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6-05 21:00:34

토머스 드 코트니(제5대 데번 백작)

성명 토머스 드 코트니
Thomas de Courtenay
출생 1414년
잉글랜드 왕국 데번
사망 1458년 2월 3일
잉글랜드 왕국 버크셔 에빙던 수도원
아버지 제4대 데번 백작 휴 드 코트니
어머니 앤 탈보트
배우자 마거릿 보퍼트
자녀 토머스, 헨리, , 조앤, 엘리자베스, 아그네스
직위 제5대 데번 백작

1. 개요2. 생애3. 가족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장미 전쟁 시기 랭커스터 왕조를 지지했다.

2. 생애

제4대 데번 백작 휴 드 코트니와 제4대 탈보트 남작 리처드 탈보트의 외아들이다. 8살 때 아버지를 잃고 아버지의 작위와 영지를 물려받았으며, 보퍼트 가문의 후견을 받았다. 1433년 2월에 성인으로 인정받았다. 코트니 가문 영지는 데번주의 남부와 중부 지역에 주로 집중되었고, 주변 주에도 흩어져 있었는데, 연간 수입은 약 1,500파운드였다. 이론상으로는 잉글랜드 왕국 남서부 전역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해야 했지만, 그는 잉글랜드 전체에서 가장 가난한 백작에 속했기 때문에 실제 영향력은 제한적이었다. 게다가 코트니 가문의 영지 절반은 어머니 앤 탈보트의 수중에 있었으며, 본빌 가문과 브룩 가문, 그리고 디넘 가문 등 남서부 출신의 젊은 가문들도 자기들의 영지를 넓히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이 때문에 그는 평생 데번 백작으로서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귀족 가문과 대립해야 했다.

1426년 또는 1429년 11월에 헨리 6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고, 1431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헨리 6세의 프랑스 국왕으로서의 대관식에 참석했다. 이후 잉글랜드 남서부 지역의 평화 위원회에 참여했고, 이에 대한 보상으로 국왕으로부터 토지와 지원금을 받았다. 1441년 어머니가 사망한 뒤 비로소 가문의 모든 재산을 통제했고, 1440/41년 콘월 공국의 집사를 맡았고, 1445년 잉글랜드 수석 집사로 선임되었다. 두 직위 모두 실권이 없는 명예직이었지만, 그의 위상을 드높이는 데 기여했다.

토머스 코트니는 데번, 서머싯 및 주변 주에 광대한 토지를 보유하고 수입 면에서 데번 백작보다 절대로 뒤지지 않았떤 초대 본빌 남작 윌리엄 본빌과 대립했다. 둘 사이에 무력 충돌이 종종 벌어지자, 1442년 11월 왕실 위원회가 두 영주를 소환했지만 별다른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이 갈등은 윌리엄 본빌이 가스코뉴 총독으로서 프랑스로 파견된 뒤에야 끝났다. 토머스는 국내에서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전쟁 소집을 무시했지만, 1446년 왕실의 강한 압력에 못 이겨 노르망디 공국으로 이동해 몇몇 소규모 전투에 참여했다. 1447년부터 이전보다 더욱 자주 궁정을 방문하면서, 잉글랜드로 돌아온 윌리엄 본빌과의 갈등을 재개했다. 그러나 대세는 잉글랜드의 실권자인 윌리엄 드 라 폴의 지원을 받은 윌리엄 본빌로 기울어졌으며, 자기 작위가 아룬델 백작 윌리엄 피츠앨런의 것보다 낮다는 걸 인정하는 굴욕을 겪었다.

1450년 서퍽 공작 윌리엄 드 라 폴이 피살된 후, 토머스는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와 동맹을 맺고, 윌리엄 본빌과 본격적인 무력 충돌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는 본빌 가문의 영지에 대한 일련의 습격을 벌이다가, 5천 병력을 이끌고 본빌 가문의 중심지인 토우턴 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그와 요크 공작의 동맹은 그가 생각했던 것처럼 강력하지 않았다. 요크 공작은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데번에 행차한 뒤 토머스와 윌리엄을 한 달 동안 체포했고, 그들의 가신들 중 다수도 체포되었다. 그 후 1451년 콜컴 성에서 공식적인 화해가 이뤄졌다. 1년 후, 토머스는 런던으로 진군하기 위해 군대를 움직인 요크 공작을 지원했지만,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그는 이 일로 한 동안 감옥에 갇혔고, 윌리엄 본빌은 왕 편에 선 공적을 인정받아 데번에서 자기 권력을 확대했다.

