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21:48:58

축제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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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A6E98,#FA6E98> 축제의 날
가수 유니
작곡가 박화애
작사가
조교자
일러스트레이터
영상 제작
페이지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투고일 2022년 09월 08일
1. 영상2. 가사3. 일러스트 배경의 글4. 해석5. 여담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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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상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YouTube

2. 가사

그동안 믿어왔던 모든 것이 사실은 다 몰가치 했었다나.
입고 있던 예복을 벗어내곤 나는 길을 달렸어, 달려 나갔어.

초대장!
초대장, 맞아, 인장이 찍힌 초대장 없이는 회장에 들어갈 수 없었지.
배신자!
개자식, 너는 달콤한 말로 나에게 독이 될 마음을 심었어.

이제부터는 영원하고 아름다운 축제의 날이 계속돼, 언제까지나,
단둘이서 손을 얽고 발을 옮기며 춤을 추네, 우리들.
바라 마지않았던 모든 게 이 손에 들어왔으니 어떻게 웃지 않고 견딜 수 있겠어,
우리들, 죽지 않고 살아가리라.

영영 밤이 오지 않을 것처럼, 결코 밤이 오지 않을 것처럼.

생과자!
생과자, 그래, 모두와 나눌 과자를 넉넉히 준비해두도록 하지.
배신자, 바리새파, 배로 기는 것.
개자식, 너는 달콤한 술에 너라는 독을 타 나에게 권했어.

이제부터는 영원하고 아름다운 존재의 삶이 계속돼, 언제까지나,
다 같이서 숨을 섞고 살을 맞대며 축복하네, 서로를.

바라지도 않았던 모든 걸 이 품에 떠안겼으나 어떻게 사랑 않고 배길 수 있겠어,
우리들 하나 되어 살아가, 여기에서.
영영 끝이 오지 않을 것처럼, 결코 끝을 맞지 않을 것처럼.

나 영원히 살아가노라.

3. 일러스트 배경의 글


1. 0:42
어찌 됐든 기분이 좋았다. 그동안 내가 내 인생에 대해 느껴온 공허감 (조금 우습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꽤 오랫동안 이 감정을 공복감과 혼동하고 있었다.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땅에서는 행복과 충성심, 그리고 경외심 이외의 감정을 지칭하는 단어를 교육하지 않았는걸. 즉 그 시절의 내게는 '쓸쓸하다'는 개념에 대한 지식 자체가 없었고, 당연히 내 기분에 알맞은 이름을 붙이는 것도 불가능했다. 인간이 외로움을 느낄 때 자극되는 뇌의 영역은 배고픔을 느낄 때의 그것과 일치하다고 한다. 그러니 그 기분을 공복으로 정의한 것은 당시 내가 가지고 있던 세계관 내에서 나름 최선을 다했던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의 정체와 그 해소법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고 있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고, 이것은 그저 덤에 가까운 결과였지만, 뭐 어떠하리. 힘든 생활 중 일부러라도 소소한 행복을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장수의 비결이다. 그래 아무튼 나는

요컨대 나는 삶의 목적을 찾아 해매고 있던 것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알고있지만 알 수 없었다. 의심하지 않고 이미 주어진 환경을 누리며 멍청하고 귀엽게 수명을 허비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의무였지만 나는 도저히 그 사실을 받아들일수 없었다. 인간은 무언가 고귀한 목적을 가지고 이 땅에 났을 것이다.그야 그렇잖아 내게는 배꼽이 있다. 배꼽이란 어머니와 연결되어 있었던 적의 흔적이다. 하지만 그들이 교육한 역사에 따르면 우리는 낳음이 아닌 지음받은 존재였다 앞뒤가 맞질 않는다.

다른 모두가 그 사실에 조금의 위화감도 품지 않는것이 답답할 따름이었다.사실 현명한 것은 그들이었고 불필요한 생각을 하는 나만이 불량품이었음을. 나는 태어나지 않는 편이 좋았다 이제 나는 그것을 안다.

