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2-19 20:40:36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파일:Royal_Coat_of_Arms_of_England_(1399-1603).svg 잉글랜드 왕국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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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영어: First War of Scottish Independence
기간
1296년 ~ 1328년
장소
스코틀랜드 왕국, 잉글랜드 왕국 북부, 아일랜드
원인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의 스코틀랜드 정복 야욕.
교전국 및 교전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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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oat_of_arms_of_the_Lordship_of_Ireland.svg 아일랜드 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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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게일인 토착 세력
지휘관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에드워드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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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에드워드 3세
파일:Warenne_Arms_2.svg.png 존 드 워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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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에드몽 드 카유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존 드 버밍엄
파일:Blason_fam_fr_Geraldin2.svg.png 모리스 피츠제럴드
파일:Arms_of_Anthony_Bek,_Bishop_of_Durham_(d.1311).svg.png 앤서니 베크
파일:BigodModernArms.jpg 로저 비고드
파일:Hastings_of_Elsing_arms_(ancient).svg.png 존 헤이스팅스
파일:800px-Modern_arms_of_Percy.svg.png 헨리 퍼시
파일:Arms_of_Clifford.svg.png 로버트 드 클리퍼드
파일:Arms_of_Hugh_de_Cressingham_(d.1297).svg.png 휴 크레싱엄
파일:800px-Arms_of_the_House_of_de_Bohun.svg.png 험프리 드 보훈
파일:Lacy_Coat_of_arms.svg.png 헨리 드 레이시
파일:Coat_of_Arms_of_Richard_Fitzalan,_3rd_Earl_of_Arundel.svg.png 리처드 피츠앨런
파일:Coat_of_Arms_of_Richard_Fitzalan,_3rd_Earl_of_Arundel.svg.png 에드먼드 피츠앨런
파일:CoA_Gilbert_de_Clare.svg.png 길버트 드 클레어
파일:Monthermar.svg.png 랄프 드 몬테르머
파일:800px-Arms_of_Edmund_Crouchback,_Earl_of_Leicester_and_Lancaster.svg.png 랭커스터의 토머스
파일:800px-Arms_of_Edmund_Crouchback,_Earl_of_Leicester_and_Lancaster.svg.png 랭커스터의 헨리
파일:Arms_of_William_Martin,_1st_Baron_Martin_(died_1324).svg.png 윌리엄 마틴
파일:COA_1st_Baron_Grey_of_Wilton.svg.png 레지날드 그레이
파일:Arms_of_the_House_of_Mortimer.svg.png 에드먼드 모티머
파일:Arms_of_the_House_of_Mortimer.svg.png 로저 모티머
파일:The_Parliamentary_Roll-39.jpg 테오발드 드 베르동
파일:St._John_arms.svg.png 존 드 세인트 존
파일:Arms_of_John_Segrave,_2nd_Baron_Segrave_(d.1325).svg.png 존 시그레이브
파일:Piers_Gaveston.svg.png 피어스 개버스턴
파일:CoA_Andrew_Harclay.svg.png 앤드류 하클레이
파일:Earl_of_Scarbrough_COA.svg.png 마마듀크 트윙
파일:Arms_of_John_fitz_Marmaduke_(d.1311).svg.png 존 피츠마마듀크
파일:Coat_of_arms_of_the_Lordship_of_Ireland.svg 존 워건
파일:Coat_of_arms_of_the_Lordship_of_Ireland.svg 에드먼드 버틀러
파일:Arms_of_Bruce.svg.png 로버트 브루스
파일:스코틀랜드 국장.svg 알렉산더 애버네시
파일:Sr_Dargael,_Balliol_Roll.jpg 아가일의 존
둔갈 맥두얼
파일:Balliol_arms.svg.png 존 발리올
파일:WallaceSeal.png 윌리엄 월레스
파일:Arms_of_Bruce.svg.png 로버트 1세
파일:Arms_of_Ranulf_de_Blondeville,_6th_Earl_of_Chester_(died_1232).svg.png 뷰컨 백작 존 코민
파일:Jan_Comijn.svg.png 존 3세 코민
파일:스코틀랜드 국장.svg 앤드류 모레이
파일:Arms_of_the_House_of_Douglas_(Ancient).svg.png 윌리엄 르 하디
파일:Arms_of_the_House_of_Douglas_(Ancient).svg.png 윌리엄 더글러스
파일:Arms_of_the_House_of_Douglas.svg.png 제임스 더글러스
파일:Boyd_arms.svg.png 로버트 보이드
파일:fitz-randolf-coat-of-arms.jpg 토머스 랜돌프
파일:K-054-Coat_of_Arms-FRAZER-Simon_Frazer_(_Symon_Fresel_).png 사이먼 프레이저
파일:Arms of Stewart.png 월터 스튜어트
파일:Arms of Stewart.png 알렉산더 스튜어트
파일:Arms of Stewart.png 본킬의 존 스튜어트
파일:Arms of Stewart.png 제임스 스튜어트
파일:Macduff_arms.svg.png 파이프의 맥더프
파일:De_Ros_arms.svg.png 로스의 윌리엄 2세
파일:Blason_Comtes_d'Atholl.svg.png 스트라스보기의 존
파일:Arms_of_Keith,_Earl_Marischal.svg.png 로버트 키스
파일:Blason_Maison_de_Lennox.svg.png 레녹스의 맬컴
파일:Ingram_d'Umfraville_arms.svg.png 잉그렘 드 움프라빌
파일:Arms_of_John_de_Soules_(d.1310).svg.png 존 드 소울스
파일:Soules_arms.svg.png 윌리엄 2세 드 소울스
파일:Arms_of_Bruce.svg.png 닐 브루스
파일:Arms_of_Bruce.svg.png 토머스 브루스
파일:Arms_of_Bruce.svg.png 알렉산더 브루스
파일:Arms_of_Bruce.svg.png 에드워드 브루스
파일:K-051-Coat_of_Arms-DUNBAR-Patrick_de_Dunbar,_Earl_of_Dunbar_(_Conte_de_Laönois_).png 패트릭 4세 드 던바
파일:K-051-Coat_of_Arms-DUNBAR-Patrick_de_Dunbar,_Earl_of_Dunbar_(_Conte_de_Laönois_).png 패트릭 5세 드 던바
파일:Arms_of_the_House_of_Seton.svg.png 크리스토퍼 세튼
파일:Arms_of_the_House_of_Seton.svg.png 존 세튼
파일:Arms_of_the_House_of_Seton.svg.png 알렉산더 세튼
파일:Clan_member_crest_badge_-_Clan_Campbell.svg.png 니얼 막 케일린
파일:스코틀랜드 국장.svg 윌리엄 램버튼
파일:스코틀랜드 국장.svg 로버트 위셧
파일:스코틀랜드 국장.svg 데이비드 모라비아
파일:스코틀랜드 국장.svg 윌리엄 싱클레어
파일:스코틀랜드 국장.svg 군도의 크리스티나
파일:스코틀랜드 국장.svg 존 드 그레이엄
파일:Earl_of_Menteith.svg.png 존 드 멘티스
파일:800px-France_moderne.svg.png 필리프 4세
결과
스코틀랜드 왕국의 독립, 스코틀랜드인의 정체성 형성.
1. 개요2. 배경3. 경과
3.1. 에드워드 1세의 스코틀랜드 전쟁
3.1.1. 1296년 에드워드 1세의 스코틀랜드 원정3.1.2. 윌리엄 월레스와 앤드류 모레이의 봉기3.1.3. 폴커크 전투와 계속되는 저항3.1.4. 1300년 에드워드 1세의 원정3.1.5. 1301년 에드워드 1세의 원정3.1.6. 1303~1304년 에드워드 1세의 원정3.1.7. 일시적인 전쟁 종결과 로버트 브루스의 반란3.1.8. 로버트 1세의 끈질긴 투쟁과 에드워드 1세의 죽음
3.2. 로버트 1세의 반격
3.2.1. 스코틀랜드 재정복3.2.2. 에드워드 2세의 반격 시도3.2.3. 로버트 1세의 잉글랜드 습격3.2.4. 스코틀랜드의 해상 공세3.2.5. 1314년 전역과 배넉번 전투
3.3. 이후의 전쟁
3.3.1.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국경에서의 무력 충돌3.3.2. 스코틀랜드군의 아일랜드 원정3.3.3. 지속되는 전쟁과 협상3.3.4. 웨어데일 전역3.3.5. 애든버러-노샘프턴 협약
4. 이후5. 주요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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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296년 잉글랜드 왕국에드워드 1세가 자신을 거역하는 봉신 존 발리올을 응징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스코틀랜드 왕국을 정복하고자 대규모 원정을 단행하면서 벌어진 전쟁. 1328년 에든버러-노샘프턴 조약으로 스코틀랜드의 독립이 확정될 때까지 30여 년간 이어진 전쟁으로, 스코틀랜드인의 정체성이 자리잡고 잉글랜드 왕국과 스코틀랜드 간의 숙적 관계가 형성된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2. 배경

1286년 3월 19일, 스코틀랜드 왕국의 전신인 알바 왕국의 군주 알락산더르 3세가 임신 중인 욜란드 왕비가 있는 킹혼으로 가려고 야간에 비바람을 뚫고 이동하다가 말이 절벽에서 발을 헛디뎌 떨어지는 바람에 사고사했다. 당시 알락산더르 3세의 후계자로 공식 지명된 이는 노르웨이 국왕 에이리크 2세와 알락산더르 3세의 딸 마거릿 사이의 외동딸인 마르그레트 에이릭스도티르였지만, 당시 3살인 데다 알바 왕국에서 멀리 떨어진 노르웨이에 있었다. 그해 4월, 스콘에서 긴급 의회가 소집되었다. 제6대 에넌데일 영주 로버트 브루스와 갤러웨이 영주 존 1세 드 발리올 모두 스코틀랜드의 섭정이 되겠다고 나섰지만, 의회는 둘 중 하나가 섭정이 되면 왕위까지 노릴 거라 여기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대신, 의회는 '수호자' 6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결성하기로 했고, 브루스 가문과 발리올 가문 인사는 위원회에서 배제하기로 했다. 위원회에는 세인트앤드루스 주교 윌리엄 프레이저, 글래스고 주교 로버트 위셧, 파이프 백작 돈카드, 뷰컨 백작 알락산더르 코민과 바데녹 영주 존 3세 코민, 스코틀랜드 대순경 제임스 스튜어트가 소속되었다. 이들은 평화를 유지하고 선왕과 '가장 가까운 피를 나눈' 미래의 군주에게 충성을 맹세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욜란드 왕비가 아이를 낳을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어 평화를 유지하려 했다.