1453년, 요크 공작 리처드는 광기에 빠진 헨리 6세를 대신해 호국경을 맡았다. 그러나 이는 토머스에게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요크 공작은 잉글랜드 오아국의 남서쪽을 장악하기 위해 데번 백작보다 훨씬 강력한 본빌 가문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불만을 품은 토머스는 장미 전쟁이 발발하자 랭커스터 왕조 편을 들었다. 1455년 5월 제1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가 벌어지기 전 날, 토머스는 협상 중재자 역할을 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는 왕을 위해 싸웠지만 패배를 면치 못했다. 이후 런던 탑에 끌려갔지만 얼마 후 석방되었고, 요크 공작의 동맹 제의를 거부한 뒤 수년간 자기 영지에 머물렀으며, 랭커스터파와의 유대감을 강화했다. 특히 장남 토머스를 앙주의 마르그리트 왕비의 사촌인 멘의 마리와 결혼시켰다.

그 후 중앙 정부가 내전의 여파로 통제력을 잃자, 코트니와 본빌 가문 사이의 갈등이 또다시 폭발하여 대규모 무력 충돌이 벌어졌다. 그의 부하들은 윌리엄 본빌의 영지를 잇달아 습격했고, 윌리엄 본빌 역시 그의 영지를 습격했다. 1455년 10월 23일, 그의 장남 토머스가 윌리엄 본빌의 가장 가까운 고문 중 한 명인 변호사 니콜라스 레드퍼드를 잔혹하게 살해했다. 윌리엄 본빌은 즉각 어린 토머스의 영지를 약탈하는 것으로 보복했다.

1455년 11월 22일, 윌리엄 본빌은 토머스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토머스는 이 도전을 받아들였다. 12월 15일, 두 영주와 그들의 가신들은 엑서터 동쪽의 클리스트 세인트 메리 근처에서 결투를 벌였다. 윌리엄은 결투에서 패배했지만 탈출에 성공했고, 데번 백작은 이틀 후 큐트에 있는 윌리엄의 거주지를 공격해 철저히 약탈하고 막대한 전리품을 확보했다.

그가 대규모 전투를 벌인 것에 분노한 요크 공작 리처드는 호국경 자격으로 토머스 경을 체포했다. 그 후 런던 탑에 갇혀 반역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었지만, 1456년 2월 정신을 차린 헨리 6세의 특명으로 사면된 뒤 자기 영지로 돌아갔고, 1457년 2월 클래런던 공원과 숲의 관리권을 얻었다. 1458년 2월 3일 런던으로 가던 중 버크셔의 애빙던 수도원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사후 유언에 따라 엑서터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많은 학자들은 장미 전쟁이 벌어진 배경에는 그가 본빌 가문을 상대로 벌인 사적인 전쟁으로 인해, 많은 영주들이 요크 공작 리처드가 호국경에 올라서 자신들을 지켜주기를 희망하게 된 것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잉글랜드 남부의 코트니와 본빌 가문 간의 불화가 국가적 위기의 징후 중 하나였으며 대규모 내전의 길을 마련한 지역적 불화 중 하나였다고 지적한다.[1]

3. 가족

  • 마거릿 보퍼트(1409 ~ 1449): 초대 서머싯 백작 존 보퍼트제2대 켄트 백작 토머스 홀랜드의 딸인 마거릿 홀랜드의 딸.
    • 토머스 드 코트니(1432 ~ 1461): 제6대 데번 백작. 1461년 토우턴 전투에서 랭커스터군에 참여했다가 생포된 뒤 처형당했고, 데번 백작위와 영지를 몰수당했다.
    • 헨리 드 코트니(? ~ 1469): 에드워드 4세를 축출하고 가문의 영지를 탈환하려 했지만 1469년 1월 발각되어 1월 17일 솔즈베리 시장에서 참수되었다.
    • 존 드 코트니(1435 ~ 1471): 형 토머스 드 코트니가 처형된 뒤 잃어버렸던 가문의 영지와 작위를 1469년 헨리 6세가 복위한 후 데번 백작위를 가져갔던 험프리 스태퍼드가 처형되면서 되찾았다. 그러나 1471년 튜크스베리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의 죽음으로 코트니 가문은 단절되었다.
    • 조앤 드 코트니: 로저 클리퍼드 경과 초혼, 윌리엄 니벳 경과 재혼.
    • 엘리자베스 드 코트니: 휴 콘웨이 경의 부인.
    • 아그네스 드 코트니: 리처드 손더스 경의 부인.

[1] 한편, 잉글랜드 북부에서는 퍼시 가문과 네빌 가문간의 사적인 무력 충돌이 장미 전쟁 발발 직전까지 연일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