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3-15 07:04:27

천안문광장

파일:attachment/천안문광장/1.jpg
천안문에 올라가서 내려다본 모습

파일:attachment/천안문광장/2.jpg

1. 개요2. 역사3. 상세4. 현대 천안문의 모습5. 관련 사건

1. 개요

天安门广场 / Tiananmen Square[1]

중국 베이징 자금성 천안문 앞에 조성된, 세계 최대 규모의 광장이다. 베이징 지하철 1호선 톈안먼시역, 톈안먼둥역 등에서 내리면 된다.

2. 역사

천안문광장 자리는 명나라 영락제베이징 성을 건설하면서 어도(御道)가 설치되었던 공간이다. 당시의 어도는 내성의 정남문인 정양문과 황성의 정문인 천안문 사이에 있었으며 주변을 담장으로 둘러 일반인의 출입을 금했다. 이 때문에 내성의 동서 교통에 큰 불편을 초래했다. 정양문과 천안문 사이에는 대명문(大明門)이, 천안문 좌우에는 각각 장안우문(長安右門)과 장안좌문(長安左門)이 있었다. 청나라 때는 대명문을 대청문(大淸門)으로 개칭했고, 중화민국이 성립하자 대청문을 중화문(中華門)으로 다시 개칭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고 베이징 도심을 개발할 때 천안문 이남의 어도와 중화문, 장안우문, 장안좌문 등을 모두 철거하고 그 자리에 광장을 조성했다.

천안문 자체도 그동안 많이 손상된 것을 1960년대에 완전히 헐고 단 200일만에 새로 지었다. 그것도 17세기부터 20세기까지, 개건 및 보수에 들어간 자재는 모조리 빼내고 자재까지 전부 새것을 썼다. 빨리 조달할 수만 있다면 자재의 출처는 따지지 않아서, 동남아나 아프리카에서 수입한 원목도 잔뜩 사용했다. 심지어 함수율이 80%나 되는 목재를 말리지도 않고 그냥 사용해서 지었다는데, 그래도 말짱하게 잘 서있다고 한다.

덤으로, 복원을 위해 조사해 보니 기존의 천안문에 사용된 목재 중 정말 저질 목재도 있고 심지어는 미국산 목재도 있었다고 한다. 연구자들이 추정한 출처는 불탄 원명원. 말기에 접어들어 재정이 넉넉하지 않았던 청나라 정부가 보수작업을 위해 주변에서 되는대로 목재를 구하다 보니 의화단의 난 때 폐허가 된 원명원의 건물들을 재활용하여 썼을 것이라고. 게다가 여기저기에 의화단의 난 당시 연합군이 쏜 것으로 보이는 포탄과 총탄이 박혀 있고 알파벳 문자가 새겨진 포탄까지 박혀 있었다고 한다.

3. 상세

베이징에 들르는 관광객들이 반드시 들르는 베이징에서 가장 유명한 랜드마크이자 관광지. 광장을 가운데 두고 모주석기념당, 인민영웅기념비, 인민대회당, 중국국가박물관마오쩌둥의 거대한 초상화가 내걸린 천안문이 둘러싸고 있다.

드넓은 천안문광장을 보러 온 외국인도 많지만 중국 각 지방에서 온 내국인 관광객들도 엄청나게 많다. 춘절이나 노동절, 국경절 연휴에 가보면 사람 물결에 떠내려간다는 말을 실감할 정도. 그 넓은 광장이 사람들로 꽉 찬다.

이곳에서 매일 아침 열리는 오성홍기 게양식이 유명하다. 천안문광장을 찾는 관광객들이 꼭 찾는 성지순례 코스. 1년 365일 베이징의 일출 시각에 맞춰 천안문 국기게양대에 오성홍기를 게양하는데, 중국에선 새해 첫날 일출 대신 천안문광장의 국기게양식을 보며 새해 첫 아침을 맞는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국기게양을 전담하는 부대가 따로 있을 정도로 국기 게양식에 공을 들이고 있다. 저녁에도 오성홍기 하강식을 하는데 게양식에 비하면 좀 밋밋하다.

문 앞의 대광장 주위에는 중앙관청이 모여 있고, 광장 중앙 남쪽에는 높이 38m의 화강석으로 된 인민영웅기념비가 있다.

