蔡東鮮
1901년 6월 11일 ~ 1953년 2월 2일
1. 개요
음악적 재능이라는 꽃을 완전히 피우지 못하고 타계한 음악가
대한민국의 음악가이다. 본관은 평강(平康)[1].2. 생애
1901년 6월 11일 전라남도 낙안군 고하면 세망리(현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벌교2리 세망마을)[2]의 만석꾼 집안에서 아버지 채중현(蔡重鉉)[3]과 어머니 성주 배씨 배홍심(裵弘深)[4] 사이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보통의 사람들보다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다.그러나 유복하고 편안하였던 그의 인생은 그가 고등학생이 된 후 변화하기 시작했다. 더 나은 교육을 위해 채동선은 서울로 올라가 현재는 경기고등학교로 이름이 바뀐 경성제1고등보통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19년 3.1 운동이 발생함에 따라 채동선은 만세 운동을 매우 열렬하게 하였고, 이러한 그의 행적은 일본경찰의 감시라는 낙인을 주었다. 그 후 일본에 회의감을 느끼며 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게 된다. 이후 서양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된 채동선은 베를린 음악대학교에서 음악 공부를 계속하였다.
2.1. 음악가로서
채동선은 생애 순수 가곡 및 민족음악 제작에 몰두하였다. 대표적으로 그의 작품인 〈고향〉 외에 〈향수〉, 〈망향〉[5], 〈모란이 피기까지〉, 〈바다〉 등이 있고, 합창곡 〈또 다른 하늘〉, 교향곡 〈조국〉, 〈한강〉, 〈현악 4중주곡 제1번〉, 〈현악 4중주곡〉, 〈바이올린 소나타〉, 〈현악 모음곡〉 등이 있다.그가 독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처음으로 만든 가곡이 바로 정지용 시인의 시를 가곡화해 만든 "'고향"'이다.[6]
그렇게 일본의 착취와 폭력은 지속되었고, 채동선은 이러한 현실에 대하여 매우 분했고 안타까워했다. 채동선은 일제강점기 당시에 동료 음악가들과 사이가 우호적이지 못하였는데, 이는 친일 행위와 연관성이 있다. 채동선이 일제강점기 시절 다른 음악가들과 다르게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이유는 홍난파 등 당대의 유명한 음악가들은 일본에 대해 우호적인 노래 가사 및 노래 작곡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들과 달리 끝까지 친일 운동을 거부하였던 채동선은 광복절까지 창씨 개명과 친일 노래 작곡을 거부하였다. 해방 이후에 그는 이념적 성향으로 인해 다시 한번 동료 음악가들과 마찰이 있었다.[7] 한국 전쟁 동안 피난길에 오른 그는 그의 병환이 깊어져서 1953년 2월 2일, 51세로 타계했다. 그의 작품은 향후 이은상에 의해 부활하게 되었다.
씁쓸하게도 90년대 월간 객석이란 클래식 음악잡지에서는 친일파 음악가들을 옹호하면서 채동선이 부자라서 친일하지 않았다고 먹고 살기위해 친일을 했다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1] 22세 동(東) 항렬.[2] 출생지인 벌교읍 벌교리에 생가와 그의 이름을 딴 도로인 채동선로, 채동선음악당이 있다.[3] 족보명 채병영(蔡柄永).[4] 배석원(裵碩源)의 딸이다.[5] 1980년에 출판된 《채동선작곡집》에 수록된 〈망향〉이 가장 애창된다.[6] 우리가 알던 정지용 시인의 고향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일제강점기 동안 더욱 처량하고 피폐해진 조국을 본 채동선의 마음이였을까 싶다.[7] 태생적으로 부유한 집안 출신이라 김순남같은 좌익 음악가들과 마찰이 있을수밖에 없었고, 같은 우익 음악가들이라 해도 태반이 친일전력이 있던 자들이라 그들과도 마찰이 있을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