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9:11:23

초카이(중순양함)

타카오급 중순양함 高雄型重巡洋艦
1번함
타카오 高雄
2번함
아타고 愛宕
3번함
마야 摩耶
4번함
초카이 鳥海
파일:초카이.jpg
파일:Chokai-1.jpg

타카오급 중순양함의 4번함으로, 일본군이 공식적으로 중순양함으로 발표한 군함 중에서는 최후의 배다. 성능은 타카오급 항목 참조.

1. 함생
1.1. 전쟁 이전1.2. 남방작전1.3. 제8함대 기함1.4. 레이테 만 해전
2. 평가3. 기타4. 관련 링크

1. 함생

1.1. 전쟁 이전

1931년 4월 5일에 진수식을 거행했으며, 1932년 6월 30일에 취역했다. 1933년에는 특별대연습에서 함대 기함을 맡았다가 무선통신이 불통되는 '초카이 사건'을 일으켰다. 1941년에는 자매함인 타카오나 아타고처럼 개장공사를 받을 예정이었으나, 정세가 흉흉해서 개장공사는 취소된다.

파일:external/img.photobucket.com/WNJAP_8-50_3ns_Chokai_pic_zps38bb1ba8.jpg

1.2. 남방작전

개전 초기에는 오자와 지사부로 제독의 기함으로서 남방작전에 투입되었고, 말라야 침공에 참가했으며, 프린스 오브 웨일즈를 추적하기도 했으나 오자와 휘하의 육상공격기들이 프린스 오브 웨일즈를 격침시켰으므로 교전은 벌이지 않았다. 이후에는 남방작전에 참가해서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와 보르네오 섬 점령에 공헌했지만 1942년 2월 22일에 암초에 충돌, 수리를 위해 싱가포르로 간다. 이후에는 남방작전에 복귀해서 지원임무를 수행했고, 인도양까지 진출해서 미국 화물선 1척과 영국 증기선 1척을 격침시킨다.

1.3. 제8함대 기함

남방작전 이후 일본으로 귀환한 초카이는 미드웨이 해전에도 참가했지만 미군과 직접 교전을 벌이지는 않았으며, 1942년 7월에 제8함대의 기함이 된다. 함대 지휘관 미카와 군이치 제독과 함께 라바울로 이동한 초카이였지만, 제8함대의 사령부 시설은 다른 부대에 비해 상당히 초라했다고 한다.

과달카날에 미군이 상륙함으로서 과달카날 전역이 시작되었고, 미카와 제독은 기함 초카이와 제6전대(아오바, 키누가사, 후루타카, 카코)를 거느리고 야습을 감행하기로 한다. 그러나 오합지졸 3인방이 떼를 써서 작전에 참가했고, 이들은 미카와 제독의 작전구상에 지대한 방해가 된다. 문제의 군함은 구축함 유나기, 유바리, 그리고 잉여 경순양함 텐류였다. 무선통신도 안 되고 속도도 안 맞는 군함들이라, 일본어 위키에서도 대놓고 오합지졸들이라고 비하할 지경이었다. 과달카날에 엔터프라이즈를 포함한 강력한 미 함대가 있음을 감안하면 이 작전은 매우 위험했지만, 제8함대는 압승을 거뒀다. 이 해전이 바로 미 해군 역사상 최악의 해전으로 불리는 사보섬 해전이며, 초카이는 함대의 기함이면서도 선봉에 서서 돌격, 34명의 전사자를 내고 포탑과 함교에 손상을 입으면서도 대승리를 거두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날이 밝기 전에 과달카날의 미군을 공격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미카와 제독은 함대를 철수시켰다. 일본군이 입은 손실은 귀로에서 미군 잠수함의 매복공격을 당해 격침된 제6전대 소속 중순양함 카코 1척 뿐이다.

