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CCDDD1><colcolor=#000000> 러시아 제국의 대공비 크세니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Великая княгиня Ксения Александровна Росси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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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크세니야 알렉산드로브나 로마노바 (Ксения Александровна Романова) | |||
출생 | 1875년 4월 6일 | |||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아니치코프 궁전 | ||||
사망 | 1960년 4월 20일 (향년 85세) | |||
영국 리치몬드어폰템스 햄프턴 궁전 | ||||
배우자 |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대공 (1894년 결혼 / 1933년 사망) | |||
자녀 | 이리나[1], 안드레이, 표도르, 니키타, 드미트리, 로스티슬라프, 바실리 | |||
아버지 | 알렉산드르 3세 | |||
어머니 | 덴마크의 다우마 공주 | |||
형제 | 니콜라이 2세, 알렉산드르, 게오르기, 미하일, 올가 | |||
종교 | 러시아 정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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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의 여대공이자 대공비. 니콜라이 2세의 첫째 여동생이다. 괴승 그리고리 라스푸틴을 죽인 펠릭스 유수포프의 장모이다. 영국 국왕 조지 5세와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10세, 노르웨이 국왕 호콘 7세, 그리스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의 사촌이다.2. 생애
2.1. 어린 시절
1875년 태어났다. 6살 때 할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하고 아버지 알렉산드르 3세가 황제로 즉위하였다. 테러의 위협에 시달린 정치적으로 어려운 시기였다. 보안상의 이유로 알렉산드르 3세는 가족과 함께 겨울 궁전에서 가치나 궁전으로 이사했다.어머니와 크세니아 |
그곳에서 크세니야와 그녀의 형제 자매들은 간이 침대에서 자고, 오전 6시에 일어나고, 매일 아침 냉수 목욕을 하는 비교적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들의 방은 편안하면서도 간소하게 꾸며져 있었다.
2.2. 결혼 생활
알렉산드르와 크세니아 |
크세니야는 같은 러시아의 황족이자 친당숙인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대공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다. 알렉산드르가 해군 복무로 멀리 떠날 때 편지를 자주 보냈다. 알렉산드르 역시 크세니야에게 호감을 가졌다. 또한 크세니야는 러시아의 황족으로 남고 러시아를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다.
부모인 알렉산드르 3세와 덴마크의 다우마 공주는 처음엔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했다. 당시 크세니야의 나이는 아직 15세였기에 결혼을 하기엔 이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였다. 그렇지만 얼마 안가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된 알렉산드르 3세가 죽기 전에 딸의 결혼식을 보고 싶어했으며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결혼을 허락하게 되었다. 그렇게 크세니야와 알렉산드르는 1894년 결혼했고 신혼여행 중에 부친인 알렉산드르 3세가 사망했다.
남편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대공과 슬하에 6남 1녀를 두었다. 당시 러시아 황실의 같은 세대에서 아들을 6명 이상 낳은 건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 부부와 크세니야 부부 두 쌍이였다. 그녀의 자식들 중 맏이이자 고명딸인 이리나 알렉산드로브나 로마노바는 황위에 대한 권리를 스스로 포기한 채 러시아의 귀족이자 훗날 라스푸틴을 살해한걸로 유명한 펠릭스 유수포프와 결혼했다.
그러나 행복했던 결혼 생활도 1907년에 파탄났다. 이미 부부는 권태기가 왔고, 알렉산드르 대공은 역시 피는 못 속인다고 정부들을 두었다. 이런 남편의 행동에 크세니야 역시 크게 반발하여 똑같이 정부들을 두었다. 보통 다른 대공비들이라면 참고 살았겠지만 크세니야는 황제의 딸이자 전 황녀이며 직계 여대공이기도 했기에 참고 살지 않았다.
2.3. 말년과 사망
그러던 중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발발했다. 큰 오빠네 가족들부터 많은 황족들이 볼셰비키에게 처형당할때 크세니야는 그녀의 아들들과 어머니 덴마크의 다우마 공주 및 다른 로마노프 가문 수십명과 함께 1919년 4월 영국의 HMS 말버러 호를 타고 크림반도에서 흑해를 거쳐 몰타로 이동한 후, 그곳에서 HMS 로드 넬슨 호를 타고 영국으로 망명했다. 이미 남편 알렉산드르 대공은 1918년 2월에 얄타에서 장남 안드레이와 그 부인 등과 함께 HMS 포사이트를 이용해 프랑스로 이동하여 망명했다.1925년부터는 조지 5세가 제공한 프로그모어 코티지에서 살았고, 1933년 남편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대공이 프랑스에서 사망하면서 남편을 먼저 떠나보냈다. 1937년부터는 햄프턴코트 궁전의 와일더니스 하우스[2]에서 지냈다.
1950년경의 크세니아와 친지들 [3] |
1960년 영국에서 향년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4][5] 유언에 따라 유해는 프랑스의 로크브륀카프마르탱으로 옮겨져 남편의 옆에 안장되었다.
