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4db1> 카마그 초대 칸 合不勒 | 합부륵 | |
묘호 | 없음 |
시호 | 없음 |
성 | 보르지긴(Боржигин) 孛兒只斤(패아지근) ᠪᠣᠷᠵᠢᠭᠢᠨ |
휘 | 카불 合不勒(합부륵) |
부친 | 툼비나이 세첸 |
생몰 | 1084/85? ~ 1149? |
재위 | 카마그 초대 칸 |
12세기 초 ~ 11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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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르지긴 오복(oboq, 몽골 성씨) 출신으로, 카마그 몽골의 족장 카이두의 장남 바이 싱코르 독신(Bai shinkhor Dogshin)의 손자였고, 툼비나이 세첸의 장남이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칭기즈 칸의 증조부였다.2. 생애
12세기 초, 몽골부의 보르지긴씨(孛兒只斤氏) 귀족 카불(合不勒)이 주변의 10여 개 부락과 씨족을 통일하고, 카마그 몽골이라는 부락연맹을 건립하여 최초의 '칸'이 되었다.[1] 이는 각각의 독립적인 우두머리가 있는 씨족으로 구성된 연합체였다. '칸'은 맹주였고, 맹주 아래 각 씨족의 우두머리 또는 추장이 있었다. 이 연맹이 탄생한 날로부터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몽골부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몽골부는 나중에 칭기즈 칸이 건립하게 되는 대몽골 제국의 전신이었다.카불 칸은 신흥 제국이었던 생여진 완안부의 금나라를 침략했으나, 남송 원정을 떠난 금나라는 카불의 몽골 군대를 상대하지 못했다. 뒤에 금태종(1123년~1135년 재위)이 회군하자, 카불 칸은 금나라로 가 종주권을 인정하고 귀환했다. 하지만 1135년부터, 카마그 몽골은 카불 칸의 지휘하에 금나라의 북부 국경에서 계속 규모가 비교적 큰 습격전을 일으켰다. 이때 이미 동아시아 최강의 패권국으로 성장해 있었던 금나라는 오랫동안 이어진 이 초원 부락의 도발을 용납하지 않았다. 금나라는 1139년, 그리고 그 후 1147년 두 번에 걸쳐 카마그 몽골에 대한 대규모의 전쟁을 일으켰다. 원정의 결과는 전혀 예상 밖이었다. 연전연승의 여진족 철기가 인원도 많지 않은 몽골인들에게 패배한 것이었다. 그것도 엉망진창으로. 어쩔 수 없이 금나라는 카마그 몽골에 화해를 청했다. 협상을 거쳐, 금나라는 하이라르[2] 이북 27곳의 단채(團寨)를 할양하고, 매년 카마그 몽골에 대량의 소, 양, 곡물을 보내기로 했으며, 몽골의 독립국가 지위를 인정했다. 이렇게 하여 카마그 몽골은 크게 기세를 드높이게 되었다.[3][4]
한편 대흥안령 산맥 서록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옹기라트[5]는 몽골족의 한 갈래였다. 또한 비교적 큰 부락연맹이기도 했다. 다만 당시 통일된 지도자가 없어, 몇몇 서로 다른 씨족의 우두머리들이 느슨하게 통치하고 있었다. 그래서 5대 부족인 메르키트, 타타르, 카마그 몽골, 케레이트, 나이만과 비교하면 실력의 차이가 컸다. 5대 부족처럼 강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옹기라트인들은 강자들의 틈새에서 생존하는데 뛰어났다. 그들은 한편으로 자신들의 동쪽에 있는 금나라 및 타타르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동시에 그들 서쪽의 이웃 부족인 카마그 몽골과도 통혼 관계를 유지했다. 어느 한쪽에도 밉보이지 않는 호인의 역할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무골호인 같은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하게 성격이 불과 같은 두 이웃 부족 사이의 반세기 동안 이어지는 전쟁의 불꽃을 일으키게 했고, 이로 인해 막북 초원은 격렬한 분쟁에 휩싸이게 되었다.
