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티베트 침공의 일부 | |
메콩강을 건너는 중국 인민해방군 병사들의 모습 | |
날짜 | |
1950년 10월 6일 ~ 1950년 10월 24일 | |
장소 | |
티베트 창두시 | |
교전국 | |
[[틀:깃발| | ]][[틀:깃발| ]][[중화인민공화국| ]]|
지휘관 |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왕치밍| ]] [[틀:깃발| ]][[틀:깃발| ]][[허커취안| ]] | ]][[틀:깃발| ]][[장궈화| ]] 응아포 은왕 직메 키춘 다로니 |
전력 | |
병사 약 4만 명 | 병사 약 8천 명 |
결과 | |
중화인민공화국의 승리 | |
피해규모 | |
700명 전사 | 3,000명 이상 전사 5,000명 포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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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창두 전투(昌都战役)는 1950년 10월 6일부터 10월 24일까지 중국 인민해방군이 티베트의 창두(현재 티베트 자치구의 일부)를 점령함으로서 티베트군의 상당수가 포로로 잡히거나 궤멸되었고, 티베트는 더 이상 유의미한 군사적 저항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2. 배경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새로 구성된 중국 정부는 티베트를 중국 영토의 일부로 간주하며 통합 정책을 추진했다. 당시 티베트는 실질적으로 독립적인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국제적으로는 독립국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중국은 티베트를 재통합하려는 야망을 드러냈고, 티베트 지도부는 국제사회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실질적인 지원을 받지 못했다. 1950년 6월, 중국은 티베트에 "평화적 협상"을 제안했지만, 티베트 지도부가 이를 거부하면서 중국은 전쟁으로 티베트를 합병하기로 결정한다.3. 진행
중국 인민해방군은 제18군과 제52군을 동원해 티베트 동부 지역으로 진군했다. 병력은 주로 쓰촨성과 칭하이성에서 접근하여 티베트를 포위했다. 작전 목표는 창두를 점령하고, 티베트의 협상 여건을 강제적으로 조성하는 것이었다.1950년 10월 6일, 중국인민해방군은 창두 주변 지역으로 진격하며 티베트군과 교전을 시작했다. 티베트군은 약 8,000명으로, 장비와 훈련에서 열세였으며, 산악 지형에 의존해 방어를 시도했다. 그러나 중국도 티베트의 험준한 산악지형을 잘 알고 있었기에 사전에 보급과 장비 준비를 열심히 했다.
인민해방군은 약 18일간의 전투 끝에 창두를 점령했다. 티베트 총사령관인 응아포 은왕 직메(Ngapo Ngawang Jigme)는 더이상의 저항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하여 항복했다. 창두 전투에서의 패배로 티베트군은 사실상 와해되어 티베트 지도부는 군사적 대응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중국과의 협상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