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16 01:06:22

토머스 키리엘

성명 토머스 키리엘
Thomas Kyriell
생몰년도 1396년경 ~ 1461년 2월 18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켄트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세인트 올번스
직위 가터 기사단 기사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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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기사. 백년전쟁 시기 프랑스군과 상대했고, 장미 전쟁에서 요크 왕조를 추종했으나 제2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에서 사로잡힌 뒤 처형되었다.

2. 생애

켄트 출신의 기사로, 노르망디 전선에서 프랑스군과 맞섰다. 1436년 피카르디의 르 크로투아 요새를 공략했으며, 루앙 근처에서 존 탈보트의 부관으로서 군사 작전을 수행했다. 1443년 깃발 기사로 선임되었다. 이후 어느 시점에 잉글랜드로 돌아가서 토지 경영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던 1449년, 프랑스군이 노르망디를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당시 노르망디 방면 잉글랜드군은 심각한 정쟁에 휘말린 잉글랜드 정부로부터 급료를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자 각지에서 약탈을 일삼거나 탈영하는 등 군기가 지극히 문란해졌기에, 프랑스군의 합동 공세에 제대로 당해내지 못했다.

급기야 1449년 11월 1일 노르망디의 수도 역할을 맡았던 루앙이 샤를 7세의 진두지휘에 힘입은 프랑스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함락되었고, 1449년 12월 프랑스 포병대장 장 뷔로가 노르망디의 항구도시 아르플뢰르를 공략했고, 1450년 1월엔 몽플뢰르가 함락되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잉글랜드 전역이 발칵 뒤집혔고, 수많은 시민이 길거리에서 대규모 항의 시위를 벌였다. 잉글랜드 당국은 민심을 수습하고 잃어버린 노르망디 영토를 탈환하기 위해 키리엘에게 2,500명 가량의 병력을 맡겼다. 키리엘은 포츠머스에 군대를 집결시킨 뒤 1450년 3월 노르망디로 출항하여 3월 15일 셰르부르에 상륙했다.

키리엘은 바이외에서 프랑스군의 위협을 받고 있는 수비대를 강화하기 위해 행군하다가 프랑스군이 점령한 발로뉴를 포위했다. 이때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의 군대가 가세하면서, 그의 군대는 4,000명에 이르렀다. 4월 18일 발로뉴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낸 키리엘은 바이외로의 행군을 재개했다. 그러나 그가 발로뉴를 공략하느라 시간을 허비한 사이, 프랑스군이 이들을 격멸하기 위해 집결했다. 클레르몽 백작 장 2세는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노르망디 해안을 따라 코탕탱 반도로 이동해 카랑탄에 자리를 잡았고,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이끄는 2,000명은 쿠탕스에서 북상했다.

키리엘은 행군 도중에 적이 기다리고 있는 카랑탄을 지나는 대신 썰물 때만 접근할 수 있는 수 마일 길이의 둑길을 통해 바레 강 하구를 건넜다. 장 2세는 적의 이같은 행보를 확인했지만 섣불리 공격하지 않고 리슈몽에게 적군의 이동에 대해 알리는 전갈을 보낸 뒤 멀리서 잉글랜드군을 추격했다. 4월 14일 밤 바이외에서 10마일 떨어진 포미니 마을에 숙영한 키리엘은 자신들을 추격하는 장 2세의 프랑스군을 이곳에서 격퇴하기로 하고 전투를 준비했다. 포미니 마을은 바이외로 향하는 도로 인근 얕은 계곡에 자리잡았으며, 개울이 마을 서쪽에서 흘러내렸고 그 위에 돌다리가 세워져서 도로와 연결되었다.

키리엘은 다리를 앞에 둔 채 군대를 편성했다. 900명의 하마 기사들은 일부 장궁병들과 함께 최선두에서 대열을 형성했고, 두번째 대열엔 다수의 장궁병들이 배치되었으며, 세번째 대열엔 창병대가 편성되었다. 최전선의 궁수들은 날카로운 말뚝을 박고 앞쪽에 얕은 참호를 팠다. 키리엘은 적이 다리를 건너오는 걸 일부러 내버려뒀다가 다리를 막 건너온 적에게 일제 공격을 퍼붓는 방식으로 전투를 벌이려 했다. 그러는 한편, 남쪽에서 또다른 적군이 나타나는 것을 대비하기 위해 일부 기병을 그쪽으로 보내서 새로운 적의 출현 여부를 감시하게 했다.

