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5-16 23:58:14

카르피 전투



파일:Battle_of_carpi.png

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오스트리아군3.2. 프랑스-스페인-사보이아 공국 동맹군
4. 전투 경과5. 결과

1. 개요

1701년 7월 9일 오스트리아군과 프랑스군이 이탈리아 북부의 카르피에서 맞붙은 전투.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첫번째 전투이다.

2. 배경

1700년 11월 1일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가 병사한 후, 카를로스 2세로부터 후계자로 지명받은 앙주 공작 필리프가 스페인으로 가서 마드리드에서 펠리페 5세로 즉위했다. 이에 오스트리아, 영국, 네덜란드 등은 대동맹을 체결하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1세의 동생 카를 대공을 스페인 국왕으로 추대했고, 프랑스와 스페인은 다가올 전쟁에 대비해 군대를 소집했다.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는 이탈리아 북부의 밀라노와 만투아를 발판으로 삼아 오스트리아 남부 일대를 위협하려 했고, 요제프 1세는 이에 맞서 대 튀르크 전쟁에서 크게 활약했던 사부아 공자 외젠을 티롤로 파견해 그곳에서 군대를 편성해 밀라노 공국을 공략하게 했다.

외젠은 티롤로 도착한 뒤 3만 2천 명 가량의 병력을 편성했다. 그러나 당시 그는 보급난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가 보유한 군대의 훈련도 및 기강 역시 저조했다. 또한 니콜라 카티나 원수가 지휘하는 프랑스-스페인-피에몬테 동맹군 3만 9천 명은 리볼리에서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고 있었다. 리볼리 동쪽의 베네치아 공화국은 중립을 선포하고 양측 모두에게 협조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으므로, 오스트리아군이 베네치아를 통과해 프랑스군을 공격할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이에 카티나 원수는 오스트리아군이 감히 쳐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확신하고 충분한 병력과 물자가 확보될 때까지 리볼리에서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외젠은 시간을 끌어봐야 전력이 증강될 가능성이 희박한 상황에서 더 지체해봐야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적을 선제공격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먼저 베네치아 공화국에 전령을 보내 그의 군대가 베네치아를 통과할 때 저항하지 말 것을 요청하면서 만약 요청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신성 로마 제국의 적대국으로 간주하겠다고 위협했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일 뜻이 없었기에 순순히 승낙했고, 외젠은 6월 23일 베네치아를 통과한 후 리볼리를 향해 진군했다.

6월 28일, 외젠의 군대는 레그나고에 도착한 뒤 그곳에서 아디제 강을 도하해 남하했다. 이 소식을 접한 카티나 원수는 적이 전혀 예상치 않은 방향에서 쳐들어온 것에 경악했다. 그는 외젠이 포 강을 건너 이탈리아 내 스페인의 영역을 공격하려 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즉시 대다수 병력을 남하시켰고 아디제 강 인근 카르피에는 기병 1,500명과 보병 9,000명을 남겼다. 그러나 외젠은 부하들에게도 자신의 의도를 숨긴 채 포강으로 남하하는 듯하다가 돌연 방향을 틀어 카르피로 접근했다. 이리하여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첫번째 전투인 카르피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오스트리아군

3.2. 프랑스-스페인-사보이아 공국 동맹군

  • 총사령관: 니콜라 카티나
  • 병력: 약 11,400명

4. 전투 경과

1701년 7월 8일 밤, 약 5,500명으로 구성된 오스트리아군 2개 부대가 아디제 강을 도하해 적군의 저항을 가볍게 물리치고 카르피 근처의 카스타그나로 마을을 점령했다. 그 후 두 부대는 카르피 북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뒤이어 외젠이 이끄는 본대 12,000명이 아디제 강변에 도착하여 선발대의 뒤를 따랐다. 외젠은 다운 백작 위리히 필리프 대령에게 대포 20문과 2개 연대를 이끌고 카스타그나로의 고지대에 진영을 갖춘 후 카르피를 공격하는 아군을 도우라고 지시했다. 이에 필리프 대령은 부하들을 이끌고 2시간 동안 행진해 카스타그나로 고지대에 도착해 그곳을 수비하는 적과 교전했다. 생 프레몽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이에 맞서 싸워 적의 공세를 한 차례 격퇴했지만, 적이 강 건너편의 포대의 화력 지원에 힘입어 재차 공격해오자 끝내 카르피로 패퇴했다.

