 머물 때는 총사령관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당연시되었으며, 이는 수백 년 뒤인 19세기에 탄지마트 개혁이 이루어져 다른 유럽 국가의 수상 비슷한 것으로 변화할 때까지 유지된다.
또한 예니체리 군단을 창설하는 아이디어를 입안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예니체리 자체는 선제 오르한 때부터 있었다고도 전해지지만, 전쟁 포로가 아니라 기독교도 소년들을 징집하도록 제안함으로써 데브시르메 제도를 완성한 것이 그의 업적이라고 전해진다. 데브시르메는 이후 무라드 2세 때 예니체리 뿐 아니라 관료들도 선발하도록 하는 등 확장되면서 3백여년 이상 유지되었다가 18세기 초에 폐지된다.
세 번째로, 찬다를르 카라 할릴 하이렛딘 파샤를 시작으로 찬다를르 가문의 시대가 시작된다. 찬다를르 가문은 이 이후로도 찬다를르 알리 파샤(재임: 1387~1406), 대(大) 찬다를르 이브라힘 파샤 (1421~1429), 찬다를르 할릴 파샤 (1439~1453), 소(小) 찬다를르 이브라힘 파샤 (1498~1499) 등 네 명의 재상을 더 배출했으며, 특히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기 이전까지는 황제도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의 권세를 자랑했다[3].
끝으로, 대(大)재상이라고 불린 최초의 재상이다. 오스만 제국은 한국사의 고려가 왕씨 가문 혼자서 이룩한 것이 아니라 여러 지방 세력가들의 도움을 받아서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스만 가문 혼자서 일으킨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집단과 대략 성직자들과 학자들인 일미예 집단들의 도움을 받아 발전할 수 있었던 나라였다. 이 때문에 유력한 가지들과 일미예들에게 재상직을 주어야 했고, 그로 인해 재상이 여러 명이었다. 대재상이라고 함은 여러 재상들 중에서도 우두머리라는 것. 이후 대재상 직은 1922년에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이어지게 된다.
[1] 1480년에는 제국의 영토가 계속 넓어짐에 따라 담당 구역을 나누어서 정원이 두 명이 되었지만, 이건 아직 백 년 뒤의 일이다.[2] 당시 오스만령 아나톨리아 반도와 오스만령 유럽 사이에 비잔틴 제국 영토가 끼어 있는 형국이어서 사실상 영토가 둘로 나뉘어 있는 격이었으며, 이래서 부르사와 함께 에디르네를 공동 수도로 삼아야 했다. 현대 대한민국의 도에 해당하는 최상위 지방행정구역인 에야레트(Eyalet)도 국토가 사실상 둘로 쪼개져 있는 상태에서 술탄이 아나톨리아를 맡고 유럽 전체를 하나로 묶어서 따로 관리하려 한 데에서 출발했다.[3] 실제로 가지들과 일미예들의 대표자에서 벗어나 전제군주가 되고 싶었던 메메드 2세는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이후 찬다를르 할릴 파샤를 처형하여 찬다를르 가문의 시대가 끝났음을 선포해야 했다. 이로써 찬다를르 할릴 파샤는 처형을 당한 최초의 재상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