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7 10:35:59

찰스 폰지

<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찰스 폰지
Charles Ponzi
파일:10000019876.jpg
본명 카를로 피에트로 조반니 굴리엘모 테발도 폰지
Carlo Pietro Giovanni Guglielmo Tebaldo Ponzi
출생 1882년 3월 3일
이탈리아 왕국 에밀리아로마냐주 라벤나현 루고
사망 1949년 1월 18일 (향년 66세)
브라질 합중국 리우데자네이루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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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틀:국기|]][[틀:국기|]]
직업 금융인
학력 로마 사피엔차 대학교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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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금융인. 폰지사기의 어원이 된 인물이다.

2. 생애

에밀리아로마냐주 루고 출신으로 어린 시절 가세가 기울어 집배원일을 시작했다. 로마 사피엔차 대학교에 진학했으나 부유층 학생들과 같이 음주, 카페등 유흥에 써서 빈털털이가 되었다. 졸업 후 가족의 권유로 1903년 미국행을 택했다. 하지만 배안에서 도박을 벌이다가 2.5달러밖에 남지 않았다.

이후 매사추세츠 인근에서 여러일을 전전하다가 한 식당에서 설거지 담당으로 정착했다. 이후 웨이터로 승격했으나 거스름돈 문제로 인해 해고되었다.

캐나다 몬트리올로 건너가 신장개업한 자로시 은행의 은행원으로 취직했다. 자로시 은행은 고객 유치를 위해 예금 이자가 파격적으로 높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이자는 은행의 이자 수익이 아니라 신규 가입자의 예금에서 땜빵하는 방식으로 지급되고 있었다. 게다가 부동산 부실 대출까지 저질렀던 은행은 끝내 망해버렸고, 은행장은 돈을 가지고 멕시코로 도망쳤다가 추후 수표위조로 발각, 체포되어 징역 3년에 처해졌다. 찰스 폰지는 바로 곁에서 이러한 광경을 생생하게 보고서는 '망하기 전에 쌓인 돈을 갖고 튀어버리면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폰지사기 수법을 착안한다.

건수를 노리던 폰지 앞에 나타난 것은 국제반신우표권(IRC)라는 회신 쿠폰이었다. 이 쿠폰은 우편 발송인이 수취인의 답신 요금을 면제할 수 있는 우표권으로, 만국우편연합에 가입한 국가라면 어디서든 우표로 교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옛날에는 정보망이 느리고 부실해서 같은 IRC가 로마에선 1달러, 보스턴에선 3.3달러 하는 식으로 지역에 따라 가격이 크게 달랐다. 그래서 폰지는 국내의 돈으로 해외의 우표를 사서 바꾸는 차익거래를 통해 돈을 번다는 포트폴리오로 투자자를 모집했다. 그러나 애초부터 사기를 칠 생각이었던 폰지는 이 사업을 진심으로 진행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단지 투자자들을 끌어모으기 위한 그럴싸하게 보이는 사업 아이템이 필요한 것뿐이었다.[1] 그는 신규 투자자들에게서 모은 돈으로 기존 투자자들에게 배당을 지급하면서 사업을 불려 나갔다. 나중에는 폰지의 이름이 유명해져서, 투자자들이 수익을 얻지 못하면서도 계속 소문을 듣고 폰지에게 투자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폰지는 이 돈을 가지고 그럴듯한 회사 사무실을 차리고 지점까지 냈으며, 자신은 고급 별장과 차를 사고 여가도 즐겼다. 한 번은 메사추세츠 주 정부로부터 조사를 받기도 했으나 로비를 벌여 범행을 무마하였고, 투자자로부터 소송을 당했을 때에는 변호사를 동원해 승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1919년, 폰지가 사기를 시작할 당시 조셉 대니얼스(Joseph Daniels)라는 한 가구 회사 사원에게 230달러어치의 가구와 회사 설립 자금 200달러를 빌려 쓴 것이 문제가 되어 돌아왔다. 사실 이 부분에서만큼은 희대의 사기꾼인 폰지도 가구 회사 사원을 상대로 대출 사기를 저지르지는 않았으나, 문제는 폰지가 세간에 유명해질 정도로 성공하고 엄청난 영업이익이 발생하자 조셉 대니엘스 측에서 "단순한 대출이 아니었으며, 자신은 자본을 제공했고 폰지는 사업 파트너였다"고 주장하며 폰지에게 수익을 배분하라는 내용의 소송을 제기한 것이었다. 이 소송은 일대 뉴스거리가 되었으며, 겁에 질려 돈을 되찾으려는 투자자와 취재진이 몰려들었다. 폰지는 자신은 전혀 두려울 것이 없다고 호언장담하며 모든 사실을 떳떳하게 밝힐 수 있다고 투자자들을 안심시켰으나, 법원에서는 조사를 위해서 폰지의 회사에 영업 중지 명령을 내렸다. 이를 시작으로 기자들이 폰지의 사업 구조를 뜯어보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1920년 7월 《보스턴 포스트(Boston Post)》지가 대대적으로 폰지의 악행을 고발한 것을 시작으로, 결국 사기가 들통난 그는 같은 해 연방법원에 기소되어 우편 사기죄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구속되었으며, 이어서 매사추세츠주 법원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고는 즉시 상고하였다. 이후 추가 죄목으로 3건의 각기 다른 재판을 진행하다 1925년 연방법원에서 선고받은 형이 만기로 풀려나자 석방된 상태로 재판을 진행하면서 플로리다주로 이사했다. 거기서 플로리다 부동산 거품에 편승하여 또다른 사기를 시도하다 적발되었으며, 도주하다 항구에서 붙잡혀 1927년부터 1933년까지 다시 복역하였다. 그의 사기로 인해 하노버 신탁 은행을 포함한 5개 이상의 은행이 도산하는 등 막대한 여파가 발생했으며, 총 투자손실은 약 2천만 달러(현재 가치로 약 2억 2,500만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피해자들이 회수한 금액은 1달러당 30센트 미만이었다.

그는 1933년 추방되어 모국인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추방당하고도 자잘한 사기를 쳤으나 이후로는 워낙 그의 이름이 유명해져 별 소득이 없었고, 1939년브라질로 이주하여 이탈리아계 항공사에 취직하는데 성공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브라질이 연합국 편을 드는 바람에 항공사가 폐업하여 실직했다. 이후 간간히 번역일을 하며 가난하게 살다가 심장마비부터 실명, 뇌출혈로 반신불수가 되는 등 온갖 질병에 시달리며 1949년 사망했다.


[1] 반신우표권 거래로 이득을 보기 위해서는 투자자가 한 명씩 늘어날수록 융통해야 할 반신우표권의 물량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므로 차익거래로 돈을 번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사업 구상이었다. 애초에 지역별로 가격의 차이가 발생한 것 자체가 당시의 이와 같은 기술적 문제 때문이다. 무위험에 가까운 차익거래가 성공할 가능성이 높을수록, 가격이 벌어지면 차익거래를 시도하는 거래가 늘어나면서 가격차가 빠르게 좁혀지게 된다는 점을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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