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11-14 15:25:15

채세현

파일:채세현.png
1919년, 경성감옥에서 촬영된 사진.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원보(元甫) / 소은(素隱)
본관 인천 채씨[1]
출생 1890년 10월 24일[2]
경상도 함창현 수하면 소암리
(現 경상북도 상주시 이안면 소암리[3] 298번지[4])
사망 1949년 6월 5일[5] (향년 58세)
묘소 경상북도 상주시 이안면 소암리
상훈 대통령표창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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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90년 10월 24일 경상도 함창현 수하면 소암리(現 경상북도 상주시 이안면 소암리 298번지)의 양반가에서 아버지 채기상(蔡基祥, 1866 ~ 1897. 1. 29)과 어머니 전주 이씨[6] 사이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고향인 상주군 이안면 소암리의 마을 유지로서 농업에 종사하던 중 1919년 3월 29일 오후 10시 11촌 지간의 족질(族姪) 채순만(蔡淳萬, 1901. 2. 9 ~ ?)[7] 등과 함께 인천 채씨 일가의 청년 20여 명을 모아 마을 남쪽 제방 위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펼치다가 자진 해산했다.

이후 뒤늦게 이 사실이 일본 경찰에 알려졌고, 곧 채순만 등과 함께 주동 인물로 검거되었다. 그리고 1919년 5월 1일[8] 대구지방법원 상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개월형을 선고받고 선고 당일 경성감옥에 투옥되어 옥고를 치렀다.

같은 해 12월 25일 가출옥한 후에는 은거하다가 1949년 6월 5일 별세했다.

1992년 8월 15일 광복절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

[1] 소감공파(少監公派)-인천군 종파(仁川君宗派) 29세 현(鉉) 항렬.[2] 1919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3월 23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3] 인천 채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채기중도 이 마을 출신이다.[4] 1913년 작성된 지적원도에 따르면, 이 지번의 필지는 1913년 3월 26일 토지조사사업 당시 채세현의 9촌 삼종숙(三從叔) 채기일(蔡基一, 1862. 1. 6 ~ 1939. 11. 13)의 소유가 되었다. 이후 이 지번은 298-1, 298-2번지, 298-3번지로 분리되었다. 298-1번지는 1980년 3월 14일 채순태(1921. 2. 21 ~ )에 의해 소유권보존등기가 이뤄졌고, 1994년 7월 29일 채윤식(1954. 8. 22 ~ )에게로 소유권이 이전되어 현재에 이른다. 298-2번지는 1980년 6월 25일 채세현의 장손자 채충식(蔡忠植, 1941. 3. 1 ~ )에 의해 소유권보존등기가 이뤄졌고, 2010년 2월 11일 채충식의 차남 채병욱(蔡炳旭, 1968. 4. 18 ~ )에게로 소유권이 이전되었다가 2011년 8월 4일 채충식의 조카 채기원(蔡起源, 1981. 8. 15 ~ )에게로 소유권이 이전돼 현재에 이른다. 298-3번지는 1985년 5월 3일 채기일의 장증손자 채원식(蔡源植, 1928. 10. 28 ~ 1989. 4. 27)에게로 명의가 변경되었고, 1985년 5월 23일 채원식에 의해 소유권보존등기가 이뤄졌다. 2006년 7월 21일 채원식의 장남 채희수(蔡熙洙, 1950. 3. 28 ~ )에게로 소유권이 이전되었고, 2021년 4월 9일 채희수의 15촌 족숙(族叔) 채일근(蔡一根, 1961. 6. 30 ~ )에게로 소유권이 이전돼 현재에 이른다.[5] 인천채씨족보 4권 634쪽에는 1950년 12월 10일 별세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6] 이동진(李東鎭)의 딸이다.[7] 채세현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蔡淳滿으로 기재되어 있다. 1919년 4월 30일 대구지방법원 상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8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6.25 전쟁 때 집을 나갔다가 행방불명되었다.[8] 채세현의 독립유공자 공훈록, 1919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참조. 1919년 4월 30일 수형인명부에는 4월 30일로 기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