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타게 엘란데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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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웨덴의 제25대 총리였던 타게 엘란데르의 일생에 대해 서술한 문서.
2. 초년
1901년 6월 13일, 스웨덴 베름란드 주의 작은 마을인 란세테르에서 태어났다. 기존의 성씨는 스웨덴에서 가장 흔한 안데르손이었으나, 그의 아버지인 안데르스 엘란데르손(Anders Erlandersson)의 이름을 따서 오늘날의 엘란데르로 바꾸었다고 한다.부친은 국민학교 교사였던 에리크 구스타프 엘란데르(1859-1936)이며, 청년기에 신앙부흥운동에 빠졌었다고 한다. 모친은 알마 엘란데르[1](1869-1961)이다. 어린 시절 란세테르의 한 교회 서기의 전형적인 스웨덴 목조주택의 특징을 띄는 붉은 색으로 칠한 방 두 개짜리 사택에서 살았다고 한다. 이 사택의 뒤로는 1600년대에 지어진 교회와 둘레에 벽이 쳐진 묘지를 볼 수 있었다. 어린시절 가정의 분위기는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자유주의의 분위기를 띄었고, 경전주의의 조용하지만 힘에 겨운 도덕주의가 돋보였다고 전해진다.
어린 시절 형이 열여덟이라는 나이로 죽고 나서 가족의 큰 기대를 받았다. 이런 이유에서 당시에 타게를 괴롭히던 아이들에게 그의 어머니는 아래와 같이 말했다고 한다.
"타게를 조심스럽게 대해줘. 그 애한테 돈이 많이 들었다."
이런 가족의 노력과 기대에 부응하듯, 그는 1920년, 칼스타의 인문중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같은 해에 스웨덴에서도 손꼽히는 명문대학교인 룬드 대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감으로써 아버지 때부터 오르기 시작한 계급의 사다리를 완성했다. 원래 그는 화학이나 물리학과 같은 자연과학 과목을 공부했지만, 통계학이나 경제학과 같은 사회과학 과목을 선호하며 점차 자연과학에서 사회과학으로 넘어갔다. 대학 시절이던 1923년에 대학교 수학모임에서 미래의 아내인 아이나 엘란데르를 만나게 된다. 이후 1928년에 학위를 마친 뒤, 같은 해, 말뫼에 있는 스웨덴 백과사전(Svensk upplagsbok)에서 편집부원으로 근무했다.
스웨덴 사회민주노동자당에는 룬드 대학교에서 졸업을 앞둔 1928년에 가입한다. 사후 출간된 일기에서 그는 1923년에 있었던 룬드 외곽 농업 노동자 파업의 경찰의 잔혹했던 과잉진압을 본인의 정치적 세계관을 형성하고 기존에 고수했던 급진적 자유주의를 포기하도록 이끈 경험으로 서술하였다. 이당시에는 또한 문화적 급진주의 학생회 "젊은 친구들(De Yngre Gubbarna)"의 회장으로 활동하며 학생 정치에서 활동했다.
3. 정계 입문 후
그의 길고 긴 정치 인생은 1930년 룬드 시의회에 선출되었을 때부터 시작된다. 룬드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다양한 조직과 운동에 관여하게 되며, 사회적, 정치적 문제에 대한 관심을 쌓았던 것이 그가 정치에 입문하는 데에 크게 작용했다고 평가받는다. 당시 시의원에 당선되며 지방에서 정치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러한 경험들은 훗날 그가 스웨덴 총리로서 재임할 때에 뛰어난 업무 수행 능력 등으로 나타난다.[1] 혼전 성씨는 닐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