2. 1:37
괜찮아, 하고 묻기에 괜찮아. 하고 답한다. 사실 전혀 괜찮지 않으면서 피차 다정함을 가장하지만 괴롭힘이나 다름없다. 만성적인 이 문답에는 물론 정보값 따위 담겨있지 않다. 우리는 괜찮지 않다. 서로의 상처를 손톱으로 지그시 눌러 확인해본다. 아픈건 싫지만 통증조차 가능하지 않으면 살아 있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이 이젠 정말 무엇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는데 대충 잘 먹고 사는 대신 항상 목줄에 묶여 주인에게 아양떨어야 하는 개를 보고 늑대가 굶주려도 좋으니 자유롭게 야생에서 사는 삶을 살기로 한다는..... 뭐 그런 내용이었거든. 읽을땐 별 생각 없었는데 말이야 ..... 갑자기 생각나네. 아니, 그렇잖아. 이야기 속 늑대는 덜 굶주려봐서 그런 소리가 나온 걸거야. 그 어떤 고귀한 정신적 가치와 문명도 공복감을 이길 수는 없는걸.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지낸다면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데 그걸 걷어차다니 정말 멍청한 짓이야... 춥다,외롭다, 그리고 배고프다. 이 셋은 실질적으로 같은 감각이지. 그리고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들이기도 해. 맞아 나는 후회하고 있어. 내가 선택했거나 선택하지 않았던 모든 것들에 대해서 웃어도 괜찮아.나 스스로도 어이없으니까. 한 대상의 특성중 이유 없이 싫은 면은 자기 자신에게 있는 면모 중 가장 싫어하는 면모를 거울 비추듯 보게 돼서라더니 정말 코미디네. 보고싶지 않아 생각하고 싶지 않아 이제 그만 도망쳐버리고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뿐이다— 그 땅을 기억하는 사람이 모두 죽는 것. 물론 나도 포함해서. 기록과 구전까지 모두 끊기면, 그 탑은 진정한 의미로 무너지게 되겠지. 그것이 우리가 언젠가 올 그날을 대비해 지은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렸다.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3. 3:9
그 후로는 시간이 정말 빠르게 지났다. 내가 먹을 것을 얻기 위해서는 나 스스로가 수고하여야 했다. 바쁘니 괴로운 생각은 들지 않아 좋았지만, 그것도 한동안이었다. 나들 괴롭히는 가장 큰 적은 나 자신의 사유였다. 안 좋은 기억은 곱씹지 않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지만, 그러네, 나는 오히려 이것을 위해 그 땅을 벗어난 것이었지

늙고 추악해지고 성불구가 되는 권리는 말할 것도 없이, 매독과 암에 걸리는 권리를, 기아의 권리를, 이투성이가 되는 권리를 내일은 어떻게 될까 하고 끊임없이 격정하는 권리를, 티푸스에 걸리는 권리를, 이루 말할 수 없는 수많은 고통으로 괴로움을 받는 권리를

문은 열려 있었다. 둘은 문를 밀치고 커튼이 걸린 어두침침한 방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방 건너 구석의 활처럼 굽은 통로에는 위층으로 통하는 제일 밑 계단이 보였다. 굽은 통로의 꼭대기 바로 밑에 다리 두 개가 축 늘어져 있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재촉하지 않은 나침반의 두 개의 바늘처된 다리가 오른쪽으로 향했다. 북으로, 북동으로, 남으로 남남동으로

그리고 몇초 후에는 다시 서서히 왼쪽으로 되돌아왔다. 남남서로, 남으로, 남동으로 동으로...

수 분 전까지만 해도 내가 지냈던 곳이 지금은 유황과 불로 타오르고 있었다. 단 십 인의 의인도 찾아볼 수 없어 도시는 멸망했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최선이었을까?무지를 깨닫고 뉘우칠 유예를 주었다던 저들 중에서도 한들 정도는 의의 길로 돌아올 수 있는게 아니었을까? 본인 행동을 선택해 볼 기회도 없었던 갓난아이들은?늦게 태어난 것은 죄가 될 수 있는가? 알 수 없었다.

