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07 19:25:53

코바동가 전투

코바동가 전투
Battle of Covadonga
Batalla de Covadonga
레콩키스타의 일부
파일:코바동가의 돈 펠라요 국왕.jpg
▲ 루이스 데 마드라조, 코바동가의 돈 펠라요 국왕(1855)
날짜
718년 또는 722년
장소
현재의 스페인, 코바동가 근방의 피코스 데 에우로파[1]
원인
우마이야 왕조이베리아 반도 정복에 저항하는 펠라요의 기습
교전국 파일:아스투리아스의 라미로 1세의 어기.png 아스투리아스 왕국 파일:1280px-Umayyad_Flag.svg.png 우마이야 왕조
지휘관 파일:아스투리아스의 라미로 1세의 어기.png 펠라요파일:1280px-Umayyad_Flag.svg.png 우스만 이반 나이사†
파일:1280px-Umayyad_Flag.svg.png 알 카마†
결과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승리
영향
우마이야 왕조이베리아 반도 정복 저지
아스투리아스 왕국 건국
레콩키스타의 시작
병력 300명 미만
아스투리아스인 민병대
불명
피해규모 불명사상자 1,000명 이상
1. 개요2. 배경3. 전투 경과4.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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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기 722년[2] 여름 아스투리아스 산맥의 코바동가 마을[3] 근처에서 펠라요가 이끄는 고트족이 이슬람군을 기습 섬멸한 전투. 알안달루스 시기 이베리아 반도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스투리아스 왕국이 탄생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전투이다.

2. 배경

서기 711년, 타리크 이븐 지야드가 이끄는 우마이야 왕조군은 과달레테 전투에서 로데리쿠스 왕이 지휘하는 서고트 왕국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타리크가 이끄는 이슬람 전사들은 기세를 이어가 서고트 왕국의 수도 툴레도를 함락하였고, 713년 사라고사를 거점으로 삼아 대항하던 아길라 2세를 잡아 죽였다. 고트 귀족들은 오랫동안 내전을 치렀기 때문에 침략자들에게 대항할 여력이 없었고, 테오도미르 같은 몇몇 귀족은 아예 이슬람군과 동맹을 맺고 자치권을 누리는 대가로 침략자들을 도와주기도 했다.

이리하여 이슬람군은 10년도 안 되어 이베리아 반도를 '거의' 석권했다. 하지만 딱 한 지역 만은 복속되지 않았으니, 바로 이베리아 반도 북서부에 위치한 아스투리아스 산맥이었다. 9세기 경 익명의 모사라베(Mozarabs: 무슬림이 통치하는 이베리아 반도에 거주하는 그리스도교인)의 기록에 따르면, 서고트인들은 이 지역으로 피신한 뒤 서기 718년경에 펠라요를 지도자로 선출했다고 한다. 펠라요는 서고트 전 국왕 에기카(687~702 재위)의 궁정에서 고관으로 일했던 파빌라의 아들로, 아스투리아스 칸가스 데 오니스에 본부를 세우고, 우마이야 왕조에 대한 봉기를 선동했다.

서기 720년, 대규모의 이슬람군이 투입되어 아스투리아스 산맥을 장악하였고, 펠라요는 여러 차례 패배한 뒤 산 속 깊숙히 숨었다. 이때 그를 따르는 병력은 아마도 300명 미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침략군이 세운 숙영지를 종종 습격하고, 보급물자를 싣고 가던 마차를 탈취하고, 고급 장교를 암살하는 등 저항을 꿋꿋이 이어갔다. 때마침 이슬람 지배자들이 지즈야를 2배 인상하는 조치를 취한 것에 반감을 품은 기독교 신자들이 호응하였고, 아스투리아스 일대를 다스리던 무슬림 관리는 안전을 위해 피신해야 했다.

이슬람 세력은 처음엔 산악 지대에서 일어난 소규모 저항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721년 7월 9일 피레네 강을 건너 프랑크 왕국을 침공한 이슬람군이 툴루즈에서 아키텐 영주 오도에게 패배한 사건이 벌어졌다. 원정군을 파견한 왈리(wali: 아랍인 주(州) 장관) 움바사 이븐 수하임 알 카르비는 패배로 인해 떨어진 군대의 사기를 올리는 차원에서 아스투리아스의 반란을 진압하기로 했다.

3. 전투 경과

722년 여름, 우마야드 왕조군 지휘관 알 카마와 무누자가 진압군을 이끌고 아스투리아스 산맥으로 출동했다. 병력 규모가 얼마나 되는 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천 명 이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펠라요와 그의 소규모 부대는 깊은 산속으로 후퇴하다가 코바동가 마을 인근의 좁은 계곡에 숨었다. 그곳은 길이 무척 좁고 지형이 험준해서, 수적 우위를 활용하여 공격하는 게 불가능했다. 펠라요는 이곳에 병사들을 매복시키고 적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이슬람군이 협곡에 들어서자, 협곡 양쪽에 숨어 있던 펠라요의 전사들이 화살을 퍼부어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이슬람군은 급히 퇴각했지만, 곧이어 들이닥친 고트족 군대에 의해 거진반 궤멸되었다. 지휘관 알-카마 본인은 퇴각하던 중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이리하여 코바동가 전투는 펠라요의 승리로 끝났다.

4. 결과

코바동가 전투 소식은 아스투리아스 산맥에 거주하던 사람들에게 빠르게 알려졌다. 그들은 즉시 호응하여 펠라요의 군대에 가담하였고, 펠라요는 증가한 병력을 이끌고 또다른 병력을 조직하여 진군하고 있던 무누자의 부대를 습격해 무누자를 전사시켰다. 이후 펠라요는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건국하여 초대 국왕으로 즉위했고,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이슬람의 지배로부터 탈출한 기독교 신자들의 은신처 역할을 맡았다. 이 왕국은 후에 벌어질 레콩키스타의 발판이 된다.


[1] 아스투리아스 지역에 있는 작은 산맥의 이름이다.[2] 718년이라는 설도 있다.[3] 아스투리아스 주도 오비에도에서 동쪽으로 100여 km 거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