1286년 11월 말, 욜란드는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이 아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는데, 아마도 사산했거나 출생 직후 사망했을 것이다. 이리하여 200여 년간 알바 왕국을 이끌었던 둔켈드 왕조가 단절되었고, 마르그레트가 유일한 후계자가 되었다. 이제 수호자 6인은 마르그레트를 대신해 왕국을 통치하고 왕위 계승을 보장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애넌데일 백작 로버트 브루스는 여성 상속인을 스코틀랜드의 통치자로 인정하기를 거부했고, 발리올 가문과 여러 차례 무력 충돌을 벌였다. 1289년까지 수호자 중 한 명이 병사했고 또 다른 한 명은 살해되었으며, 귀족들 사이의 불화로 인해 이들을 대체할 수호자가 정해지지 않았다. 알바 왕국의 행정과 법률 체계는 허물어졌고, 귀족들 간의 알력 다툼이 심해졌다.

알바 의회는 왕국의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가장 가까운 이웃이자 선왕의 처남이었던 잉글랜드 왕국에드워드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에드워드 1세는 아들 에드워드 왕자를 마르그레트와 결혼시키기 위해 마르그레트의 아버지이자 노르웨이 국왕 에이리크 2세와 협상을 시작했고, 자신을 마르그레트의 권리와 안전의 보증인으로 내세웠으며, 에이리크 2세에게 재정 지원을 제공했다. 에이리크는 에드워드 1세의 설득과 로비에 넘어가 자기 딸을 에드워드 왕자와 결혼시키는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1289년, 로버트 브루스와 존 1세 드 발리올은 에드워드 1세의 중재에 따라 마르그레트의 통치권을 인정했고, 에드워드 1세는 아들 에드워드 왕자와 마르그레트의 약혼을 확정했다. 그해 11월 6일, 솔즈베리에서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마르그레트는 에드워드 1세의 보호를 받게 되었고, 에드워드 1세는 알바 왕국에 평화가 찾아오면 돌려보내겠다고 약속했다. 1290년 3월, 잉글랜드-알바 왕국 국경 인근 버검에서 의회가 소집되었다. 에드워드 1세는 이 자리에서 자기 아들 에드워드와 마르그레트의 결혼을 진행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히면서, 교황청이 이 결혼을 승인했다고 알렸다.

알바 귀족들은 이대로 가다간 알바 왕국이 잉글랜드에 완전히 병합되고, 잉글랜드 왕이 자기들의 성에 대한 지배권을 요구할 것을 우려했으며, 알바 성직자들도 자기들이 누리던 특권이 잉글랜드 국왕에 의해 재분배될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1290년 7월 버검에서 열린 2번째 의회에서 에드워드 1세에게 자신들이 누리는 특권과 지위를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에드워드 1세는 흔쾌히 받아들였고, 8월 28일 노샘프턴에서 양국의 국경과 특권의 보존을 보장하며, 알바 왕국의 독립과 성직자와 귀족의 모든 자유를 보존하겠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1290년 9월, 당시 7살이었던 마르그레트는 나르베 주교와 토레 하콘손 남작과 함께 배를 타고 노르웨이를 떠나 알바 왕국으로 떠났다. 그러나 그녀는 도중에 뱃멀미에 시달렸고, 9월 23일 오크네 제도에 상륙한 뒤 일주일간 고통을 겪다가 1290년 9월 26일에서 29일 사이에 나르베 주교의 품에 안긴 채 사망했다. 스콘에 모여서 어린 여왕이 오기를 기다리던 알바 귀족들은 10월에 그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후 여러 야심가가 알바 왕위를 놓고 경쟁했는데, 그 숫자는 14명에 달했다.

1291년 5월 10일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노럼에서 회의가 열렸지만, 다들 자기 입장을 고수하는 바람에 결론이 나오지 못했다. 이때 에드워드 1세 역시 회의에 참석했지만 별다른 발언을 하지 않았다. 이후 귀족들은 에드워드 1세에게 누가 이 왕위 주장자 중 가장 적합한지를 정해달라고 요청했다. 에드워드 1세는 자신이 알바 왕국을 안정시켜줄 의향이 있다며, 그 대신 모든 왕위 요구자가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로드 파라마운트(Lord Paramount: 최고의 주권자)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해 관철했다.

1291년 6월 6일, 에드워드 1세는 베릭어폰트위드에서 새로운 회의를 소집해 왕위 요구자 14명이 직접 또는 사절을 통해 알바 국왕이 되어야 할 이유를 설명하게 했다. 이때 마르그레트의 아버지인 에이리크 2세도 알바 왕위를 주장했으며, 딸이 즉시 여왕이 되지 않은 것에 대해 보상을 요구했지만 기각되었다. 이후 대부분의 왕위 후보자가 배제되었고, 오직 존 발리올과 로버트 브루스만 남았다. 에드워드 1세는 브루스와 발리올이 선택한 사람들로 구성된 대규모 배심원들과 논의한 끝에, 1292년 11월 17일 존 발리올을 스코틀랜드의 새 국왕으로 선포했다.

존 발리올은 1292년 11월 30일 스콘에서 대관식을 거행한 뒤, 그해 12월 26일에 에드워드 1세에게 재차 경의를 표했고,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 왕국에 종속된 국가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이 곤란한 처지에 놓였음을 알게 되었다. 1286년 알락산더르 3세가 사망한 후, 스코틀랜드엔 더 이상 중앙집권적인 행정 기관이 없어서 각지를 효율적으로 통치할 수 없었고, 로버트 브루스에게 충성하는 많은 스코틀랜드 귀족은 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그의 모든 법률과 선언을 무시했다.

여기에 에드워드 1세의 간섭이 갈수록 심해졌다. 그는 스코틀랜드 행정부 내에 자신이 신뢰하는 사람들을 임명했고, 존이 내린 결정 중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독단적으로 취소했다. 게다가 스코틀랜드의 모든 법적 소송은 존이 아니라 자기에게 제기되어야 한다고 선언했으며, 1293년 한 해 동안 최소 6차례나 존에게 소환장을 보냈다. 그러던 1293년 중반, 파이프 백작으로부터 상속받지 못한 맥더프라는 스코틀랜드 귀족이 에드워드 1세에게 찾아와서 자신이 당연히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상속 재산을 물려받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에드워드 1세는 이를 받아들였지만, 존은 그 땅은 현재 스코틀랜드 왕이 소유하고 있으므로 그럴 수 없다며 거부했다. 맥더프가 에드워드 1세에게 허락받았다고 밝히자, 존은 그를 투옥했다. 몇 달 후 석방된 맥더프는 에드워드 1세에게 존의 행동을 고발했다. 존은 즉시 런던 의회로 소환되었다. 존은 소환을 미루려 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런던에 가서 자신을 변호해야 했으며, 맥더프에게 투옥으로 인한 정신적 피해를 보상해야 했다.

1294년 5월, 에드워드 1세는 프랑스와의 전쟁을 위한 자금을 받기 위해 런던에서 의회를 소집했다. 잉글랜드 측 연대기들은 존은 회의에 참석한 뒤 3년간 자기 땅의 수입을 에드워드 1세에게 바치겠다고 약속했다고 하지만, 프랑스에도 막대한 영지가 있던 존이 프랑스와의 전쟁에 찬성했을 가능성이 희박하기에 진위는 불분명하다. 그 후 에드워드 1세는 프랑스에 대한 금수 조치를 내리면서, 존에게 동일하게 조치하고 군대를 제공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존은 이 요구는 너무 지나치다고 여겼고, 스코틀랜드 귀족들 역시 에드워드 1세의 횡포가 너무 심하니 그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295년 말, 존은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압력에 굴복해 스코틀랜드 의회를 소집했다. 이후 에드워드 1세에게 바쳤던 충성 맹세는 에드워드 1세가 무력으로 협박했기에 어쩔 수 없이 한 것이었다며 무효라고 선언했다. 여기에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와 사절을 교환했고, 필리프 4세의 조카인 앙주의 이자벨과 자신의 장남인 에드워드 발리올 사이의 약혼을 맺고, 잉글랜드에 대항해 공동으로 협력하기로 했다. 1296년 2월 23일, 스코틀랜드 의회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확정했다. 여기에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에드워드 1세가 잉글랜드 교회의 지배를 놓고 자신과 대립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기에 존의 에드워드 1세에 대한 충성 맹세는 무효라고 선언했다.

존이 자신에 대한 충성 맹세를 철회했다는 소식을 접한 에드워드 1세는 프랑스 침공을 취소하고 스코틀랜드를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먼저 자신의 "범죄"에 대해 변론하라며 존을 소환했다. 존이 나타나지 않자, 그는 존이 잉글랜드에 가지고 있던 모든 자산과 토지를 압류하라고 명령했고, 스코틀랜드 왕위에서 폐위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존 발리올의 라이벌이었던 로버트 브루스의 아들인 제6대 애넌데일 영주 로버트 브루스를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옹립할 용의가 있다고 밝힘으로써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내분을 유도했다. 이리하여 30여 년간 이어진 기나긴 전쟁의 막이 올랐다.

