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4-07 15:35:16

카불 칸

<colbgcolor=#004db1> 카마그 초대 칸
合不勒 | 합부륵
묘호 없음
시호 없음
보르지긴(Боржигин)
孛兒只斤(패아지근)
ᠪᠣᠷᠵᠢᠭᠢᠨ
카불
合不勒(합부륵)
부친 툼비나이 세첸
생몰 1084/85? ~ 1149?
재위 카마그 초대 칸
12세기 초 ~ 1149?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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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르지긴 오복(oboq, 몽골 성씨) 출신으로, 카마그 몽골의 족장 카이두의 장남 바이 싱코르 독신(Bai shinkhor Dogshin)의 손자였고, 툼비나이 세첸의 장남이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칭기즈 칸의 증조부였다.

2. 생애

12세기 초, 몽골부의 보르지긴씨(孛兒只斤氏) 귀족 카불(合不勒)이 주변의 10여 개 부락과 씨족을 통일하고, 카마그 몽골이라는 부락연맹을 건립하여 최초의 '칸'이 되었다. 이는 각각의 독립적인 우두머리가 있는 씨족으로 구성된 연합체였다. '칸'은 맹주였고, 맹주 아래 각 씨족의 우두머리 또는 추장이 있었다. 이 연맹이 탄생한 날로부터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몽골부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몽골부는 나중에 칭기즈 칸이 건립하게 되는 대몽골 제국의 전신이었다.

카불 칸은 신흥 제국 금나라를 침공했으나, 남송 원정을 떠난 금나라는 카불의 군대를 상대하지 못했다. 뒤에 금 태종(1123~1135 재위)이 회군하자, 카불은 금나라로 가 종주권을 인정하고 귀환했다. 하지만 1135년부터, 카마그 몽골은 카불 칸의 지도하에 금나라의 북부 국경에서 계속, 규모가 비교적 큰 습격전을 일으켰다. 이때 이미 동아시아 최강의 패권국으로 성장한 금나라는 오랫동안 이 초원 부락의 도발을 용납하지 않았다. 금나라는 1139년, 그리고 그 후 1147년 두 번에 걸쳐 카마그 몽골에 대해 대규모의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의 결과는 전혀 예상 밖이었다. 연전연승의 여진족 철기가 인원도 많지 않은 몽골인들에게 패배한 것이었다. 그것도 엉망진창으로. 어쩔 수 없이 몽골에 화해를 청했다. 협상을 거쳐, 금나라는 하이라르[1] 이북의 27곳의 단채(團寨)를 할양하고, 매년 카마그 몽골에 대량의 소, 양, 곡물을 보내기로 했으며, 몽골의 독립국가 지위를 인정했다. 이렇게 하여 카마그 몽골은 크게 기세를 드높였다.

한편 대흥안령 산맥 서록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옹기라트(Onggirad, 弘吉剌, 콩기라트, 쿵크라트, 온기라트)부[2]는 몽골인의 한 갈래였다. 또한 비교적 큰 부락연맹이기도 했다. 다만 당시 통일된 지도자가 없어, 몇몇 서로 다른 씨족의 우두머리들이 느슨하게 통치하고 있었다. 그래서 5대 부족인 메르키트, 타타르, 카마그 몽골, 케레이트, 나이만과 비교하면 실력의 차이가 컸다. 5대 부족처럼 강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옹기라트인은 강자들의 틈새에서 생존하는데 뛰어났다. 그들은 한편으로 자신들의 동쪽에 있는 금나라 및 타타르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동시에 그들 서쪽의 이웃 부족인 카마그 몽골과도 통혼 관계를 유지했다. 어느 한쪽에도 밉보이지 않는 호인의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무골호인 같은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하게 성격이 불과 같은 두 이웃 부족간의 반세기동안 이어지는 전쟁의 불꽃을 일으키게 했고, 이로 인해 전체 막북 초원은 격렬한 분쟁에 휩싸이게 되었다.

사건의 발단은 한 남자 때문이었다. 옹기라트부의 사인 테긴(賽因的斤)은 너무나도 평범한 노인이었다. 이 보통의 노인이 어느날 병이 들어 병석에 누웠다. 사인 테긴의 가족은 큰 돈을 들여 이웃 타타르부에서 유명한 의원인 샤먼교의 무당을 데려왔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이 명의를 부른 후, 환자의 병세가 더욱 악화된 것이다. 결국은 사인 테긴이 죽고 말았다. 사망자의 가족들은 사인 테긴이 무당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그 무당에게 뭐라고 말하지 못했다. 다만 한 사람은 성깔이 있었다. 바로 사망자의 누나의 남편인 카불 칸이었다. 카불 칸은 원래 옹기라트부로 와서 사인 테긴의 병세가 어떤지 보려고 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카불 칸은 분노하여 타타르의 무당을 죽여버렸다. 이렇게 되니 타타르인들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병력을 이끌고 와서 그들의 무당을 위해 복수하겠다고 했다. 카불 칸의 일곱 명의 아들들은 부친보다도 성격이 더 불같았다. 그 소식을 듣고 즉시 카불 칸을 돕기 위해 달려와서 타타르인들과 전투를 벌였다.

이 전쟁은 금나라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금나라 조정은 이번 기회에 몽골과 타타르 양대 세력이 서로 죽고 죽이게 만들어 그들이 남쪽으로 발전하지 못하게 막을 좋은 기회라 여긴 것이었다. 당시 몽골인은 금나라의 가장 두려운 적수였으므로, 금나라의 희종은 타타르를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하여 금나라와 타타르가 연합하여 공동으로 몽골에 대항하게 되었다. 금나라의 강대한 재력 지원과 온갖 방법으로 계속 선동하다보니, 전쟁은 여러 해 동안 이어졌다. 그리하여 양대 부족은 모두 엄청난 희생을 치르게 되었다. 어부지리를 노리던 금나라 황제는 기뻐해 마지 않았다. 카불 칸은 용맹했지만, 여러 해동안 끊임없이 이어지는 전쟁을 겪다보니 그도 체력이 더 이상 받쳐주지 못했다. 결국 어느 날 이 불요불굴의 몽골 영웅도 사인 테긴처럼 병석에 들어눕게 되었다.

카불 칸은 자신의 일곱 아들들 대신 6촌 동생 암바가이[3]를 후계자로 내정했다. 훗날 카불 칸의 4남 쿠툴라 칸암바가이 칸의 뒤를 이어 카마그 몽골의 칸이 되었다. 카불 칸이 병으로 죽어갈 때, 암바가이와 몽골인들은 타타르족 주술사를 초청했으나, 그는 죽어가는 칸을 살릴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카불 칸의 친척들은 칸이 죽자 마자 타타르인 주술사를 살해했다. 타타르인들은 주술사 살해에 앙심을 품게 되었다. 금나라의 통치자들은 카불 칸의 죽음을 북방 유목민간의 대립 및 갈등의 기회로 보았다.


[1] 海拉爾, 해랍이. 중국 내몽골 자치구 동북부 지역에 있는 도시. 하이라얼 강(海拉爾河)과 이민 강(伊敏河)의 합류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대싱안링 산맥(大興安嶺山脈) 서쪽에 위치하고 있어 러시아와 연결되는 도시로 발달했다.[2] 훗날 몽골제국을 새우는 칭기즈 칸의 아내인 보르테 우진이 옹기라트부 출신이다.[3] 카이두 - 차남 차라카이 링쿠(치르카 린후아) - 셍굼 빌게 - 암바가이 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