3. 가족관계
3.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colbgcolor=#FFE4E1,#330500> 크세니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Великая княгиня Ксения Александровна России) | <colbgcolor=#fff3e4,#331c00> 알렉산드르 3세 (Император Александр III) | <colbgcolor=#ffffe4,#323300> 알렉산드르 2세 (Император Александр II) | |
니콜라이 1세 (Император Николай I) | |||
프로이센의 샤를로테 (Prinzessin Charlotte von Preußen) | |||
헤센의 마리 (Prinzessin Marie von Hessen und bei Rhein) | |||
헤센 대공 루트비히 2세 (Ludwig II., Großherzog von Hessen) | |||
바덴의 빌헬미네 (Prinzessin Wilhelmine von Baden) | |||
덴마크의 다우마 (Prinsesse Dagmar af Danmark) | |||
크리스티안 9세 (Christian IX) | |||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빌헬름 (Friedrich Wilhelm, Herzog von Schleswig-Holstein-Sonderburg-Glücksburg) | |||
헤센카셀의 루이제 카롤리네 (Prinzessin Luise Karoline von Hessen-Kassel) | |||
헤센카셀의 루이제 (Louise von Hessen-Kassel) | |||
헤센카셀의 빌헬름 (Wilhelm von Hessen, Landgraf von Hessen-Kassel-Rumpenheim) | |||
덴마크의 샤를로테 (Prinsesse Louise Charlotte af Danmark) |
3.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녀 | 이리나 알렉산드로브나 공녀 (Princess Irina Alexandrovna) | 1895년 7월 15일 | 1970년 2월 26일 | 펠릭스 유수포프 슬하 1녀 |
1남 | 안드레이 알렉산드로비치 공자 (Prince Andrei Alexandrovich) | 1897년 1월 24일 | 1981년 5월 8일 | 엘리사베타 디 사소 루포[6] 슬하 2남 1녀 |
나딘 맥두걸 슬하 1녀 | ||||
2남 | 표도르 알렉산드로비치 공자 (Prince Feodor Alexandrovich) | 1898년 12월 23일 | 1968년 11월 30일 | 슬하 1남 1녀 |
3남 | 니키타 알렉산드로비치 공자 (Prince Nikita Alexandrovich) | 1900년 1월 17일 | 1974년 9월 12일 | 마리아 보론초바다시코바 여백작 슬하 2남 |
4남 |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 공자 (Prince Dmitri Alexandrovich) | 1901년 8월 15일 | 1980년 7월 7일 | 슬하 1녀 |
셰일라 맥켈라 치좀 | ||||
5남 | 로스티슬라프 알렉산드로비치 공자 (Prince Rostislav Alexandrovich) | 1902년 11월 24일 | 1978년 7월 31일 | 슬하 1남 |
슬하 1남 | ||||
헤트비히 마리아 게르트루트 에바 폰 차푸이스 | ||||
6남 | 바실리 알렉산드로비치 공자 (Prince Vasili Alexandrovich) | 1907년 7월 7일 | 1989년 6월 24일 | 나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골리치나 슬하 1녀 |
4. 여담
- 하루는 사촌 올케 영국의 메리 왕비의 초대를 받았는데 메리가 가지고 있던 보물 중에 원래 크세니야의 소유였던 보물이 있었다고 한다. 알렉산드르 대공과 결혼할 당시 결혼 선물로 파베르제의 달걀을 받았다고 하는데[8] 이게 난리통에 메리의 손에 들어가게 된 것. 물론 나라 잃고 가문도 몰락하고 더부살이하는 신세라 원래 자기 것이었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 다른 야사에서는 메리가 파베르제의 달걀을 보여주며 감상을 묻자 크세니아가 '내 책상 위에 놓여있던 것'이라 대답했고 메리는 아무 말 없이 다시 상자에 넣었다고도 한다.
- 영국생활 초반의 재정 상황은 좋지않았다. 가지고 온 보석이 빠르게 줄어들었을뿐 아니라, 미국인 사업가의 잘못된 투자권유로 돈을 날리기도 했다. 이종사촌인 조지 5세가 프로그모어 코티지에 사는 것을 허락해준 후에는 제법 평온한 삶이었고, 1928년 사망한 마리야 황태후에게서 저택과 보석을 상속받아 형편이 그나마 나아졌다. 크세니아가 사망시 남긴 유산은 117,272파운드 16실링과 2펜스였고, 2개의 보석앨범들이 아직 남아있었다.
[1] 펠릭스 유수포프의 아내다.[2] 18세기에는 왕실 정원사의 거처로 사용되던 곳이다.[3] 그리스와 덴마크의 테오도라 공주의 장녀 바덴의 마르가리타 공녀, 3남 니키타의 아들인 손자 알렉산데르 니키티치, 장남 안드레이의 늦둥이 딸인 손녀 올가이다.[4] 공교롭게도 여동생 올가도 같은 해 때 사망했다. 여담으로 크세니야는 알렉산드르 3세와 다우마 황후의 자녀들 중에서 유이하게 오촌 조카 에드워드 8세와 조지 6세, 육촌 손녀 엘리자베스 2세의 즉위를 지켜 본 인물들 중 한 명이었다.[5] 요절하거나 볼셰비키에 의해 살해 당한 오빠 가족들과 남동생과 비교하면 어머니 덴마크의 다우마 공주와 여동생 올가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과 마찬가지로 장수했다.[6] 2차 세계대전 영국 본토 항공전 중 런던 폭격의 여파로 사망했다.[7] 알렉산드르 2세의 손녀(막내아들 파벨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이 귀천상혼으로 낳은 1남 2녀 중 장녀). 표도르에겐 부계로는 육촌이고 모계로는 오촌이다.[8] 그래서 해당 파베르제의 달걀에는 크세니야의 첫 글자인 'K'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