3. 경과

3.1. 에드워드 1세의 스코틀랜드 전쟁

3.1.1. 1296년 에드워드 1세의 스코틀랜드 원정

존 발리올은 에드워드 1세가 본격적으로 쳐들어오기 전에 선제 공격하기로 마음먹고, 1296년 3월 11일 셀커크 인근의 캐던리에 군대를 소집했다. 그 후 제7대 뷰컨 백작 존 코민이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이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했다. 그들은 애넌데일에서 온 많은 보병과 함게 솔웨이 강을 건너 아서렛 마을을 불태웠다. 이후 제6대 애넌데일 영주 로버트 브루스가 방어하는 칼라일로 진군해 성채를 에워쌌다. 그러나 공성 무기가 없었기 때문에 성채를 공략할 수 없었고, 3월 28일 하루 동안 포위 공격한 뒤 철수했다.

1296년 3월 30일, 에드워드 1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군대를 이끌고 북상해 베릭에 도착했다. 베릭은 1295년 말부터 잉글랜드 함대의 공격을 받고 있었으며, 1296년 3월 육군을 이끌고 온 에드워드 1세에게 포위된 뒤 반복된 공격 끝에 함락되었다. 잉글랜드군은 베릭에 입성한 뒤 철저히 약탈하고 주민들을 모조리 학살했다. 이후 노섬벌랜드에서 온 잉글랜드 정착민들이 베릭에 정착했다. 존 발리올은 이에 대응해 스코틀랜드 왕국에서 모든 잉글랜드인들을 추방하라고 명령했지만, 스코틀랜드 귀족 대다수가 이에 따르지 않았다. 여기에 로스 백작 윌리엄 2세, 멘티스 백작 알렉산더 스튜어트, 아솔 백작 스트라스보기의 존이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이 제드버러에서 출격해 헥섬을 포함하여 노섬벌랜드의 수많은 마을, 교회, 수도원을 불태움으로써 베릭에서 잔학행위를 저지른 잉글랜드인들에게 보복했다.

에드워드 1세는 한동안 재정비한 뒤, 1296년 4월 23일 던바 성으로 진군했다. 당시 제8대 마치 백작 패트릭 4세 드 던바는 에드워드 1세를 지지했지만, 그의 아내인 마조리 코민은 존을 추종했고, 던바 성의 수비를 진두지휘했다. 마조리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은 존 발리올은 존 코민에게 상당한 병력을 맡겨서 던바 성을 구원하게 했다. 1296년 4월 27일, 존 코민은 던바 전투에서 존 발리올의 장인 존 드 워렌이 이끄는 잉글랜드군과 격돌했다. 그러나 단합력과 훈련이 부족한 스코틀랜드군은 크게 패했고, 마조리는 결국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했다. 이후 존 발리올은 몇 달간 저항을 이어갔지만, 모든 귀족이 등을 돌리자 1296년 7월 10일 브레친 성에서 항복하고 모든 왕실 휘장을 에드워드 1세에게 넘겼다.

그 후 존 발리올은 장남 에드워드와 함께 런던 탑으로 보내졌고, 던바 성에서 생포된 백작들과 뷰컨 백작 존 코민, 리처드 시워드, 존 모브레이, 인치마틴의 존, 데이비드 그레이엄, 알렉산더 맨치스, 니콜라스 랜돌프 등도 런던탑으로 보내졌다. 에드워드 1세는 1296년 7월 스코틀랜드 북부로 더욱 진군해 카우어 강어귀를 건너 디 강을 거쳐 에버딘에서 5일간 머문 뒤, 킨토어, 파이프, 벤프, 컬렌을 거쳐 스페이 강으로 이동했다. 7월 26일, 그는 스코틀랜드 모레이 지역의 가장 큰 도시인 엘긴에 도착했다. 그 후 남쪽으로 진군하여 로테스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존 드 켄틸루프와 존 헤이스팅스를 베드녹으로 보내 그 지역을 정복하게 했다.

에드워드 1세는 뒤이어 인버차라흐를 거쳐 킬드루미로로 동행했고, 더럼 주교 앤서니 베크는 로데스에서 왕과 헤어진 뒤 브레머로 진군해 그곳 주민들을 복종시켰다. 에드워드 1세는 8월 22일 이전에 베릭에 돌아온 뒤, 그곳에서 의회를 소집한 후 스코틀랜드 통치에 관한 칙령을 반포했다. 이에 따르면, 스콭르랜드 왕국은 해체되지 않지만, 새로운 가신 왕이 임명되지도 않았다. 에드워드 1세 본인이 "스코틀랜드의 왕"이라는 칭호를 쓰지도 않았다. 그는 스코틀랜드를 몰수된 영지로 간주했고, 워렌 백작 존 드 워렌을 총독으로 세우고, 휴 크레싱엄을 재무장관으로, 아머샴의 월터를 법무관으로, 윌리엄 옴스비를 스코틀랜드 대법원장으로 선임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각지에 보안관과 성주들을 직접 선임하거나 현지 귀족이 그 직위를 맡는 걸 승인했다. 또한 스코틀랜드 왕관, 휘장, 그리고 역대 스코틀랜드 국왕들이 대관식 때 사용했던 운명의 돌런던으로 가져갔다.

1296년 7월과 8월에 에드워드 1세가 스코틀랜드를 진군하던 당시, 많은 스코틀랜드인이 그에게 경의를 표했으며, 8월 28일에는 다른 수많은 스코틀랜드인이 베릭에서 경의를 표했다. 그들의 이름은 <래그먼 롤>에 기록되었다. 하지만 래그먼 롤에 나와 있는 스코틀랜드인 2,000명이 그 자리에 모두 있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다수는 나중에 대리인을 보내 충성을 서약하는 정도에 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에드워드 1세는 이제 스코틀랜드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여기고 프랑스와의 전쟁에 몰두했고, 총독인 워렌 백작은 스코틀랜드에서 한동안 통치하다가 불편함을 느껴 요크셔에 있는 자기 영지로 물러나고 재무장관 휴 크레싱엄이 그를 대신해 스코틀랜드 정부를 이끌었다.

3.1.2. 윌리엄 월레스와 앤드류 모레이의 봉기

에드워드 1세의 침공으로 알바 왕국의 주권을 잃어버렸고, 왕국의 상징이었던 운명의 돌이 런던으로 옮겨졌으며, 그가 남겨놓은 관리와 총독들이 수탈을 일삼자, 스코틀랜드인들은 강한 반감을 품었다. 여기에 스코틀랜드 현지 성직자들은 캔터베리 대주교가 스코틀랜드 교회를 자신의 주권하에 두려는 걸 두려워했다. 1297년 초 스코틀랜드 서부 고지대에서 잉글랜드 관리들의 수탈에 저항하는 민중 봉기가 일어났고, 5월 초 애버딘셔와 갤러웨이에서도 봉기가 일어났다. 그해 5월, 윌리엄 월레스가 스코틀랜드 남부의 라나크셔의 잉글랜드 보안관 윌리엄 헤실릭을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 후 월레스는 세인트앤드루스 주교 윌리엄 램버튼의 지원을 받아 무리를 끌어모은 뒤 반란을 일으켰다. 그해 여름에는 앤드류 모레이가 스페이 강과 디 강 사이의 스코틀랜드 북부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급기야 스코틀랜드의 중심지 스콘에서 윌리엄 월레스와 앤드류 모레이에 호응하는 봉기가 발발했고, 스코틀랜드 대법원장 윌리엄 옴스비는 간신히 반군을 피해 달아났다. 그 후 베릭의 전 수호자 윌리엄 더글러스가 윌리엄 월레스에게 가담했고, 본킬의 존 스튜어트, 케릭 백작 알렉산더 린제이도 반란에 합류했다. 앤드류 머레이는 인버네스 시민들의 도움을 받아 어쿼트 성을 순조롭게 공략했고, 8월 초까지 인버네스, 엘긴, 벤프 등 잉글랜드 성주들이 지키던 성들을 모조리 제압했다. 이리하여 잉글랜드 왕국의 스코틀랜드에 대한 통제력은 허물어졌고, 단지 북부 스코틀랜드의 성 몇 개만이 잉글랜드인의 지배를 받았다.

재무장관 휴 크레싱엄은 스코틀랜드 전역을 삽시간에 휩쓴 반란을 진압할 군대를 모집할 여력이 없었기에, 에드워드 1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1297년 6월, 에드워드 1세는 베드녹의 영주 존 3세 코민과 뷰컨 백작 존 코민을 스코틀랜드로 파견했다. 그들은 애버딘의 헨리 체인 주교, 제7대 마르 백작 가르트나이트의 지원을 받았다. 여기에 초대 퍼시 남작 헨리 퍼시, 초대 클리퍼드 남작 로버트 드 클리퍼드도 군대를 일으켰다. 이들은 애넌데일과 니스데일을 지나 6월 말에 에어에 도착했다. 이에 본킬의 존 스튜어트와 윌리엄 더글러스는 강력한 무장과 전투력을 갖춘 잉글랜드군에 대적할 엄두를 못 내고 어바인에서 항복했다. 이 소식을 접한 에드워드 1세는 반란이 곧 평정되리라 여기고 1297년 8월 플란데런으로 원정을 떠나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와 맞섰다.

