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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위안 병공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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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위안 병공창의 75mm 94식 산포 생산 공정

1. 개요2. 역사
2.1. 설립과 확장2.2. 근현대 중국 포병대의 산실2.3. 1930년대2.4. 중일전쟁국공내전2.5.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이후
3. 현대

1. 개요

太原兵工廠 (태원병공창)
산시성 타이위안시에 소재한 염계군벌조병창. 동북군의 동3성 병공창에 뒤이은 생산 능력을 갖춘, 중화민국의 대표적인 군수공장이다.

2. 역사

2.1. 설립과 확장

1898년 청나라 시기 산시성 태수 후빙지(胡聘之)가 설치하였다. 초기에는 시설이 매우 열악하여 한 달에 총 몇 자루를 수리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옌시산이 산시성의 패권을 장악하고 나서 본격적으로 발전한다. 군벌 간의 전쟁이 격화되자 옌시산은 자신의 군대를 자체적으로 무장할 필요를 절감했고, 중국 각지와 해외에서 기술과 자본을 도입하여 중국 유수의 군수공장으로 재탄생시켰다.

산시성은 청나라 때부터 상업으로 유명한 지역이었고, 바로 그 산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던 옌시산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일을 거들며 금융 감각과 사업가적인 기질을 키웠다. 그가 안정적으로 산시성의 경제를 진흥할 수 있던 것은 이 덕이다. 1917년 산시의 독군이 된 그는 우선적으로 동원국(銅元局)과 철기국(鐵器局)을 세워 산시 내의 자체적인 통화를 발행했다. 원래 민국 초 지방의 통화는 해당 지방에서만 유통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옌시산은 몰래 산시 통화를 다른 성에도 몰래 유통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모은 자금을 다시 군수 산업에 투자함으로써 병공창을 확대했다.

운영 초기에는 주로 소모품인 탄약과 수류탄의 생산에 집중하였다. 군벌군들은 보병 위주였기에 병공창에서 생산하는 수많은 수류탄들로 무장한 산시군은 강한 충격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1923년 화약 공급이 부족해지자 옌시산은 인근에 화약 공장을 세워 생산량을 확충했다. 그리고 곧 대포나 기관총과 같은 장비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옌시산의 질산공장은 중국 내에서 가장 양질의 화약을 생산하는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

2.2. 근현대 중국 포병대의 산실

그렇게 확대된 타이위안 병공창은 중국 내에서 자체적으로 야포와 포탄을 생산 가능한 몇 안 되는 공장 중 하나였다. 특히 1920년대부터 타이위안에서 복제 생산한 일본 41식 산포는 현대 중국 포병대의 최초 제식 무기라고 할 수 있었다. 당시 안휘군벌의 맹주였던 돤치루이는 1차 대전에 협상국 측으로 가담한 대가로 일본에게 41식 산포를 지원받았고, 그는 곧 휘하 병공창들에서 복제 생산을 시도한다. 이 중 대표적인 곳이 당시까지만 해도 안휘에 충성하고 있던 옌시산의 타이위안이었다. 다만 당시까지만 해도 중국의 기술적 후진성으로 인해 포강은 자체적으로 수급하지 못하여 일본에서 꾸준히 수입하였다.

1930년대에 중국은 바이마르 공화국과의 밀월 관계를 통해 독일제 105mm, 150mm 중포를 들여 왔지만, 견인 가능한 차량이 없어 운용상의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부품 또한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했기 때문에 이들은 중일전쟁 발발 초기에 거의 유실되고 말았다. 그러나 타이위안 주도로 생산한 41식 산포는 가벼워 방열과 이동이 용이했다. 자체적으로 부족분을 생산하거나 망실된 부품을 수급할 수도 있었고, 여차하면 일본군의 것을 노획할 수도 있었다. 이렇게 타이위안에서 생산한 야포들은 중국 내의 세력을 가리지 않고 널리 퍼졌다. 심지어 산시군의 적이었던 팔로군 역시 노획한 산시군 산포로 무장했고, 이는 이들이 훗날 중국 인민해방군이 되어 한국 전쟁에 참전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전성기는 장제스의 북벌 시기인 1920년대로, 약 15000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었다. 북벌과 제남 사건 당시 국민혁명군 총사령부 군계처 통계과장으로서 전군의 보급을 감독하던 위치에 있었던 김홍일 중장의 회고에 따르면, 타이위안 공장은 국민혁명군의 야포탄 생산 또한 도맡았다고 한다.[1] 중화기 숫자가 부족하던 국민혁명군에게는 포탄 재생이 가능한 공장이 타이위안 병공창밖에 없었다. 중순양함 주포를 상회하는 수준의 일본제 240mm 중포까지 시험 생산하던 동3성 병공창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타이위안 병공창의 이러한 생산 능력은 염계군벌과 국민정부에 있어 매우 귀중한 것이었다. 동3성 병공창은 곧 만주국 산하에 편입되면서 일본의 공장이 되었고 상하이 병공창은 상하이 사변 직후 주요 시설을 내륙으로 이전했기에, 타이위안 병공창의 가치는 남달랐다.