얼마 후 전장에 도착한 장 2세는 적을 포착하자 3개의 전투 대열을 형성했다. 그는 적의 위치를 볼 때 다리를 무작정 건넜다가는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것이 자명하다고 여기고, 리슈몽의 군대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려 했다. 하지만 젊은 귀족들이 어서 저들을 공격해야 한다고 강하게 요구했고, 그는 이에 설득되어 공격을 개시했다. 프랑스군은 도보로 도로를 따라 전진했고, 기마병들은 다리를 신속하게 건넌 뒤 잉글랜드군 측면을 공격했지만 적의 결사적인 항전으로 인해 격퇴되었다.

이때 장 뷔로가 포병을 이끌고 전장에 도착했다. 포병들은 최선두로 가서 2개의 중포를 설치한 뒤 적을 향해 포탄을 발사했다. 이전의 부정확하고 연사 속도가 매우 느렸던 대포들과는 달리, 이번 대포는 상당히 정확했고 연사 속도도 빨라서 잉글랜드군이 당황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오랜 전쟁으로 숙련된 잉글랜드 궁수들은 곧 냉정을 되찾았고, 일부 궁수들은 대열을 이탈하여 적 포병들을 향해 화살을 퍼부어 빠르게 제압한 뒤 대포 2문을 탈취해 잉글랜드 전선으로 가져갔다. 이에 프랑스 맨앳암스와 궁수대는 물러났고, 장 2세는 인근 마을 주민들에게 리슈몽에게 가서 어서 빨리 합류해달라고 요청하게 했다.

얼마 후, 리슈몽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남서쪽 방향에서 포미니 마을로 행군했다. 키리엘이 적이 오는 지를 감시하기 위해 파견한 잉글랜드 기병들은 리슈몽의 군대를 발견하고 본대에 이 사실을 알렸고, 장 2세가 보낸 주민들 역시 리슈몽과 만나서 서둘러 구원하러 와달라는 장 2세의 뜻을 전했다. 리슈몽은 부관들에게 행군을 계속 이끌게 한 뒤 본인은 말을 타고 개울을 건너 장 2세의 군대로 달려갔다. 두 장군은 곧 조우한 뒤 적을 어찌 상대할 지 논의한 끝에 장 2세가 공격을 재개하고 리슈몽은 남서쪽 방향에서 전투 대형을 형성한 뒤 잉글랜드군의 측면을 공격하기로 합의했다.

한편, 키리엘은 새로운 적이 나타나자 새로운 전선을 편성하기로 하고 전군에 이동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적으로부터 탈취한 대포 2문을 끌고 가느라 행군이 지체되었고, 이동이 완료되기도 전인 오후 7시경에 리슈몽의 군대에 속한 기병 1,200명이 여전히 이동중이던 일부 잉글랜드군을 급습해 가공할 피해를 입혔다. 여기에 피에르 드 브레제는 잉글랜드군 후방의 소규모 요새의 존재를 확인하고, 일부 기병을 이끌고 그쪽으로 달려가 접수함으로써 잉글랜드군의 퇴로를 차단했다. 아군이 적 기병대에게 궤멸되는 모습을 본 잉글랜드군의 전의는 급격히 떨어졌고, 많은 이들이 전투 대열을 이탈하고 달아나다가 추격병에게 살해되었다. 키리엘은 잔여 병력을 수습해 어떻게든 항전하려 했지만, 장 2세와 리슈몽의 합동 공세에 도저히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다.

키리엘은 포미니 전투에서 생포된 후 몇 달간 옥고를 치르다가 몸값을 지불하고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이후 1455 ~ 1456년과 1460 ~ 1461년에 열린 의회에서 켄트를 대표하는 의원으로 참여했다. 그는 이 의회에서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에 반대하는 요크의 리처드의 편에 섰다. 장미 전쟁이 발발했을 때 요크군 사령관을 맡았으며, 1461년 2월 8일 16대 워릭 백작이자 6대 솔즈베리 백작인 '킹메이커' 리처드 워릭에 의해 가터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8일 후인 제2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에서 요크파의 포로였던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를 지키고 있다가 아군이 패배한 뒤 적군에게 사로잡혔고, 2월 18일에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에 의해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