사건의 발단은 한 남자 때문이었다. 옹기라트부의 사인 테긴(賽因的斤)은 너무나도 평범한 노인이었다. 이 보통의 노인이 어느날 병이 들어 병석에 눕게 되었다. 사인 테긴의 가족은 큰 돈을 들여 이웃 타타르부에서 유명한 의원인 샤먼교의 무당을 데려왔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이 명의를 부른 후, 환자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다. 결국 사인 테긴은 죽고 말았다. 사망자의 가족들은 사인 테긴이 무당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그 무당에게 뭐라고 말하지 못했다. 다만 한 사람은 성깔이 있었다. 바로 사망자의 누나의 남편이었던 카마그 몽골의 카불 칸이었다. 원래 카불 칸은 옹기라트부로 와서 사인 테긴의 병세가 어떤지 보려고 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카불 칸은 분노하여 타타르족의 무당을 죽여버렸다. 이렇게 되니 타타르인들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병력을 이끌고 와서 그들의 무당을 위해 복수하겠다고 했다. 카불 칸의 아들 7명은 부친보다도 성격이 더 불같았다. 그 소식을 듣고 즉시 카불 칸을 돕기 위해 달려와서 타타르인들과 전투를 벌였다.
이 몽골-타타르 전쟁은 금나라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금나라 조정은 이번 기회에 몽골과 타타르 양대 세력이 서로 죽고 죽이게 만들어 그들이 남쪽으로 발전하지 못하게 막을 좋은 기회라 여긴 것이었다. 당시 카마그 몽골인은 금나라의 가장 두려운 적수였으므로, 금나라의 희종은 타타르를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하여 금나라와 타타르가 연합하여 공동으로 카마그 몽골에 대항하게 되었다. 금나라가 막대한 재력을 지원하고, 온갖 방법으로 계속 선동하다보니, 몽골-타타르 전쟁은 여러 해 동안 이어졌다. 그리하여 양대 부족은 모두 엄청난 희생을 치르게 되었다. 어부지리를 노리던 금나라 황제는 기뻐해 마지 않았다. 카불 칸은 용맹했지만, 여러 해동안 끊임없이 이어지는 전쟁을 겪다보니 그도 체력이 더 이상 받쳐주지 못했다. 결국 어느 날 이 불요불굴의 몽골 영웅도 사인 테긴처럼 병석에 들어눕게 되었다.
카불 칸은 자신의 아들 7명 대신 6촌 동생이었던 암바가이[6]를 칸위 후계자로 내정했다. 훗날 카불 칸의 4남 쿠툴라가 억울하게 살해당한 암바가이 칸의 뒤를 이어 카마그 몽골의 제3대 칸이 되었다. 카불 칸이 병으로 죽어갈 때, 암바가이와 몽골인들은 타타르족 주술사를 초청했으나, 그는 죽어가는 칸을 살릴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카불 칸의 친척들은 칸이 죽자 마자 타타르족 주술사를 살해했다. 타타르인들은 주술사 살해 때문에 카마그 몽골을 증오하게 되었다. 한편 금나라의 통치자들은 카불 칸의 죽음을 북방 유목민간의 대립 및 갈등의 기회로 보았다.