그러나 이후의 전개는 에드워드 1세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흘러갔다. 윌리엄 월레스는 1297년 7월 셀커크 숲에서 보병대를 집결한 뒤 8월 던디 성을 포위 공격헸지만 공략에 실패했다. 이후 테이 강을 건너 북쪽으로 진군한 뒤, 스코틀랜드 북부에서 위세를 떨치던 앤드류 모레이와 합류했다. 여기에 에드워드 1세의 지시를 받고 반란을 진압하러 갔던 존 코민 부자는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반란군에 가담했다. 이에 존 드 워렌과 휴 크레싱엄은 대규모의 기사 부대와 웨일스 보병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이끌고 스털링으로 진군했다. 워렌은 포스 강을 건너는 곳을 공략함으로써 스코틀랜드 북부와 남부의 연락망을 끊으려 했다. 그러나 스털링에서 다리를 건너던 중 윌리엄 월레스와 앤드류 모레이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의 기습 공격을 받고 크게 패했고, 휴 크레싱엄은 전사했다. 다만 앤드류 모레이는 스털링 다리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2개월 만에 사망했다.

그 후 윌리엄 월레스는 스코틀랜드의 지도자로 떠받들어졌고, 아직 잉글랜드에 포로로 있던 존 발리올을 대신해 스코틀랜드를 다스릴 '수호자'를 자칭했다. 1297년 10월과 11월, 그는 국경을 넘어 노섬벌랜드를 습격해 코커머스와 뉴캐슬 사이의 지역을 초토화하고 수많은 인명을 살육하고 여인들을 강간했다. 성직자들을 포함한 민간인들은 이들을 피해 타인 강 남쪽의 더럼 주로 도피했다. 1297년 크리스마스 직전, 존 드 워렌과 로버트 클리퍼드는 각자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진격했다. 클리퍼드는 에넌데일로 들어가서 마을 10개를 불태웠지만, 기병대 일부가 매복 공격을 받고 큰 손실을 보았다. 존 드 워렌은 스코틀랜드 동부로 가서 베릭을 탈환하고 록스버러를 포위했지만 공략에 실패했다.

1298년 3월, 윌리엄 월레스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스코틀랜드 백작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고 공식적으로 '스코틀랜드의 수호자'로 선출되었다. 이후 스털링 성을 포위해 식량이 떨어진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냈지만, 공성 무기가 없어서 에든버러, 베릭 및 기타 성을 공략하지 못했다. 1298년 2월 중순, 에드워드 1세는 플란데런에서 돌아온 뒤 존 드 워렌에게 서신을 보내 자기가 친히 스코틀랜드를 상대로 원정을 떠날 테니, 그때까지 독자적으로 출진하지 말고 대기하고 있으라고 지시했다. 한편, 던바 전투 때 포로로 잡혔던 수많은 스코틀랜드 기사와 귀족들은 에드워드 1세의 플란데런 원정에 참여했다. 에드워드 1세는 그 대가로 그들에게 석방을 약속했지만, 플란데런 원정이 실패로 끝나자 아솔 백작 스트라스보기의 존을 비롯한 많은 스코틀랜드 귀족이 프랑스로 망명했고, 필리프 4세의 지원 덕분에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뒤 윌리엄 월레스와 합류했다.

3.1.3. 폴커크 전투와 계속되는 저항

1298년 여름, 에드워드 1세는 요크에 본부를 설치한 뒤 기병 2,000명, 보병 12,000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군대를 편성했다. 그해 7월, 더럼 주교 앤서니 베크와 더럼 보안관 존 피츠마마듀크가 이끄는 선봉대가 디르턴 성을 포위했다. 공성 무기와 보급품이 부족했던 피츠마마듀크는 왕에게 돌아가 도움을 요청했지만, 단호하게 거절당했다. 그러나 보급품을 실은 3척의 배가 포위군에 도착하면서, 잉글랜드군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한편, 스코틀랜드를 침공한 잉글랜드군 주력 역시 식량난에 시달렸다. 바람이 불리하여 스코틀랜드에 도착한 보급선은 몇 척뿐이었다. 그러던 중 잉글랜드군은 스코틀랜드 군대가 폴커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에드워드 1세는 이들을 물리치기로 마음먹었다.

1298년 7월 22일, 에드워드 1세는 폴커크 전투에서 수적으로 열세였던 윌리엄 월레스의 스코틀랜드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식량난에 시달렸기 때문에 파이프로 잠시 진군해서 에어 성을 파괴한 뒤 바로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그해 9월 잉글랜드 북부의 칼라일로 이동했다. 9월 25일, 에드워드 1세는 칼라일에서 많은 스코틀랜드 귀족의 영지를 몰수해 잉글랜드 귀족에게 넘기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격분한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반란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한편, 윌리엄 월레스는 폴커크 전투 패전 책임을 지고 수호자 자리에서 사임했고, 1299년 이전에 스코틀랜드를 일시적으로 떠나 프랑스로 향했다. 이후 캐릭 백작 로버트 브루스와 바데녹 영주 존 3세 코민이 새로운 수호자로 선출되었다.

폴커크 전투에서 크게 패했지만, 스코틀랜드 반군의 상황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스코틀랜드 남동부의 성들을 제외한 대부분이 반군의 손에 있었고, 스코틀랜드 행정부가 반군 지도자들에 의해 재건되었으며, 세인트앤드루스 주교 윌리엄 램버튼과 모레이 주교 데이비드 모라비아가 반군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존 3세 코민과 로버트 브루스는 잉글랜드와의 항쟁에 전념했고, 이에 따라 스코틀랜드 남부뿐만 아니라 잉글랜드 북부까지도 심각한 파괴와 약탈에 직면했다. 그들은 폴커크 전투 이후 잉글랜드군에 함락된 스털링 성을 포위했고, 1299년 여름에는 록스버러 성도 공략하려 했지만, 그곳 수비대 전력이 만만치 않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취소했다. 그 대신, 셀커크 숲을 점거했고, 에든버러를 습격해 주변 민가들을 약탈했으며, 에드워드 1세를 따르던 몇 안 되는 스코틀랜드 귀족 중 한 사람이었던 사이먼 프레이저를 설득해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에드워드 1세는 1299년 6월 6일 새로운 원정을 위해 군대를 소집한 뒤 여름에 노섬벌랜드로 향했지만, 재정난에 시달렸기 때문에 스코틀랜드로 진군하지 못했다. 그 사이, 스털링 성 수비대는 장기간 이어진 포위를 견디지 못하고 1299년 말에 무장을 한 채 잉글랜드로 돌아가는 조건으로 항복했다. 이후 셀커크 숲에서 열린 의회에서 존 3세 코민과 로버트 브루스 간의 주도권 다툼이 벌어지자, 의회는 램버튼 주교를 세 번째 수호자로 임명해 양자를 중재하도록 했다. 그러나 양자 간의 갈등은 지속되었고, 로버트 브루스는 1299년 11월과 1300년 5월 사이에 수호자 자리에서 사임했다. 그 후 로버트 브루스는 갤러웨이로 가서 그곳에 사는 게일인 귀족들의 지원을 얻으려 시도했지만, 갤러웨이가 스코틀랜드로부터 독립하기를 원했던 맥두걸 가문의 훼방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300년 5월 10일, 로버트 브루스를 제외한 다른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루더글렌에서 의회를 연 뒤, 잉그렘 드 움프라빌을 새 수호자로 선임했다.

한편, 스코틀랜드 정부는 프랑스와 교황청에 사절을 보내 지원을 호소했다. 1299년 4월,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는 제드버러 수도원장과 카스 출신 기사 존 위셧이 이끄는 스코틀랜드 사절단을 맞이했다. 그는 1295년에 맺은 동맹을 잊지 않았다고 밝혔지만, 직접적인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지는 않았다. 한편,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스코틀랜드에 호의적이었다. 그는 1299년 6월 에드워드 1세에게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 국왕이 아닌 로마 교황청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침략 행위를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또한 그해 7월 에드워드 1세를 설득해 전임 스코틀랜드 국왕 존 발리올이 스코틀랜드 왕위에 대한 모든 주장을 포기하고 잉글랜드를 떠나 피카르디로 망명하는 조건으로 풀려나도록 했다.

3.1.4. 1300년 에드워드 1세의 원정

1300년 7월,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로 새로운 원정을 떠났다. 그는 당초에 보병 16,000명을 모으려 했지만, 칼라일에 나타난 인원은 9,000명에 불과했다. 여기에 장남이자 후계자인 에드워드 왕자도 가담했다. 7월 4일, 잉글랜드군은 갤러웨이를 정복하기 위해 스코틀랜드 남서부로 진군해 케어러버록 성을 공략했다. 에드워드 1세는 수비대 일부를 교수형에 처했고, 사령관 및 장교 11명은 뉴캐슬에 투옥했다. 그 후 잉글랜드군은 함대와 함께 갤러웨이 깊숙이 진군했고, 에드워드 1세는 커크부드브라이트에서 존 3세 코민과 로버트 브루스를 상대로 이틀간 협상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존 발리올을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복위하고 발리올 가문의 영지를 반환해달라고 요구하자, 에드워드 1세는 분노하며 협상을 중단했다.

얼마 후, 크리 강어귀에서 식량을 수집하던 잉글랜드 분견대가 스코틀랜드군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잉글랜드 지원군이 신속히 가담했고, 잉글랜드군은 적군을 격퇴하고 스코틀랜드 보안관 로버트 키스를 생포했다. 1300년 8월 8일, 잉글랜드군 주력이 강둑에 도착했다. 잉글랜드 궁수들은 반대편 강둑에서 전투를 위해 대열을 이루고 있던 스코틀랜드 군대를 향해 사격을 가했다. 그러다가 썰물 때가 되자, 제4대 헤리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훈이 보병들을 이끌고 강을 건넜다. 왕은 우익에 기병대를 배치하고 싶어서 험프리에게 군대를 철수하라고 지시했지만, 험프리는 그의 명령을 오해하여 자기 부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군을 공격했다. 이에 에드워드 1세는 장남과 함께 기병대를 이끌고, 폭우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전투 현장으로 신속히 진격했다.