하지만 외젠은 적군이 카르피의 방어를 철저히 해뒀을 테니 섣불리 공격하기보다는 오랜 행군으로 지친 병사들을 휴식시키고 카르피를 효과적으로 공략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하기로 했다. 덕분에 시간을 번 생 프레몽은 후방에 있는 테세 원수에게 전령을 보내 지원군을 요청했다. 테세 원수는 즉시 카르피로 달려가 신성 로마 제국군이 카르피 공략 준비를 마칠 무렵에 도착했다. 하지만 워낙 서두르다보니 카르피로 도착한 그의 부대는 2개의 퀴라시어 기병 부대와 3개의 용기병 연대 뿐이었다. 테세 원수는 용기병 2개 연대에게 말에서 내려서 적의 공격에 맞서 전열을 사수하게 한 뒤, 자신은 퀴라시어 기병 2개 부대를 이끌고 제국군의 진영을 공격했다. 그는 3번 연속 제국군의 좌측면을 공격했고, 제국군은 이로 인해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외젠은 아군의 전열이 허물어지는 걸 막기 위해 일부 보병 대대와 1개 기병 대대를 좌익으로 파견해야 했다.

그러나 테세 원수가 분전하는 와중에도 카르피에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던 생 프레몽의 프랑스군은 적의 월등한 병력에 압도되어 감히 반격하려 하지 않았다. 덕분에 전열을 재정비하는 데 성공한 오스트리아군은 수적 우위를 앞세워 프랑스군을 밀어붙였다. 결국 카르피를 사수하던 프랑스군이 전의를 상실하고 퇴각하자, 테세 원수는 용기병 2개 연대에게 아군의 후미를 사수해 적이 추격하지 못하게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오스트리아군은 오랜 행군과 연이은 전투로 지쳐 있어서 용기병들의 저항을 뚫지 못하고 추격을 중단했다. 이후 테세 원수는 산 피에트로 디 레그나고로 철수하던 중 그를 따라오고 있던 6개 보병 대대와 기병 대대들과 합세했다. 하지만 그는 카르피를 탈환하려 하지 않고 레그나고로 철수했다. 이리하여 카르피 전투는 오스트리아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5. 결과

오스트리아군은 카르피 전투에서 42명이 전사하고 50~60명이 부상당했다. 반면 프랑스군은 35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100여 명이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외젠은 카르피를 장악하면서 밀라노로 진군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후 외젠은 베네치아가 자신들의 영토를 통해 보급물자가 오스트리아군에게 전달되는 걸 허용하지 않아 한동안 보급난에 시달렸지만, 7월 28일 브레시아로 진군해 그곳에서 보급로를 확보하면서 위기를 모면했다.

한편 카티나 원수는 포 강으로 남하한 후 외젠이 남하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자 뒤늦게 자신이 속았다는 걸 깨닫고 서둘러 북상해 민치오에서 흩어진 병력을 규합하는 데 애를 썼다. 하지만 그는 외젠이 브레시아로 진군하는 걸 방관하기만 하다가 오글레오로 퇴각했다. 이러한 카티나 원수의 소극적인 태도에 분개한 테세 원수는 이 사실을 파리에 보고했고, 루이 14세는 8월에 카티나를 경질하고 빌레루아 공작 프랑수아 드 뇌빌을 파견해 외젠의 오스트리아군을 격퇴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