중국 내 국가적인 큰 행사는 이 문에서 개최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1919년의 5 ·4운동 이래 중국인들의 시위집회에 많이 이용되었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정권 수립식도 여기서 행해졌으며, 마오쩌둥이 문화대혁명을 발동하자 홍위병들을 소집해 본격적인 시작 선언을 한 곳도 이곳이며, 1976년 저우언라이의 사망을 기폭제로 제 1차 천안문 사건이 벌어진 곳도 이곳이며, 중국 현대사의 비극이자 흑역사인 제 2차 천안문 사건도 이곳에서 벌어졌다. 그리고 매년 5월 1일 노동절을 비롯한 국경일의 의식도 이곳에서 행한다.

이렇듯 1980년대까지는 각종 시위나 집회, 정치행사의 명소였지만 두 차례에 걸친 천안문 사태, 티베트위구르 독립운동 관련 분신자살이나 폭탄테러의 우려 때문에 수많은 경비병들이 사람들을 매의 눈으로 감시하면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는 광경은 좀체 볼수없게 되었다. 광장에 들어오는 모든 출입구에는 보안 검색대가 설치되어 있고, 가방을 모두 X레이 스캔한 다음에야 들어갈 수 있다.[2] 또한 수십미터 간격으로 이동 파출소 차량이 배치되어 있고, 공안, 인민해방군 군인이 수시로 순찰을 돌고 있다. 자금성 안에도 공안이 많이 배치되어 있다.

4. 현대 천안문의 모습

천안문 중앙에는 마오쩌둥의 대형 초상화가, 양 옆에는 '중화인민공화국만세(中华人民共和国万岁)'[3], '세계인민대단결만세(世界人民大团结万岁)'[4]라는 표어가 걸려 있다.

파일:Tiananmen_1901.jpg
청나라 붕괴 직전의 천안문.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다. 대신 아무 초상화도 걸려있지 않아서 비주얼상으로는 이게 가장 좋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755px-Chiang_KaiShek_Portrait_Tiananmen_Beijing.jpg
국민당이 베이징을 장악했을 때는 마오쩌둥 대신 장제스의 초상화가 더 크게 걸려 있기도 했다. 또한 당시에는 천안문 양 옆에 써 있는 표어가 없었다.

파일:Tiananmen_1949.jpg
1949년 인민해방군베이징에 입성했을 당시의 모습이다. 천안문 현판 밑에 마오쩌둥의 초상화가 작게 걸려있다. 참고로 천안문의 현판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에도 한동안 달려 있다가 1950년대 초에 철거되고 대신 중화인민공화국의 국장이 달렸다.

파일:attachment/천안문광장/1949년 건국 당시의 천안문.jpg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당시에는 번체자로 '중화인민공화국만세(中華人民共和國萬歲)', '중앙인민정부만세(中央人民政府萬歲)'[5]라는 표어로 걸려 있었다.

파일:attachment/천안문광장/1951년 당시의 천안문.jpg
그 다음 해인 1950년에 현재의 표어로, 마오쩌둥의 초상화는 모자를 쓰지 않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파일:attachment/천안문광장/1955년 이후의 천안문.jpg
1956년부터 왼쪽 표어의 '萬'과 오른쪽 표어의 '團'과 '萬'이 간화자로 바뀌는 과도기를 거치다가 1964년부터는 간체자로 완전히 바뀌었다. 또 1970년에는 목제에서 금속제로 바뀌었다.

5. 관련 사건


[1] 천안문은 (Tiān'ānmén, ㄊㄧㄢ ㄢ ㄇㄣˊ, T'ien¹-an¹-men², 톈안먼)으로 읽는다.[2] 단체관광객 출입구는 따로 있는데 단체로 온 외국인 관광객은 가이드 인솔하에 어떠한 검문/검색없이 광장으로 바로 입장할 수 있다.[3] Zhōnghuá Rénmín Gònghéguó wànsuì 쫑화 런민 꽁허궈 완수이[4] shìjiè rénmín dàtuánjié wànsuì 스졔 런민 따퇀졔 완수이[5] zhōngyāng rénmín zhèngfǔ wànsuì 쫑양 런민 쩡푸 완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