포탑 수리를 끝낸 초카이는 제6전대를 거느리고 동부 솔로몬 해전에 참가, 제2수뢰전대와 함께 과달카날에 상륙할 일본군 병력을 실은 수송선들을 호위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주력을 이룬 항공모함 쇼카쿠와 즈이카쿠가 수송함대를 놔두고 후퇴하는 바람에 미군의 공습을 당했고, 휘하인 제6전대 중순양함들과 경순양함 유라와 함께 정찰기로 핸더슨 비행장을 야간공습까지 하며 안간힘을 썼지만 과달카날 상륙에는 실패했다.

에스페란스 곶 해전에서 제6전대가 큰 피해를 입은 후, 초카이는 키누가사와 함께 핸더슨 비행장을 야간에 포격하여 큰 피해를 입히기도 했다. 그러나 과달카날 해전에서 핸더슨 비행장을 재차 포격했다가, 귀로에서 핸더슨 비행장의 칵터스 항공대와 엔터프라이즈 항공대의 공습을 당해 키누가사를 잃는다. 이것으로 제6전대는 아오바 1척을 제외하면 모두 침몰했으며, 일본군은 과달카날에서 패배했다.

과달카날 전투가 끝난 후 초카이는 제8함대 기함 임무에서 물러나 일본으로 돌아갔다.

1.4. 레이테 만 해전

일본에 돌아간 후 몇 가지 자잘한 임무를 수행하던 초카이는 1944년에 제4전대 기함이 된다. 이후 제5전대로 소속을 옮겼다가, 구리다 함대의 일원으로 레이테 만 해전에 참가한다. 구리다 함대는 무사시를 포함한 다수의 배를 잃지만, 홀시의 실수 덕분에 목표지점인 레이테 만 근처까지 도착했고, 여기서 태피 3을 만나면서 사마르 해전이 벌어진다.

사마르 해전에서 초카이는 치쿠마/노시로 등의 다른 순양함들과 함께 태피 3에 포격을 가했고, 미군의 호위항공모함 갬비어 베이가 격침된다. 갬비어 베이를 누가 격침시켰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초카이가 갬비어 베이에 포격을 가한 것은 분명하므로 격침에 어느 정도 기여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그러나 태피 3의 카사블랑카급 호위항공모함은 20mm나 40mm 기관포 이외에 5인치 단장포 1문을 장비[1]하고 있었고, 그 중 한 척인 호위항모 화이트 플레인즈(White Plains, CVE-66)가 5인치 포의 최대 사정거리에 가까운 거리에서 6발을 초카이에 명중시켰다.[2]

잔해가 발견되기 이전까진 초카이의 침몰 원인이 이때 명중한 포탄이 어뢰발사관에 명중하여 초카이가 탑재한 산소어뢰를 유폭시키는 바람에 엔진과 방향타가 파괴되며 대파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2019년에 진행된 R/V Petrel에 의한 심해탐사 조사에서 어뢰 발사관이 비어 있는 상태로 큰 손상을 입지 않은 것이 확인되었다.[3] 우현 2번 포탑과 3번 포탑 사이 흘수선 아래의 현측에 큰 파공이 발견되고 상부구조물에 폭탄과 포탄에 피격된 손상이 여러 부분에서 확인되었으며, 1번 포탑 앞쪽부터의 함수는 완전히 분리되어 함체로부터 300m 거리에서 뒤집힌채 발견되었다. 따라서 현재는 항공기의 공습, 혹은 공고급 순양전함 1번함 공고에 의한 오인사격[4]으로 인해 대파되었다는 것이 현재까지 확인된 것 중 가능성이 있는 가설들이다. 다만 후술하겠지만 초카이의 생존자가 단 한 명도 없는 관계로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다.

아무튼 08시 59분경 원인을 알 수 없는 대규모 폭발이 초카이에서 발생했으며, 이 폭발 이후 초카이는 조타장비에 문제가 발생해 작동하지 않는다는 깃발 신호를 보내며 대열에서 벗어나 좌현으로 선회하며 동쪽으로 움직였다.

