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30 19:48:17

천징룬



1. 개요2. 생애3. 업적4. 여담

1. 개요

/ Chén Jǐngrùn, 1933~1996

1900년대 중국수학자.

2. 생애

푸젠성 푸저우시에서 태어났고, 샤먼대학을 졸업해 1953년부터 1954년까지 베이징시 제4중학교에 배정되어 교편을 잡았지만, 말주변이 좋지 않아 강의를 통한 수업을 하질 못하고 숙제만 교정할 수 있었다. 결국 당시 샤먼대학 총장에게 이 사실이 알려져 다시 샤먼대로 와 자료실에서 근무하게 되었고, 이듬해 조교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1957년 중국과학원 수학연구소로 발령받아 보조 연구원이 된 뒤 그곳에서 수론 연구에 청춘을 바쳤는데, 무려 문화대혁명 때 부르주아 앞잡이 딱지가 붙어 감금되어 지내는 동안에도 수론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정성이 통했는지 1973년 끝내 천의 두 번째 정리를 실은 자료를 연구소장에게 제출했고, 연구소장은 중국과학원 당서기에게 이를 전달했으며, 당서기는 "이런 대단한 연구를 한 청년이 논문을 내놓지 못하면 심각한 문제가 된다! 이거 당장 저우 총리한테 보고해!"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이 덕에 중국과학원 학술지 《중국과학(中国科学)》에 천의 두 번째 정리가 무사히 실릴 수 있었다.

그러나 감금생활 탓인지 이때 폐결핵과 복막결핵을 진단받았는데, 이에 4인방의 지시로 인민해방군 제309병원에 입원했다. 그곳에서 47세의 나이에 당시 29세였던 군의관 요우쿤(由昆)을 만나 혼인했다. 또 천의 두 번째 정리가 홍콩을 통해 유럽 수학계로 전해져 본격적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는다. 이듬해인 1974년에는 저우 주석의 지시로 제4기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로 선출되어 톈진 대표가 되었고 1977년 연구원으로 파격 승진했다.

1978년부터는 석박사 과정 대학원생을 양성하였으며, 1979년엔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 초청받았고, 1980년 중국과학원 물리학 수학학부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중국의 내로라하는 대학교들에서 겸임교수를 맡은 건 물론 제6기까지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 자리도 유지했다. 하지만 감금생활 탓에 얻은 병은 점점 심화하여 1984년에 파킨슨병까지 야기했고, 결국 폐렴 합병증으로 1996년 향년 63세로 사망한다.

3. 업적

1966년 천의 정리를 증명, 발표하면서 골드바흐 추측을 해결하는 데에 커다란 진전을 불러왔다.

1973년 '서로 쌍을 이루는 소수 p와 p+n의 값이 소수이거나 반소수[1]인 짝수 n이 무한히 존재한다'는 천의 두 번째 정리를 발표했는데, 해당 정리를 통해 1+2를 증명했다.

4. 여담

천징룬이 사망한 1996년에, 중국은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그해 발견한 소행성에 천징룬의 이름을 붙여 'the Asteroid 7681 Chenjingrun'으로 명명했다.

결혼 후 1년 뒤인 1974년에 아들 천요우웨이(陈由伟)를 얻었다. 요우웨이는 본디 문학도였으나 부친상을 당하고 그 의지를 이어받기 위해 응용수학 전공자가 되기로 하여 캐나다에서 석사 과정까지 마쳤다. 하지만 졸업 후엔 의료 관련 회사를 차려 평범하게 살고 있다.

성씨가 같은 중국 수학자인 천싱선과 혼동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1] 소수 두 개의 곱으로 표현할 수 있는 수. 15(3×5), 77(7×11) 등이 있다. '거의 소수'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