3. 평가
카불 칸 이전의 몽골족 역사는 제대로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카불 칸의 조상들 역시도 카불 칸의 증조부인 카이두를 제외하면[7] 이렇다할 대단한 행적이 없다. 그러나 카불 칸은 몽골족에서 칸위에 오른 것으로 확인되는 인물이며, 그만큼 강대한 세력을 일구었다. 유목민족이 다 그렇듯이 그 흥륭도 어디까지나 카불 칸 당대에 그치긴 했지만, 그래도 카불 칸의 치세때 카마그 몽골은 일시적으로 금나라에게서 물자를 받아내기까지 하는 강대한 세력이었다.또한 카불 칸은 이후로도 몽골의 원칙이 되는 몽골족의 국가, 보르지긴 씨족의 지배, 쿠릴타이에 의한 선출제를 만들었다고 한다. 한 마디로 칭기즈 칸이 몽골을 제국으로 변모시킨 시조였다면 카불 칸은 그에 앞서서 몽골족의 뼈대를 세웠던 시조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인지도는 증손자인 칭기즈 칸에 비해 압도적으로 밀리지만 그래도 몽골족의 역사에서 빼놓고 볼 수는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실제로도 몽골어 위키백과에서는 카불 칸을 이르러 몽골의 역사에서 큰 업적을 남겼으며, 그가 없었다면 몽골의 통일은 느려졌을 것이라면서 몽골 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인물로 호평한다. 혈통에 대한 집착이 엄청난 유목사회를 감안해보면 몽골을 통일하여 칸위에 오른 카불 칸과 그 혈연에 대한 권위가 보통이 아니었을테니 그 후손인 칭기즈 칸이 덕을 본 것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말도 틀린건 아니고.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카불 칸의 능력은 확실히 후손인 칭기즈 칸만은 못했다는 것이다,[8] 몽골어 위키백과에서도 결국은 기반을 마련했다고 했지, 카불 칸이 통일을 이루었다고는 말하고 있지 않다. 카불 칸이 애써 키운 카마그 몽골은 이미 그의 치세 말기에 한계를 보여주었고, 결국 사후 10여년 만에 붕괴되는 결말을 맞았다. 이후 몽골이 다시 통합되기까지는 40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부족 내에서의 권위도 그의 증손자만 못했는지, 칭기즈 칸은 자기 아들에게 권력을 물려주는데 확실히 성공했지만 카불 칸은 그의 6촌이라는 비교적 먼 친척에게 물려줬고, 훗날 그의 아들 쿠툴라가 결국 칸이 되긴 했지만 오래못가 죽었으며, 그 다음에는 수십년 동안 칸이 없다가 칭기즈 칸이 등장하면서 몽골의 칸위는 카불 칸의 후손이 확고하게 차지하게 되었다.
[1] 카불 칸만이 아니라 이 시기에는 몽골 일대의 몇몇 부족들이 자립하여 칸을 칭하고 독립적인 세력을 일구는데 타타르, 나이만, 케레이트, 타타르 역시도 이 시기에 독자적인 세력을 일구었다. 시기상 요나라가 망하고 금나라가 들어서는 과정에서 기존 요나라 지배하에 있던 부족들이 그 영향력에서 벗어났기 때문으로 보인다.[2] 海拉爾, 해랍이. 중국 내몽골 자치구 동북부 지역에 있는 도시이다. 하이라얼 강(海拉爾河)과 이민 강(伊敏河)의 합류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싱안링 산맥(大興安嶺山脈) 서쪽에 위치하고 있어 러시아와 연결되는 도시로 발달했다.[3] 대금국지에 따르면 이 때 카불 칸은 스스로를 초원황제(祖元皇帝)라 자칭하고 천흥이란 연호를 사용했다고 하는데 다만 이게 원나라 때에 쓰여진 것이고 본디 쿠빌라이는 주역에 나오는 단어인 건원에서 국호를 따온 만큼 근본없는 국호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이렇게 기록했을지도 모른다.[4] 다만 이런 카불 칸을 난감하게 만든 숙적도 없지는 않았는데 메르키트의 지도자인 투두르 빌게 테긴(톡토아 베기의 아버지)은 카불 칸은 물론 그 아들인 쿠툴라 칸까지도 이긴 바 있다.[5] Onggirad, 弘吉剌, 콩기라트, 쿵크라트, 온기라트. 훗날 몽골 제국을 새우는 칭기즈 칸의 아내인 보르테 우진이 옹기라트부 올쿠누드 씨족 출신이었다.[6] 카이두 - 차남 차라카이 링쿠(치르카 린후아) - 셍굼 빌게 - 암바가이 칸[7] 카이두때 몽골족의 세력이 많이 강해졌다.[8] 칭기즈 칸은 생전에 자신만만하게 우리 역사에서 지금처럼 넓은 영토를 가진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이 글을 남긴 시점에서는 틀렸지만 칭기즈 칸 사망 당시의 몽골 영토는 확실히 이전의 흉노 및 돌궐과 비교해도 굉장히 넓었다. 심지어 이 정복 사업은 칭기즈 칸의 손자대까지 멈추지 않고 추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