이후 카사블랑카급 호위항공모함 USS 킷쿤 베이에서 출격한 함재기가 투하한 230kg 반철갑탄에 전방기관실이 피격되었으며 서서히 속력이 느려지더니 얼마 못가 완전히 기동을 멈추며 무력화되었다.[5] 9시 55분에는 토네의 견시들이 약 4.8마일 거리에서 완전히 기동을 멈춘 초카이함을 목격했다. 이후 후지나미가 주변을 경계하는 사이 복구를 시도하나 실패했고 결국 생존자를 후지나미에 수용시킨 후 뇌격을 가해 자침처리되며 함생을 끝마친다.

생존자들은 경계중이던 유구모급 구축함 후지나미가 수습했는데 후지나미가 에식스급 항공모함 에식스에게 격침당하는 바람에 후지나미의 승무원과 같이 전멸해서 2차 세계대전에서 생존자가 전혀 나오지 못한 함선 중 최대의 함선이 되고 말았다.[6]

그리고 침몰 지점이 필리핀 해구 바로 위쪽이었기에 잔해가 있을 예상 수심이 수심 8,100m로 예상되어 세계에서 제일 깊은 바닷속에 있는 침몰선 중에 하나로 기록되기도 했으나, 2019년에 수심 5,173m에서 잔해가 발견되며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침몰선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영상 대신 세계에서 가장 깊은 바다속에 있는걸로 확인된건 수심 6,895m의 같은 해전에서 침몰한 DE-413 새뮤얼 B. 로버츠가 되었다.#

2. 평가

초카이는 과달카날에서 제8함대 기함으로 크게 활약했고, 사마르 해전에서도 미군 호위항모 갬비어 베이의 격침에 기여하는 등, 일본군 중순양함 중에서도 매우 우수한 실적을 거두었으나, 승조원이 한 명도 살아 돌아가지 못하는 매우 불운한 최후를 맞고 만 함선이다.

3. 기타

타카오급 중순양함들은 병사들이 지어준 별명을 갖고 있는데, 타카오는 '타카오 부인'이고 아타고는 '아타고 공주', 마야는 '마야 부인'이지만 초카이만은 초카이 법사였다. 헤이안 시대의 승려 쿠카이(空海) 법사와 이름이 비슷해서 붙은 별명으로 보인다.

드래곤볼의 유명한 캐릭터인 피콜로의 성우인 후루카와 토시오는 형이 이 초카이에서 복무했다고 하며, 그가 필리핀해에서 폭격으로 전사한 이후 후루카와 토시오가 태어나자 가족들은 형이 환생했다고 여겼다고.

2019년 10월 26일 폴 앨런 산하 발굴팀이 5,173미터 해저에서 초카이의 선체를 발견했다.

4. 관련 링크



[1] 이 포의 구경은 127mm로, 당시 초카이가 맞닥뜨린 플레처급 구축함의 주포 구경과 같은 것이다.[2] 일본측 기록에 의하면 적탄 2발 명중 *하구로의 전투상보[3] 폭발로 인해 손상을 입은 후, 유폭을 방지하기 위해 어뢰를 바다에 버린 것으로 보인다.[4] 이 설은 공고의 승조원 3명과 근처에 있던 묘코급 중순양함 하구로의 승조원 1명에게서 전후에 나온 것이다. 하구로의 승조원의 증언에 의하면 오인사격의 원인은 초카이가 순양함 전대 사령관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돌격을 감행해 공고의 사선에 들어가며 적함으로 오인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5] 9시 18분에 야마토함이 초카이에서 전방기관실이 피탄되었고 복구중이라는 무전을 받았다고 한다.[6] 같은 해전에서 생존자들이 유사한 운명을 맞게 되었던 토네급 중순양함 치쿠마의 경우, 노와키함에 구조되지 못한 사관 한 명이 바다에 표류하다 며칠 뒤 미군에 발견되며 구조되었다. 때문에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초카이와는 달리 침몰 당시 입은 피해와 같은 정보가 비교적 상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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