2.3. 1930년대

그러나 1930년대 초 중원대전에서 옌시산이 패배하면서 엉망이 된 산시성의 상황 탓에 공장의 규모는 대폭 축소된다. 장제스의 패권이 강화되고 국민당의 군벌 통제가 심화되면서, 타이위안 병공창 또한 영향을 받게 된다. 이 병공창은 옌시산의 힘의 근원 중 하나였고, 장제스는 이곳을 중앙정부 하의 시설로 국유화하고자 시도했다. 그러자 옌시산은 공장을 민영화한 후 여타 민간 용품 또한 같이 생산하면서 중앙의 장악을 회피했다. 그리고 이를 기회 삼아 병공창의 사업을 전에 없이 더욱 확장했다. 이때 세워진 서북산업공사(西北实业公司)는 비단 군수공업 뿐만 아니라 광업, 제철업, 시멘트 제작, 제분소 등 수많은 업종을 다루며 산시의 번영에 기여했다.

2.4. 중일전쟁국공내전

중일전쟁이 벌어지자 일부 시설들은 섬서성과 쓰촨 지역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산시에 남은 대부분의 시설은 일본에 의해 점령되어 가동되지 못하였다. 특히 제련 시설의 경우 일본이 아예 해체해서 본국으로 가져갔을 정도다.

병공창은 2차 대전 종전 이후에야 다시 재가동되었으며, 국공내전을 맞아 중화민국 국군의 주요 공장으로 다시 자리매김한다. 이 당시에는 1달에 민국 24년식 소총 3000정과 ZB26 기관총 300정, 맥심 기관총 60정과 8문의 75mm 산포를 생산 가능했다. 특히 옌시산은 일본군이 남기고 간 94식 산포들을 민국 36년식 산포라는 이름으로 복제 생산했는데, 94식과 36식은 국공내전 당시 양측이 가장 많이 사용한 포병 장비였다.

2.5.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이후

1948년 공산당이 타이위안을 함락할 때 같이 넘어갔고,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요 군수공장으로 기능한다. 타이위안에서 생산된 무기들은 새 중국군의 제식 장비가 되었으며, 한국 전쟁 당시에도 대거 투입된다. 특히 대포들은 유엔군에 비해 압도적인 화력 열세에 처해 있던 중공군에게 있어서는 대체 불가능한 지원 장비였다.

3. 현대

현대의 타이위안 철강그룹(타이강, TISCO)이 바로 이 병공창 소속 제철 및 제강 부문의 후신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반장전쟁 이후인 1934년에 옌시산이 타이위안 병공창을 민영화하여 분할했을 때 세워진 시베이제강이 전신. 현재는 스테인리스강 생산에 주력하고 있으며, 해당 부문에서 아시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국공내전 이후에는 산시성 정부 소유의 공기업이었으나 2020년 중국바오우강철집단이 인수하였다. 바오우그룹은 이 당시 타이강 말고도 우한철강 등 중국의 다른 제철소들 또한 공격적으로 인수하여 세계 최대의 철강 제작사로 발돋움했다.#

옛 병공창 건물은 현재도 남아 있으며, 박물관으로 개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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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홍일이 탄약수급 문제로 타이위안 병공창에 파견근무를 간 적은 있지만, 이곳에 소속된 적은 없다. 애초에 그는 총사령부 소속이었기 때문. 이후에도 그는 상하이 강남제조총국의 주임으로 발령받았지 타이위안 병공창으로 간 적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