얼마간의 전투 끝에, 스코틀랜드인들은 주변 황무지로 후퇴했다. 그들의 손실은 적었지만, 많은 장비를 잃었다. 하지만 잉글랜드 기사들은 지형이 험해서 추격할 수 없었다. 다만 스코틀랜드 스트라스헤본의 영주 로버트 베어드만 생포되어 로버트 키스와 함께 잉글랜드 남부로 끌려갔다. 이후 원정군의 식량이 바닥을 드러내면서, 군대를 유지하는 게 점점 어려워졌으며, 수많은 보병이 탈영했다. 에드워드 1세는 원정 성과가 별 볼 일 없고, 더 이상 작전을 이어갈 수 없다는 걸 깨닫고, 깊이 좌절하며 칼라일로 돌아갔다. 그해 10월, 에드워드 1세는 소규모 병력을 이끌고 덤프리스로 진군해 요새를 살펴본 후 11월 초 칼라일로 돌아왔다. 스코틀랜드 사절단이 칼라일로 찾아와서 협상하자고 제안했지만, 그는 강하게 거부하면서 내년에 스코틀랜드를 파괴하겠다고 위협했다.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자기 뜻을 거스르고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을 이어가는 에드워드 1세에게 진노했다. 캔터베리 대주교 로버트 윈첼시를 통해 전한 교황 칙서<스키무스 필리(Scimus fili)>에서, 교황은 잉글랜드 국왕이 스코틀랜드를 통치할 권리가 없으며, 그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건 부당하다고 규탄했다. 1301년 1월, 다수의 영주들이 링컨에서 열린 의회에서 교황에게 단체로 편지를 보내기로 결의했다. 이 편지에서, 그들은 교황이 잉글랜드-스코틀랜드 분쟁에 개입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에드워드 3세는 윈체스터 백작 휴 르 디스펜서를 포함한 높은 지위의 대표단을 교황청에 파견하여 교황에게 스코틀랜드에 대한 잉글랜드의 주권을 인정하도록 설득했다. 스코틀랜드 측은 이에 대응해 볼드레드 비셋을 교황청에 파견하여 교황이 뜻을 고수하도록 유도했다.

이 무렵,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분열되었다. 램버튼, 코민, 움프라빌은 1300년 말까지 수호자로서 협력했지만, 이내 자기들끼리 이권 다툼을 일삼다가 1300년 12월과 1301년 5월 사이에 전원 사임했고, 웨스터키르크의 작은 영지를 소유한 기사 존 드 소울스가 유일한 수호자가 되었다. 소울스는 여전히 망명 생활을 하던 존 발리올의 대리인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했고, 램버튼 주교와 긴밀히 협력했다.

3.1.5. 1301년 에드워드 1세의 원정

1301년 3월 1일, 에드워드 1세는 링컨에서 6월 24일 이전에 동부 군과 서부 군을 편성해 집결한 후 스코틀랜드로 진군하라고 명령했다. 규모가 더 큰 동부군은 베릭에 집결하여 왕의 지휘를 받았고, 서부 군대는 웨일스 공이라는 칭호를 받은 에드워드 왕자가 칼라일에서 지휘했다. 에드워드 1세의 휘하에는 숙련된 장성들과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와 헨리 형제, 윌리엄 마틴, 레지널드 그레이, 에드먼드 모티머, 테오발드 드 베르동 등이 포함되었다. 여기에 토몬드의 영주 길버트 드 클레어와 에드워드 왕자의 절친한 친구이자 연인으로 의심받은 시종 피어스 개버스턴도 있었다. 한편, 아일랜드 보안관 존 워건의 지휘하에 기사, 경기병, 궁수로 구성된 강력한 아일랜드군이 잉글랜드 본대를 지원했다.

에드워드 왕자의 군대는 클라이드만으로 가는 직행 경로인 니스데일을 통과해 턴베리 성을 포위 공격한 끝에 9월 2일 함락했다. 이후 존 드 소울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 분견대가 거대한 잉글랜드군의 측면을 잇달아 습격해 타격을 입혔다. 9월 7일과 8일, 소울스와 잉그램 드 움프라빌은 로크마벤을 기습 공격했지만 격퇴되었다. 또한 턴베리 성과 에어 성의 잉글랜드 수비대는 캐릭 백작 로버트 브루스가 소집한 대규모 스코틀랜드군의 위협을 받았다. 이에 에드워드 왕자는 보급이 끊길 것을 걱정해, 아버지와 합류하기 위해 북쪽으로 이동하는 대신 라이언 호수를 건너 칼라일로 후퇴했다.

한편, 에드워드 1세의 군대는 베릭에서 트위드데일을 거쳐 셀커크와 피블스를 점령하고 셀커크 숲을 자신의 지배하에 두었다. 이후 8월 23일까지 클라이드 강을 따라 글래스고로 이동해 보스웰 성을 포위했고, 9월 24일 이전에 함락했다. 10월에 포스만을 가로지르는 배 다리를 건설하고 스털링 성에 대한 포위 공격을 재개하려 했다. 그러나 아들이 후퇴했다는 걸 알게 된 데다 겨울이 다가오자 별수 없이 린리스고로 후퇴해 겨울 숙영에 들어갔다. 스코틀랜드군은 시종일관 전면전을 회피하고 유격전으로 일관해, 에드워드 1세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여기에 병사들에게 급료로 지급할 돈이 떨어졌고 식량마저 바닥나면서 많은 보병이 탈영했으며, 사료가 부족해서 많은 말들이 굶어 죽었다.

1301년 11월, 에드워드 1세는 1302년 1월에 새로운 보병 부대를 편성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교황청과 프랑스 국왕의 압력으로 결국 휴전을 맺기로 했다. 1302년 1월 26일 뉴캐슬에서 1302년 11월까지 휴전하기로 합의했다. 이렇게 에드워드 1세의 잇따른 공세는 지지부진했다. 그러던 1302년 2월 16일, 캐릭 백작 로버트 브루스가 애넌데일과 갤러웨이의 잉글랜드 사령관 존 드 세인트 존에게 귀순했다. 그가 입장을 바꾼 이유는 분명하지 않은데, 많은 학자는 그가 휴전 협정이 체결된 후 잉글랜드 국왕이 브루스 가문의 정적인 존 발리올을 스코틀랜드 왕으로 다시 인정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로버트 브루스는 충성 대상을 바꾼 뒤 잉글랜드 국왕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제2대 얼스터 백작 리처드 드 버그의 딸 엘리자베스 드 버그와 결혼했다. 여기에 알렉산더 애버네시 등 여러 스코틀랜드 귀족도 로버트 브루스를 따라 에드워드 1세에게 귀순했다.

3.1.6. 1303~1304년 에드워드 1세의 원정

1302년 7월,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가 파견한 프랑스군이 쿠르트레 전투에서 에드워드 1세와 동맹을 맺은 플란데런 반란군에게 참패했다. 이에 필리프 4세는 플란데런과의 전쟁에만 전력을 기울였고, 스코틀랜드에 대한 지원을 거의 완전히 포기했다. 존 드 소울스, 램버튼 주교, 잉그램 드 움프라빌, 제임스 스튜어트 등 스코틀랜드 인사들이 파리로 찾아가서 필리프 4세를 설득했지만, 필리프 4세는 결국 1303년 5월 잉글랜드 왕국과 평화 협약을 맺고 그들과의 전쟁을 종식했다. 여기에 교황 보니파시오 8세도 더 이상 스코틀랜드를 전적으로 지지하지 않고, 스코틀랜드 주교들에게 잉글랜드 국왕과 협상하라고 촉구했다.

이렇듯 상황이 바뀌자,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를 향한 대규모 원정을 재차 일으키기로 마음먹고, 제2대 시그레이브 남작이자 스코틀랜드 주재 국왕의 부관을 맡은 존 시그레이브에게 선봉대를 이끌라고 명령했다. 존 시그레이브는 에든버러 서쪽의 스코틀랜드 지역으로 진격했다. 당시 스코틀랜드 수호자인 존 드 소울스는 프랑스에 있었기에, 바데녹 영주 존 3세 코민이 다시 스코틀랜드 수호자 직분을 맡았다. 1303년 2월 24일, 존 3세 코민과 사이먼 프레이저는 존 시그레이브가 이끄는 잉글랜드 기병대를 로슬린에서 기습 공격했다. 존 시그레이브는 이에 따라 중상을 입은 채 생포되었다. 하지만 라비의 기사 로버트 네빌이 지휘하는 후속 부대가 도착해 시그레이브를 구출하고 스코틀랜드군을 격퇴했다. 이후 잉글랜드군은 숲속에 필 타워를 건설했고, 알렉산더 발리올이 이곳을 지켰다.

