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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은국

파일:채은국(1934년).png
1934년 12월 26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채풍운(蔡風雲), 중화혈판(中和血判)[1]
채풍운사(蔡風雲事)
출생 1903년 12월 19일
평안남도 중화군 칭천면 대기암동
(현 평양시 강남군 상암리)
사망 1937년 이후 (향년 34세 이후)
사망지 미상
본관 인천 채씨[2]
가족 배우자 반남 박씨, 장남 채명신, 차남 채명세
장인 박진준

1. 개요2. 생애3. 여담

1. 개요

대한민국독립운동가, 아나키스트. 예비역 대한민국 육군 중장으로 제3대 감찰위원장 및 제12대 제2야전군사령관을 지낸 채명신은 그의 장남이다.

2. 생애

1903년 12월 19일 평안남도 중화군 칭천면 대기암동(현 평양시 강남군 상암리)에서 아버지 채순구(蔡淳龜)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박진준(朴鎭俊)[3]의 딸 반남 박씨(1900.12.23. ~ ?)과 결혼하여 슬하에 채명신과 채명세(蔡命世, 1929.3.6. ~ 1952.7.13.) 등 두 아들을 두었다.

일찍이 장인 박진준을 따라 장로교를 믿었고, 장인이 건립을 주도한 대기암교회(大奇岩敎會)에 자주 출석하여 예배를 드렸다.[4] 1920년 이후 동아일보사 황주지국 흑교(黑橋)분국에 기자로 입사하였으나 1925년 6월 개인 사정으로 사직하였다.[5]

이후 아나키즘에 심취하게 되었고, 평양부에서 아나키즘 단체인 관서흑우회(關西黑友會)에 가입하여 간부로 활동하였다. 1929년 11월 평양부에서 다른 회원들과 함께 전조선흑색사회운동자대회를 개최하고자 하였으나, 평양경찰서 고등계에 검속되었고 이어 대동경찰서로 이송되었다. 그곳에서 일본 제국 경찰로부터 함께 구금되어 있던 유림과 관서흑우회원 사이에 모종의 관련성을 취조받았으나, 11월 18, 19일에 최갑룡(崔甲龍)·조건(趙建) 등과 함께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6]

1930년대 들어 이정규(李丁奎) 등과 함께 무정부주의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조직원들과 직·간접적으로 연락하며 무정부주의를 연구하였다.[7] 또한 무정부주의 관련 잡지를 발간하기 위하여 경기도 경성부와 지방 각지로부터 자금을 조달하고자 계획하였는데, 이것이 일본 제국 경찰에 탐지되었다. 이로 인해 1934년 11월 27일 경성부 종로경찰서에 자수하였고, 최학주(崔學柱)·이정규·이을규(李乙奎)·오남기(吳南基) 등과 함께 12월 6일 오전 10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다.[8] 12월 17일 오후 5시 이정규와 함께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유죄로 기소되어 경성지방법원 예심에 회부되었다.[9]

1936년 4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미결 구류일수 250일 통산)[10]을 선고받아[11] 이튿날인 4월 8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7년 7월 31일 출옥하였다.[12] 이후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 강선리[13]로 이주하였다.[14]

이후의 행적 및 사망년월일은 자료가 미비하여 알 수 없다.

3. 여담

  •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은 기록[15]이 남아 있으나, 정작 기록에 판결 날짜와 주문(注文)이 적혀 있지 않아 언제 재판을 받은 것인지, 무슨 사건으로 어떤 판결을 받았는지 알 수 없다.

[1] #[2] 세마공파(洗馬公派) 30세 국(國) 항렬.[3] #. 박승일(朴承日)이라고도 한다.[4] 1925년 1월 11일 시대일보 기사[5] 1925년 6월 26일 동아일보 기사[6] 1929년 11월 21일 중외일보 기사[7] 1934년 12월 7일 동아일보 기사[8] #[9] 1934년 12월 19일 동아일보 기사. 함께 송치되었던 최학주와 이을규, 오남기는 불기소처분을 받아 방면되었다.[10] 1936년 4월 8일 동아일보 기사[11] #[12] 채은국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13]남포시 천리마구역 강철동[14] 광주지방법원 형사사건부[15] 광주지방법원 형사사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