애초에 알 필요도 없다고 그가 말했다.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서 그냥 웃었다.

우리는 이유 없이 탄생해 현상처럼 지내다 어느 날 죽어 다른 형태로 다시 만날 거라고. 그러므로 죽는 것은 전혀 두려운 일이 아니라고. 이교의 사제가 말했다. 끝을 무서워 하지 않는 문화권의 장례는 마치 축제의 양상을 띤다. 마을사람들은 꽃으로 꾸민 관을 둘러싸고 술과 과자를 나누며 노래하고 춤을 췄다. 장례의 마지막 날 밤에는 죽은 이가 아끼던 물건들 그리고 남은 축제 음식들을 모두 모아 모닥불에 던졌다. 불씨는 자연히 꺼지게 냅두고, 재는 구태여 치우는 일 없이 바람에 흩날리도록 두었다. 그 날 밤 사자의 가장 가까웠던 사람의 꿈에 나온 것이 사자가 다음 생에 취할 모습으로 간주되었다. 사람으로도 짐승으로도 벌레로도 들풀로도 바위로도 시냇물로도―그들은 영혼을 가진 것이라면 어떤 모습이든 될 수 있었다. 그것은 무척이나 즐거운 일이었다. 그들은 어디로든 갈 수 있었다. 그들은 육체로부터 자유로웠다.

손에 손을 잡고 뺨에 입 맞추고 너만이 유일하다 말하고


4. 해석

1. 종교적인 의미
'배신자, 바리새파, 배로 기는 것.'이라는 가사에서 짐작하듯 종교에 대한 부분이 드러나 있음을 알 수 있다. 경건한 체 하는 위선자들(특히 종교적인 맥락에서) 혹은 종교적 근본주의자/강경보수파를 바리사이라고 표현하며, 기독교에서 굉장히 꺼리는 표현이라고도 한다. 바리새파라 불리는 기독교 종파와 배로 기는 것은 인간에게 선악을 알려준 뱀을 의미하며 기독교, 천주교 등에선 뱀을 악마의 상징이라고 여긴다. 이를 통해 노래 자체에서 종교적인 의미가 다분함을 알 수 있다. 또한 '개자식, 너는 달콤한 술에 너라는 독을 타 나에게 권했어.'라는 부분에서 선악과[1]를 건네 받은 하와의 모습을 연상할 수도 있다. 뱀으로 변장한 악마가 인간에게 선악과를 건네며 유혹하였으며 당연하게도 원망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2.
노래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영화 '미드소마'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림과 색체, 일러스트에 사용된 꽃장식과 흰 옷 때문에도 그렇지만 곡의 내용이 영화 미드소마의 전반적인 스토리와 비슷하게 연상된다. [2]

하지만 원작자가 이 곡은 미드소마의 포스터에 있는 옷만 참고했지 정작 영화는 본 경험이 없어서, 영화의 줄거리와는 관련이 없다고 직접 언급했기에 2번의 해석은 거리가 멀 수도 있다.

5. 여담

이 곡의 가장 큰 특징은 5박자로 구성된 곡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어딘가 불편하고 기이한 느낌을 주는 것,
잘 와닿지 않는다면 5박자를 한 마디로 생각하고 5번씩 박수를 쳐보자.

6. 관련 문서


[1] 하나님이 동산을 만든 뒤 인간 둘과 여러 동식물을 두고 이것만은 먹지 말라고 말했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2] 90년마다 9명의 제물을 바쳐 90년의 행복을 누리는 집단의 정신이상적인 축제가 그에 대한 내용으로 인신공양에 대한 내용이 주된 편이다. 집단 내에서 이뤄지는 축제가 해당 집단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는 편으로서 노래 가사를 말하는 화자의 입장에서 집단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이 생긴다면 배신자가 되어 낙오될 확률이 매우 크며, 심지어는 화자가 집단 편이라면 '배신자', 즉 집단의 영향력과 행동 등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이 함께 도망가자고 했다면 굉장한 배신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