한편, 에드워드 1세는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 워릭 백작 존 드 워렌,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 아일랜드 파견대 및 로버트 브루스가 지원한 스코틀랜드 분견대를 록스버러에서 집결한 뒤 5월 30일 출진했다. 그는 비숍스 린에 배다리를 건설한 뒤, 스털링 성을 우회하여 포스만을 건넌 후 파이프 일대를 침략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그해 7월 브레친에 도착한 뒤 마울레 성을 포위해 8월 9일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냈다. 에드워드 1세는 뒤이어 어콰트와 크로마티 성을 함락한 뒤, 에버딘을 거쳐 모레이 퍼스 연안에 있는 킨로스 수도원으로 진군해 9월 14일에 도착했다. 이곳은 전쟁 중에 잉글랜드군이 도달한 최북단 지점이었다. 그러나 보급품이 부족했고, 스코틀랜드군이 전투를 회피하자, 잉글랜드군은 철수했다. 에드워드 1세는 11월 5일 파이프에 있던 던펌린 수도원에 도착하여 겨울을 보냈다.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잉글랜드군의 연이은 침략으로 영지가 파괴되어 수입이 끊겨버리면서 막대한 부채에 시달렸고, 프랑스 왕국마저 더 이상 지원할 의사를 보이지 않는 현 상황에서 저항을 이어가는 건 무리라고 여겼다. 게다가 에드워드 1세가 지난 원정과는 달리 잉글랜드로 돌아가지 않고 스코틀랜드 한복판인 던펌린 수도원에서 겨울을 보낸 뒤 이듬해 봄에 전쟁을 이어갈 의지를 드러내자, 그들은 전의를 잃고 협상하기로 했다. 존 3세 코민은 1304년 2월 5일 퍼스 북쪽 스트래소드에서 에이머 드 발랑스, 헨리 퍼시 등과 만나 협상을 진행했다. 다만 그는 무조건 항복을 원하지 않았고, 지금까지 반란을 이끌었던 귀족들에 대해 제재하지 말라고 요구했으며, 양측 모두 무조건 포로를 석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에드워드 1세는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 존 3세 코민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1304년 2월 9일, 스코틀랜드 수호자 존 3세 코민은 잉글랜드 국왕에게 정식으로 항복했다. 뒤이어 스코틀랜드 귀족 대부분이 에드워드 1세에게 귀순했다. 오직 윌리엄 월레스와 사이먼 프레이저 만이 저항을 꿋꿋이 이어가기로 결심했다. 두 사람은 세리크 숲에서 소수의 추종자를 거느리고 유격전을 이어갔다. 윌리엄 올리펀트가 이끄는 스털링 성의 수비대 역시 항복을 거부했다. 1304년 5월, 에드워드 1세는 스털링 성을 포위해 3개월간 공성 무기를 동원해 공격했다. 결국 수비대는 7월 말에 항복했다.

한편, 윌리엄 월레스와 사이먼 프레이저는 1304년 2월 20일 피블스 인근 해프루에서 존 시그레이브와 로버트 브루스가 이끄는 적군의 공격을 받고 패주했다. 그 후 윌리엄 월레스는 1305년까지 숨어 다니며 저항을 이어갔지만, 글래스고 근방의 로브로이스턴에서 에드워드 밑에 있던 스코틀랜드인 기사 존 드 멘티스에게 체포되어 잉글랜드군에 넘겨졌고, 런던으로 압송된 뒤 웨스트민스터 홀에서 재판을 받은 후 살인 및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런던에서 교수형을 받고 옷이 벗겨진 채 말에 끌려다니며 조리돌림당하다 스미스필드 마켓에서 능지형에 처했다. 그의 머리는 창에 꽂혀 런던 다리에 효수되었고 장기는 불태워졌으며 찢긴 사지는 4개의 지역에 나뉘어서 전시되었다.

사이먼 프레이저는 산악지대에서 추적당하는 나날에 지쳐 에드워드 1세에게 다시 복종하려 했다. 에드워드 1세는 그가 충성 서약을 어겼다는 이유로 3년 동안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프랑스 내 잉글랜드 국왕의 영지에 발을 들이지 않는 조건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했다. 프레이저는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나중에 귀순했고, 1305년 9월 연봉의 3배를 지불하고 몰수한 재산을 다시 사들이는 것을 인정받는 대가로 4년간 추방되어야 했다.

3.1.7. 일시적인 전쟁 종결과 로버트 브루스의 반란

스털링 성을 함락하면서 전쟁이 끝나자, 에드워드 1세는 전후 수습에 나섰다. 그는 자기에게 저항했던 이들 대부분을 용서하고 영지를 돌려줬으며, 반란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램버튼 주교가 세인트앤드루스 주교로서 직위를 유지하는 걸 허락했다. 1305년 봄, 그는 스코틀랜드 의회를 소집한 뒤 글래스고 주교 로버트 위셧, 로버트 브루스, 존 모브레이를 자문위원으로 선임하여 스코틀랜드를 자기 대신에 다스리게 했고, 잉글랜드 의회에서 스코틀랜드를 대표할 스코틀랜드인 10명(주교 2명, 수도원장 2명, 백작 2명, 남작 2명, 포스 강 북쪽의 스코틀랜드인 대표 한 명, 포스 강 남쪽의 스코틀랜드인 대표 한 명)을 선출하게 했다. 여기에 로디언의 총독으로 존 시그레이브를 선임했고, 스코틀랜드 대재판장으로 존 센데일을 선임했다.

스코틀랜드 대표 10인은 1305년 9월 웨스트민스터에서 열린 잉글랜드 의회에 참석했고, 이 의회에서 스코틀랜드 행정에 관한 조례가 통과되었다. 이제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 왕국의 일부가 되었으며, 장 드 브르타뉴가 스코틀랜드 총독으로, 베버코츠의 윌리엄이 재상으로, 존 샌달이 내무장관으로 선임되어 스코틀랜드 정부를 이끌었다. 또한 의회는 스코틀랜드인과 잉글랜드인으로 구성된 4쌍의 판사를 임명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보안관과 성주가 임명되었으며, 전략적으로 중요한 성에는 잉글랜드인 보안관이 맡았다. 또한 스코틀랜드 위원 22명이 구성되어 총독에게 조언하는 역할을 맡도록 했는데, 이 위원의 구성원으로는 주교 4명, 존 3세 코민과 로버트 브루스를 포함한 백작 5명, 남작 9명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로버트 브루스는 스코틀랜드 국왕이 되려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극비리에 램버튼 주교와 접촉해 새로운 봉기를 준비했다. 그러던 중 에드워드 1세가 중병에 걸려 오래 살지 못할 것 같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그는 본격적으로 봉기를 일으키기로 했다. 1306년 2월 10일, 브루스는 덤프리스의 프란치스코회 교회에서 존 3세 코민과 만나 자신의 계획을 알렸다. 그러나 존 3세 코민은 존 발리올이 왕이 되어야 하지, 그를 왕으로 세울 수는 없다며 거부했다. 이어진 논쟁 와중에, 브루스는 코민을 살해했다.

전승에 따르면, 코민은 에드워드 1세에게 브루스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고발했고, 에드워드 1세는 의회에 이 일을 보고했다. 이때 의회에 출석했던 하트퍼드 백작 랄프 드 몬테르머가 브루스에게 경고했고, 브루스는 코민을 살해한 뒤 탈출했다고 한다. 그러나 잉글랜드 의회는 1306년 2월에 열리지 않았기에, 학자들은 근거 없는 이야기라고 간주하며, 일각에서는 브루스가 위험한 정적이 될 존 3세 코민을 배제하고 권력을 독차지하고자 암살을 감행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존 3세 코민을 살해한 뒤, 로버트 브루스는 교회에서 살해를 저질렀기 때문에 파문 당했지만, 글래스고 주교 로버트 위셧을 찾아가서 그에게 사면받았다. 그 후 6주 만에 스콘에서 뷰컨 백작부인 이사벨라 맥더프 등의 추대로 대관식을 거행하고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로 등극했다. 로버트 1세와 추종자들은 여세를 이어가 덤프리스, 달스윈튼, 티버스, 에어 성을 공략했고, 커닝햄의 로버트 보이드는 로데세이 성을 점령하고 인버킵을 포위했다. 또한 그는 두나버티 성을 확보함으로써, 클라이드만에 있는 스코틀랜드 서부 성 5개를 소유했다. 브루스는 일부 귀족으로부터 반란을 지지받았지만, 잉글랜드군이 확고하게 장악한 로디언으로부터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했다. 여기에 케이스네스, 서덜랜드, 로스, 뷰컨, 던바 등 다수의 귀족도 브루스의 반란에 반대했다. 그들은 존 발리올 만이 정당한 군주라고 여겼고, 존 3세 코민을 살해한 것을 비난했다. 특히 코민 가문은 로버트 브루스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겼다.

한편, 에드워드 1세는 로버트 브루스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에 분노했다. 그는 1306년 4월 5일에 에이머 드 발랑스를 스코틀랜드 총독으로 임명해 반란을 진압할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했다. 발랑스는 '드래곤 깃발'을 들 수 있었는데, 이는 그가 무자비한 전쟁을 벌이는 걸 용인받았음을 의미했다. 또한 에드워드 1세는 모든 포로를 처형하라고 명령했지만, 곧 반란 주모자 로버트 브루스, 추방령을 어기고 브루스에게 가담한 사이먼 프레이저, 역시 반란에 또다시 가담한 아솔 백작 스트라스보기의 존을 생포해 런던으로 끌고 오라고 명령했다.

에드워드 1세는 1306년 7월 8일에 군대를 칼라일로 소집했으며, 브루스와 지지자들의 영지를 자신을 추종하는 지지자들에게 나눠주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그가 스코틀랜드로 진군하기 전, 에이머 드 발랑스가 1306년 6월 19일 메스번 전투에서 로버트 1세와 추종자들을 상대로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반란을 지지했던 램버튼 주교와 위셧 주교는 체포된 뒤 스콘의 수도원장과 함께 잉글랜드 남부로 끌려가서 지하 감옥에 갇혔다. 로버트 1세는 메스번 전투 패배 후 소수의 추종자와 함께 인치프레이의 모리스 수도원장의 도움을 받아 드럼알반으로 도주했다.

1306년 7월 또는 8월, 스트라스필란 계곡에서 아가일의 영주 존 맥두걸이 이들을 막아섰다. 이어진 달리그 전투에서, 로버트 1세는 또다시 패배했다. 이제 군대를 유지할 수 없게 된 그는 병사들을 해산한 뒤, 아내 엘리자베스, 동생 닐, 아솔 백작, 알렉산더 린제이, 로버트 보이드를 데리고 산을 넘어 애버딘 북서쪽의 킬드럼미 성으로 향했고, 나중엔 아솔 백작과 함께 브레달베네 산으로 도피했다. 한편, 에드워드 1세는 1306년 9월 말 칼라일에 도착했지만 고령이었던 터라 더 이상 이동하지 못했고, 아들 에드워드가 1306년 7월 주력군을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진군했다. 그해 7월 11일, 애넌데일의 로크메이넨 성을 함락한 뒤, 에드워드 왕자는 여세를 이어가 퍼스로 진군해 8월 1일에 도착했다. 그 후 발랑스가 킬드럼미 성을 포위하는 걸 도왔고, 성은 9월 13일에 함락되었다.

