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최경선(崔景善) |
생몰 | 1898년 7월 4일 ~ 1983년 7월 25일 |
출생지 | 황해도 장연군 속달면 태난리 |
사망지 | 서울특별시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최경선은 1898년 7월 4일 황해도 장연군 속달면 태난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2일 평안남도 대동군 용산면에 소재한 안식교회당에서 500명의 시위대를 인솔하여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후 재차 시위운동을 계획하였지만, 일제의 감시로 여의치 않자 동년 6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에 가입하였다. 대한독립청년단은 평안남도 청년층의 주도로 조직된 일종의 별동대로, 단원을 200명으로 한정하고 임시정부 교통국과 긴밀한 연락 관계를 유지하며 국내 연락·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군자금 모집에도 노력하였다. 최경선은 대한독립청년단의 기관지 <청년혈(靑年血)>을 발행했다.
1919년 8월, 최경선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애국금수합위원(愛國金收合委員)으로 위촉되어 활동하였다. 이후 재무총장 최재형의 지시로 국내로 잠입해 황해도, 평양 등지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했다. 그러나 얼마 후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고, 10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서울로 이주하여 조용히 지내다 1983년 7월 2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최경선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