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 ~ ?Zağanos Paşa. 1453년부터 1456년까지 오스만 제국의 재상을 지낸 인물이며, 왕자였던 시절부터 재위기간 초기에 이르기까지 메메드 2세의 최측근이자 조언자였다.
2. 초기 생애와 콘스탄티노플 정복
알바니아 출신으로, 일부 사료에는 귀족 출신이라고도 하고 또 다른 사료에는 알바니아가 아니라 세르비아나 그리스계라고도 하지만 분명하지 않다. 데브시르메 제도로 징집되어 예니체리가 되었고, 군단 내에서 승진을 계속하여 1444년에 무라드 2세가 퇴위하고 메메드 2세가 즉위했을 때 부재상에 임명되는 한편 무라드의 딸 가운데 하나인 파트마 술탄과 혼인하여 부마가 되었다.1446년에 메메드 2세가 폐위당하고 무라드 2세가 즉위하자 메메드는 마니사의 총독으로 보내졌는데, 자아노스도 부재상 직에서 해임되어 메메드의 보좌역으로서 마니사로 함께 보내졌다. 이 때 자아노스는 메메드의 최측근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스승을 뜻하는 라라(lala)라는 칭호를 받았다. 하지만 다른 사료에서는 겔리볼루 총독 겸 해군 총사령관을 지냈다고도 하고, 무라드에 의해 아예 파직되어 아나톨리아 반도 서부의 발르케시르라는 도시로 이주했다고도 한다.
1451년에 무라드 2세가 승하함에 따라 복위한 메메드 2세는 당시 재상이었던 찬다를르 할릴 파샤를 그대로 재상으로 삼았으나, 자아노스 파샤를 부재상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당시에 이미 메메드의 최측근이었던 자아노스는 자신의 지위에 만족하지 않아, 할릴 파샤와 불화를 자주 빚었다고 한다.
이어진 콘스탄티노플 함락에서 자아노스 파샤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는데, 먼저 공방전 1년 전인 1452년에 루멜리 히사르 건축을 찬다를르 할릴 파샤, 사르자 파샤와 함께 지휘, 감독했다. 이 요새는 공방전을 준비하는 작업 가운데 하나였으며, 메메드는 이 세 대신의 공적을 인정하여 요새의 가장 큰 탑 셋에 각 대신의 이름을 붙였다.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도중에 자아노스 파샤는 포위를 풀고 퇴각해야 한다는 할릴 파샤의 주장에 맞서 공격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가장 대표적인 관료였으며, 공방전 도중에 신하국인 세르비아 공국의 광부들을 징집해서 성벽 아래로 굴을 파서 화약을 터뜨리는 공병 부대가 만들어졌을 때는 그 지휘를 맡기도 했다[1]. 또 공방전의 마지막 날에 오스만의 군기를 들고 성벽을 올라 도시를 함락하는 데 큰 공을 세운 것으로 알려진 울루바틀르 하산[2]이 자아노스가 지휘하는 부대 소속이었다고 한다.
공방전 이후 할릴 파샤가 비잔틴 제국과 내통한 혐의로 체포, 처형되자, 그 뒤를 이어 재상에 임명되었다.
3. 후기 생애
콘스탄티노플 정복 3년 뒤인 1456년, 메메드 2세는 오늘날에는 세르비아의 수도지만 당시에는 헝가리 남부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요새였던 베오그라드 공격에 친히 나섰다. 오스만 제국의 입장에서 베오그라드는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오스만 제국의 확장을 최전선에서 막아내고 있는 나라 가운데 하나인 헝가리의 당시 수도 부다로 바로 진격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곳이었지만, 헝가리의 섭정이었던 후녀디 야노시가 친히 이끄는 수비군에 막혀 퇴각해야 했다. 그리고 메메드는 베오그라드 정복에 실패한 책임을 당시 재상이었던 자아노스 파샤에게 물었으며, 그를 재상직에서 해임하고 발르케시르로 추방했다. 하지만 빈털터리로 쫓아내지는 않고 상당한 재산을 보장해 주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자아노스는 이후 발르케시르에 모스크와 무료 급식소, 마드라사, 목욕탕 등을 건설하는 등 도시를 크게 발전시켰다.그 후 자아노스의 생애는 사료마다 조금씩 다르다. 그 가운데 하나에 따르면 1459년에 다시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와 1463년에는 해군 총사령관에 임명되고, 1466년에는 그리스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또는 1461년에 트라페준타 제국을 정복하는 데 참가했다고도 하는데, 이후 1462년에 발르케시르에서 세상을 떠났다고도 하는 한편 1467년부터 1469년까지 트라브존 총독을 지냈다고도 한다.
4. 기타
메메드 2세 치세 전반기의 주요 인물 가운데 한 명인 동시에, 데브시르메 징집자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재상에까지 오른 인물이기도 하다. 데브시르메는 무라드 1세 때 예니체리를 징집하는 제도로서 처음으로 생기고 무라드 2세 때 이 제도로 예니체리 뿐 아니라 관료까지 징집하도록 하는 등 계속 발전했지만 재상을 내는 데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는데[3], 자아노스 파샤를 시작으로 투르크계가 재상직을 독점하다시피 하던 시대가 끝나고 데브시르메 징집자 출신들이 재상직에 다수 오르는 시대가 시작된다.[1] 이후 이 공병 부대는 라음즈 오자으(Lağımcı Ocağı)라는 이름으로 오스만 제국군 포병대 산하 부대로서 공식적으로 창설되며, 공성전을 벌일 때 대포를 쏘는 한편 굴을 파는 것은 기본적인 공성 전법으로 자리잡는다.[2] 평범한 시파히 병사였으나 공방전 마지막 날 군기를 들고 성벽을 올라 성루에 깃발을 꽂았으며, 화살 수십 대를 맞으면서도 동료 병사들 십수 명이 올라올 때까지 버텨냈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오늘날에는 실존 인물로서보다 전설상의 인물처럼 다루어지는 면도 있으며, 현대 터키에서 만든 정복자 1453이라는 영화에서는 일개 병사가 아니라 메메드 2세의 최측근인 고위 인사처럼 묘사된다.[3] 비(非)투르크계로서 재상에 오른 최초의 사례는 메메드 1세의 최측근이었으며 무라드 2세 재위 초까지 재상을 지냈던 바예지드 파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