아솔 백작은 브루스 가문의 여성들과 함께 도주하다가 테인에서 생포되었고, 런던으로 끌려가 잔인하게 처형되었다. 사이먼 프레이저 역시 체포되었고, 교수형에 처했다. 로버트 1세의 동생 닐 브루스도 체포되어 베릭에서 잔인하게 처형되었다. 로버트 1세의 처남 크리스토퍼 세튼은 로크둔 성에서 체포되어 덤프리스에서 처형되었고, 크리스토퍼의 동생 존 세튼과 버나드 모왓은 8월 4일 뉴캐슬에서 교수형에 처했다. 로버트 1세의 왕비 엘리자베스는 홀더니스에서 가택연금 되었고, 자매인 크리스찬 브루스는 뷰컨 백작부인 이사벨라 맥더프와 함께 록스버러와 버윅의 성벽에 매달린 철창에 갇혔다. 로버트 1세의 딸 마조리는 당시 12살이 채 되지 않았는데, 처음에는 런던 탑에 갇혔다가 나중에 요크셔의 수녀원으로 보내졌다.

한편, 로버트 1세는 렌녹스를 거쳐 스코틀랜드 남서쪽의 킨타이어 반도로 도주했다. 이후 두나버티 성에 잠시 머물렀다가, 잉글랜드군이 거기까지 몰려오자 배를 타고 탈출했다. 그가 그다음 6개월 동안 어디에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스코틀랜드 서부 섬들이나 아일랜드로 망명했을 것이다. 14세기 연대기인 <게스타 아날리아>(Gesta Annalia)에 따르면, 킨타이어 반도와 스코틀랜드 서해안의 여러 섬들의 여성 영주인 크리스티나가 잉글랜드군을 피해 도주한 로버트 1세를 섬에 숨겨줬다고 한다.

에드워드 왕자는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스코틀랜드 원정 중에 지나가는 마을에 사는 주민들을 여성과 어린이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학살하고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이후 겨울을 잉글랜드에서 보냈다. 에드워드 1세는 1306년 9월 29일에 라네르코스트에 있는 겨울 거주지로 옮겼다. 에드워드 왕자가 스코틀랜드를 떠나자, 그를 모시던 젊은 귀족 22명은 자기들의 임무가 끝났다고 여기고 왕의 허락을 받지 않고 영지로 돌아갔다. 이에 분노한 왕은 10월 18일에 그들의 영지를 몰수한다고 선언했다가, 1307년 1월 23일 프랑스의 마르그리트 왕비의 설득을 받아들여 대부분을 사면했다.

3.1.8. 로버트 1세의 끈질긴 투쟁과 에드워드 1세의 죽음

1307년 2월, 로버트 1세의 형제 토머스 브루스와 알렉산더 브루스가 아일랜드의 게일인 소왕 레지날드 크로퍼드와 킨타이어의 군주인 맬컴 맥퀼런과 함께 선박 18척을 타고 갤러웨이에 상륙했다. 그러나 그들은 갤러웨이의 유력한 귀족인 던갈 맥도웰에게 라이언 호 전투에서 격파되어 전원 생포되었다. 맥도웰은 즉시 크로포드와 맥퀼런을 참수한 뒤, 브루스 형제를 에드워드 1세에게 보냈다. 에드워드 1세는 두 형제를 반역자로 규탄하고 잔혹하게 처형했다. 한편, 로버트 1세의 심복인 제임스 더글러스와 로버트 보이드는 아란에 상륙한 뒤 존 헤이스팅스가 브로딕 성으로 보낸 장비와 물자를 노획했다. 로버트 1세는 아란에서 이들과 합류했고, 함께 캐릭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그들은 헨리 퍼시가 강력한 군대를 거느리고 텐버리 성을 접수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텐버리 마을을 야간을 틈타 약탈한 뒤 아란으로 후퇴했다. 이후 그는 스코틀랜드 남서부에 비밀리에 상륙하여 1307년 4월부터 캐릭과 갤러웨이 언덕에서 잉글랜드 수비대를 잇달아 습격했고, 추격대에게 매복 공격을 가해 피해를 줬으며, 크리 강변의 통행이 불가능한 협곡 클렌 트룰에 숨어 있다가 추격대를 격파했다. 그 후 북쪽으로 이동해 에어 성을 우회한 뒤, 1307년 5월 10일 라우던 힐 전투에서 에이머 드 발랑스를 격파했다. 3일 후에는 글로스터 백작이 지휘하는 또 다른 잉글랜드군을 격파해, 에어 성으로 쫓아냈다.

로버트 1세가 소규모 병사들로 저항을 꿋꿋이 이어가고, 스코틀랜드 주민들이 그들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에드워드 1세는 그동안 잔혹한 탄압을 가했던 게 역효과를 야기했다는 걸 깨달았다. 1307년 3월 13일, 그는 발랑스 및 다른 관료들에게 서신을 보내 브루스의 협박을 받고 지원한 자들을 사면하라고 명령했다. 1307년 7월 초, 에드워드 1세는 대규모 원정을 단행하기 위해 군대를 칼라일로 소집했다. 그러나 7월 7일, 병세를 이기지 못하고 그곳에서 사망했고, 장남 에드워드가 에드워드 2세로서 왕위에 올랐다. 그는 스코틀랜드 귀족 대다수의 충성 서약을 받았지만, 아버지의 원정을 이어가지 않고 군대를 해산하고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으로 가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후 발랑스를 스코틀랜드 사령관으로 임명했지만, 1305년 9월 13일에 장 드 브르타뉴로 교체했다.

3.2. 로버트 1세의 반격

3.2.1. 스코틀랜드 재정복

1307년 9월 스코틀랜드 총독으로 부임한 장 드 브르타뉴는 전임자 발랑스와는 달리 로버트 1세를 적극적으로 추적하지 않았다. 로버트 1세는 이때를 틈타 캐릭, 스튜어트 영지, 클라이즈데일, 레녹스, 헤브리디스에서 모은 보병을 이끌고 그레이트 글렌을 거쳐 스코틀랜드 북부로 이동해 1307년 11월 인버로키 성을 함락시켰다. 이에 위협을 느낀 로스 백작 윌리엄 2세는 에드워드 2세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편지 여러 통을 보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자, 결국 로버트 1세와 휴전 협약을 맺었다. 로버트 1세는 여세를 이어가 존 3세 코민의 사촌이자 가장 강력한 정적인 뷰컨 백작 존 4세 코민을 향해 진군했고, 그의 심복인 제임스 더글러스는 별동대를 이끌고 더그러스데일, 어퍼 클라이즈데일, 셀커크 숲, 그리고 제드버러를 잇달아 석권했다.

1307년 크리스마스 이전, 발랑스의 가신이었던 셀커크와 트위드데일의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로버트 1세 편으로 돌아섰다. 뒤이어 렌녹스, 멘티스, 파이프, 스트라선, 아솔, 앵거스 출신의 많은 스코틀랜드인들도 로버트 1세에 가담했다. 1308년 5월 23일, 로버트 1세는 인버루리 전투에서 존 4세 코민을 결정적으로 격파했다. 존 4세 코민은 잉글랜드로 망명했고, 그의 영지는 로버트 1세에 의해 초토화되고 수많은 주민이 학살당하고 가축이 도살되었다. 이에 뷰컨 주민들은 코민 가문에 대한 충성 맹세를 철회하고 로버트 1세에게 복종했다. 그 후 로버트 1세는 모레이로 이동해 그곳 주민들의 환영을 받았고, 1308년 여름까지 스코틀랜드 북동부에서 엘긴, 포레스, 네언, 인버네스 성들의 복종을 받아냈고, 1305년 이래 알렉산더 코민이 소유했던 블랙 아일의 어콰트 성과 타라데일 성을 접수했다.

이리하여 스코틀랜드 북부를 거의 석권한 뒤, 로버트 1세는 1308년 8월 아가일로 진군했다. 1308년 8월 15일 ~ 8월 23일, 로버트 1세는 제임스 더글러스와 함께 로른의 존이 지휘하는 맥도걸 가문을 브랜더 고개 전투에서 격파하고 던스태프니지 성을 복종시켰다. 아가일의 맥도걸 가문 수장 알락산더르 맥두걸은 대세가 기울었음을 깨닫고 귀순했다. 뒤이어 스코틀랜드 북부에 남아있던 유일한 적수 로스 백작이 1308년 10월 31일에 귀순했다. 로버트 1세는 그를 관대하게 대하고 빼앗았던 영지를 돌려줬고, 로스 백작은 이때부터 편을 바꿔서 로버트 1세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로른의 존과 알락산더르 맥두걸은 잉글랜드 국왕에게 몰래 도움을 청했지만, 로버트 1세가 이를 눈치채고 1309년 8월에서 10월 사이에 제임스 더글러스와 함께 아가일로 재차 쳐들어오자,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한편, 로버트 1세의 유일하게 생존한 형제인 에드워드 브루스는 아이슬레이의 도널드의 지원을 받아 갤러웨이 정복전에 나섰다. 그들은 잉글랜드 지지자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파괴했으며, 주민들을 대량 학살했다. 그러다가 1308년 6월 29일 도널드 맥켄이 이끄는 갤러웨이 귀족들을 디 강 또는 크리 강에서 격파하고, 헤스탄 섬에 있는 멕도웰 성을 불태웠으며, 잉글랜드 지지자들이 잉글랜드로 도주하도록 강요했다. 이후 잔존한 잉글랜드군이 수비하는 성들을 하나둘씩 공략한 끝에, 1313년에 모두 평정했다. 로버트 1세는 동생의 공적을 기려 1309년 3월에 에드워드를 갤러웨이의 영주로 선임했다. 로버트 1세는 뒤이어 스코틀랜드 남동부의 로디언을 탈환하기 위한 공세에 착수했다. 그 결과 여러 성이 차례차레 함락되었지만, 에든버러, 제드버러, 록스버러, 스털링, 베릭 등 강력한 방어시설을 갖춘 성들은 여전히 건재했으며, 헤딩턴, 러프니스, 디를레톤, 예스터, 던바, 셀커크, 캐버스 등과 같은 작은 성들도 1314년까지 버텼다.

