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3-23 02:54:48

파이프의 맥더프

이름 파이프의 맥더프
Macduff of Fife
출생 미상
스코틀랜드 왕국 파이프 백작령
사망 1298년 7월 22일 (향년 미상)
스코틀랜드 왕국 폴커크
아버지 제6대 파이프 백작 맬컴
어머니 엘렌 또는 수산나
형제 콜반
직위 파이프 기사

1. 개요2. 생애

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시기 잉글랜드 왕국에 맞서다가 폴커크 전투에서 전사했다.

2. 생애

스코틀랜드의 주요 클랜 중 하나인 맥더프 일족 출신으로, 제6대 파이프 백작 맬컴의 차남이다. 어머니의 신원은 불분명한데, 일부 사료에서는 허웰린 압 요르웨르스의 장녀 엘렌이라고 하고, 다른 사료에서는 허웰린의 4녀 수산나라고 한다. 1260년부터 아버지가 기록상에서 사라진 뒤, 형 콜반이 영지와 작위를 계승했고, 맥더프는 파이프의 킬콘콰 인근 쿠퍼와 리레스 강 북쪽의 크레이크 영지를 받았다. 그는 이 땅을 매년 일정한 금액을 받는 대가로 형에게 임대했고, 1270년 형이 죽은 후에는 제8대 파이프 백작이자 조카인 던컨에게 임대했다.

1289년 조카 던컨이 피살당하고 그의 유복자인 던컨이 새 파이프 백작에 올랐다. 이에 세인트앤드루스 주교 윌리엄 프레이저가 던컨을 대신해 파이프 백작령을 관리했다. 맥더프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여기고, 1290년 또는 1291년에 리레스와 크레이그를 점령하고 파이프 백작령을 직접 관리하려 했다. 하지만 주교는 그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고, 맥더프는 1292년 여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에드워드 1세는 프레이저 주교에게 맥더프의 청구를 조사하라고 지시한 뒤, 프레이저 주교를 압박해 맥더프가 리레스와 크레이그 영지를 다스리는 걸 허용하게 했다.

1292년 11월, 존 발리올이 스코틀랜드의 새 국왕으로 등극했다. 존 발리올은 왕으로서 파이프의 행정을 직접 맡았다. 1293년 2월, 첫 번째 스코틀랜드 회의가 열렸다. 이때 존 발리올은 맥더프에게 2개의 영지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라고 요구했다. 두 영지는 1270년부터 제8대 파이프 백작 던컨이 미성년자였던 시절부터 왕의 관할에 있었기에, 존 발리올은 맥더프가 불법적으로 영지를 점유하고 있다고 고발했다. 백더프는 자신이 영지를 파이프 백작에게 임대한 거라고 주장했지만, 스코틀랜드 의회는 왕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다. 그 후 존 발리올은 영지를 점거했고, 맥더프는 얼마 동안 감옥에 갇혔다.

그 후 석방된 맥더프는 1293년 3월 다시 에드워드 1세에게 향했다. 에드워드 1세는 이제 스코틀랜드에 대한 영구적인 주권을 주장했고 이 사건을 이러한 주장을 더욱 강화할 기회로 여겼다. 또한 그는 스코틀랜드 왕이 자신의 통치 기간 동안 내린 판결을 바꾸는 걸 원하지 않았다. 1293년 3월 25일, 그는 스코틀랜드 의회에 서신을 보내 자신이 통치자로서 내린 결정을 불법적으로 무시했다고 규탄했다. 그러면서 스코틀랜드 왕이 5월 24일까지 런던으로 출두해 자신에게 보고하라고 덧붙였다. 존 발리올은 잉글랜드 왕 앞에 나타나지 않았고, 에드워드 1세는 6월 초에 맥더프와 그의 가족을 자신의 보호 아래 두었다.

1293년 9월 말, 존 발리올은 결국 잉글랜드 의회에 출두했고, 맥더프와의 분쟁을 양보하고 맥더프에게 투옥으로 인한 정신적 피해를 보상해주기로 했다. 하지만 영지의 반환을 가능한 한 늦추려 노력했다. 1293년 11월, 맥더프는 세인트앤드루스 주교의 동생인 앤드류 프레이저가 자기 집에 난입해 재산을 약탈했다고 비난했다. 이제 잉글랜드 왕은 자신의 주권을 더욱 확대하고자 시도했고, 1293년 11월 20일에 파이프 행정권을 직접 주장했다. 그의 대리인 한 명이 실제로 1294년 초에 파이프의 행정을 맡았고, 존 발리올은 이를 막지 못했다.

1296년, 에드워드 1세가 자신에게 불복종하고 적국인 프랑스 왕국과 손잡은 불충한 봉신 존 발리올을 응징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스코틀랜드를 침공했다. 맥더프는 이때 에드워드 1세 편을 들었고, 앤드류 프레이저 주교는 잉글랜드 왕의 반대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 그러나 1297년 초 윌리엄 월레스로우랜드에서 잉글랜드의 통치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자, 맥더프 또한 이에 호응해 파이프에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잉글랜드 진압군에게 쫓기다가 월레스에게 가담했다. 1297년 8월, 맥더프는 제6대 스트래선 백작 말리스 3세에게 생포되었지만, 말리스 3세 또한 월레스에게 가담하기로 하면서 풀려났다. 1298년 7월 22일 폴커크 전투에 참여해 파이프 부대의 지휘를 맡아 싸우다가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