로버트 1세의 통치는 이제 매우 견고해졌고, 1309년 3월 16일과 17일에 세인트앤드루스에서 그의 주관하에 첫 번째 의회가 개최되었다. 회에서 참석한 고위 성직자와 남작들은 로버트 1세를 합법적인 국왕이자 알락산더르 3세의 후계자로 선언했고, 존 발리올의 통치를 불법으로 간주했다. 또한 의회는 1303년 파리 평화조약 이후 중단되었던 프랑스와의 관계를 재개하기 위해 사절단을 파견하기로 했다. 다만 잉그램 드 움프라빌, 로버트 드 움프라빌, 데이비드 드 스트라스보기, 존 모브레이 등 많은 스코틀랜드 귀족은 여전히 잉글랜드 왕국을 따랐다. 로버트 1세는 존 3세 코민의 살해로 여전히 파문당한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교황청에 사절을 보냈지만, 교황청은 잉글랜드의 압력 때문에 파문을 유지했다.

3.2.2. 에드워드 2세의 반격 시도

로버트 1세가 스코틀랜드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며 빼앗겼던 영토를 탈환하는 동안, 에드워드 2세는 총신인 피어스 개버스턴에 대한 귀족들의 반발로 인한 정치 혼란에 직면하느라 스코틀랜드에서의 전쟁을 소홀히 했고, 스코틀랜드 가신들의 구원 요청에 전혀 응하지 않았다. 사실 에드워드 1세가 대규모 원정을 잇달아 벌이느라 부채가 대단히 많이 쌓였기 때문에, 원정을 벌이고 싶어도 그럴 여력이 되지 않았다. 에드워드 2세가 귀족들의 압력으로 자신이 총애하는 개버스턴을 추방한 후, 그는 1308년 6월 21일에 8월 22일에 칼라일로 군대를 소집하여 스코틀랜드로의 새로운 원정을 이끌려 했다. 그러나 원정은 실행되지 않았고, 공식적인 취소도 없었다. 1308년 11월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휴전 협상을 벌인 후, 프랑스의 중재하에 1309년 2월 2일부터 11월 1일까지 유효한 휴전 협정이 맺어졌다.

1309년 7월 30일 스탬퍼드에서 의회를 소집한 에드워드 2세는 스코틀랜드를 상대로 새로운 작전을 시작하기 위해 9월 29일 뉴캐슬로 군대를 소집했다. 하지만 그가 가장 총애하는 개버스턴을 다시 불러들인 이래로, 유력 귀족들은 그의 정책에 상당한 저항을 보였다. 이에 따라 군자금이 제대로 모이지 않으면서, 원정은 취소되었다. 1309년 10월, 왕은 헤리퍼드 백작 로버트 드 클리포드와 헨리 드 보몬트를 스코틀랜드로 파견하여 새로운 휴전 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추가 협상을 진행했다. 서유럽 군주들에게 십자군에 나가도록 설득하고자 했던 교황 클레멘스 5세의 중재를 통해 양자 간의 평화 협상이 이뤄졌지만, 에드워드 2세가 로버트 1세를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인정하길 거부했기 때문에 결렬되었다.

1310년 6월 16일 웨스트민스터에서 열린 의회에서, 알렉산더 아버네시, 아가일의 알렉산더, 그리고 다른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에드워드 2세에게 직접 스코틀랜드로 원정을 떠나지 않으면 나머지 가신들의 충성심을 잃을 것이라며, 조속히 원정에 나서줄 것을 호소했다. 에드워드 2세는 1310년 9월 8일에 군대를 베릭으로 소집했다. 그러나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 서리 백작 존 드 워렌, 리치먼드 백작 장 드 브르타뉴, 피어스 개버스턴만 그를 따랐고, 다른 귀족들은 참여를 거부했다. 베릭에 집결한 병력은 기병 1,700명, 보병 3,000명이었다. 얼스터 백작이 늦어도 1310년 6월까지 아일랜드에서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아가일에 상륙해 왕을 도울 계획이었지만, 악천후와 역풍 때문에 함대가 바다를 건너지 못했다. 대신 일부 군대는 맨 섬의 수비대를 지원했다.

이러한 난관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 2세는 1310년 9월 중순에 스코틀랜드로 진격했다. 9월 16일, 에드워드2세는 록스버러에 도착했고, 9월 23일경에는 셀커크에 도착했으며, 9월 26일경에는 비가에 도착했다. 10월 중순, 잉글랜드군은 로버트 1세와 그의 군대가 스털링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병력이 너무 적어서 정면 대결을 벌일 수 없었다. 10월 중순에 렌프루와 글래스고로 이동했고, 더 나아가 린리스고까지 진군했다. 이후 에든버러에 잠시 머무르면서 포스 강 남쪽에 있는 수비대를 지원한 뒤, 남쪽으로 후퇴하여 11월 11일경 다시 베릭에 도착했다. 이렇듯 잉글랜드군이 이동하는 동안, 로버트 1세는 전면전을 회피하면서 적 식량 수집대를 끈질기게 습격해 타격을 입혔다.

1310년 10월 28일, 에드워드 2세는 궁정과 국고를 요크로 이전하라고 명령했고, 본인은 베릭에 1311년 7월까지 머물렀다. 이 전쟁에 참여했던 귀족들 역시 1310년~1311년 겨울 동안 스코틀랜드 국경에 머물렀다. 그러나 군사 작전을 재차 감행하지 못했고, 로버트 1세가 로디언을 침공했을 때야 소규모 병력으로 반격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에드워드 2세는 로버트 1세와 협상하기로 하고, 로버트 드 클리퍼드와 로버트 피츠페인을 파견했다. 두 사람은 1310년 12월 17일 셀커크에서 로버트 1세와 접견해 협상했다. 그러나 피어스 개버스턴과 글로스터 백작이 멜로즈 수도원에서 만나자고 한 제의는 로버트 1세가 배신을 우려해 거부하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국내의 정치적 압력이 심해지자, 에드워드 2세는 원정을 중단하고 1311년 7월 웨스트민스터로 돌아갔다.

3.2.3. 로버트 1세의 잉글랜드 습격

에드워드 2세가 웨스트민스터로 돌아간 직후, 로버트 1세는 경무장 기병대를 이끌고 1311년 8월 12일부터 20일까지 잉글랜드 북부로 쳐들어가서 노섬벌랜드, 컴벌랜드, 웨스트모어랜드를 약탈했다. 이후 9월 8일부터 23일까지 같은 지역에 대한 또 다른 습격을 지휘했다. 스코틀랜드는 이후에도 몇 년간 스코틀랜드에 남은 잉글랜드 성채를 꾸준히 공격했으며, 국경을 넘어 잉글랜드 북부를 지속적으로 습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다만 1297년 윌리엄 월레스가 무차별 약탈을 자행했던 것과는 달리, 몸값을 지불한 마을과 영지는 살아남게 해줬으며, 때로는 도시를 약탈만 할 뿐 방화하지 않았는데, 이는 향후 약탈 시 몸값을 지불할 거라는 기대에 따른 조치였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소와 곡물을 훔쳤지만, 잉글랜드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건 자제했으며, 오직 저항하는 자들만 학살했다. 때때로 잉글랜드군이 적군이 보급품 부족으로 인해 후퇴하도록 마을을 불태우기도 했다. 스코틀랜드군은 조직적인 저항을 받지 않고 잉글랜드 북부에서 종횡무진했고, 노섬벌랜드 백작은 1311년과 1312년에 로버트 1세가 철수하는 대가로 2,000파운드를 지불했고, 1313년에는 알려지지 않은 거액을 지불했다. 1312년 8월, 로버트 1세는 타인 강 남쪽의 헥섬과 코브리지로 진군해 마을을 불태웠으며, 분견대는 더럼을 급습해 도시 일부를 불태우고 많은 사람을 죽이거나 전리품을 빼앗았다.

이후 로버트 1세는 1312년 8월 16일 헥섬에서 몇몇 시골 지주들과 협상해 2,000 마크를 받고 1313년 한여름까지 지속되는 휴전 협정을 맺었다. 컴벌랜드, 쿠플랜드, 그리고 웨스트모어랜드도 비슷한 휴전 협정을 맺었다. 각 주에서는 즉시 자금을 조달할 수 없었기에 인질을 제공해야 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자금이 제때 오지 않으면 인질을 학대하는 대신 소규모 습격을 의도적으로 벌여서 잉글랜드인들에게 압박을 가했다.

1314년 4월, 로버트 1세의 형제 에드워드 브루스가 더럼주에 대한 공격을 지휘한 뒤 칼라일을 잠시 포위했다가 철수했다. 노섬벌랜드에서는 스코틀랜드의 연례 습격이 이어지면서 행정부가 붕괴하였으며, 많은 귀족과 민중이 가난해지거나, 사망하거나, 스코틀랜드로 이탈했다. 더럼의 행정부는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주민들은 엄청난 몸값을 스코틀랜드인들에게 지불해야 했다.

로버트 1세는 스코틀랜드 내 성채에 대한 공세도 병행했다. 1313년 1월, 스코틀랜드인들이 기습 공격을 가해 퍼스를 점령했다. 한 달 후, 던갈 맥도웰이 오랜 포위 공격 끝에 덤프리스 성을 항복시켰다. 린리스고도 1313년 9월 기습 공격으로 함락되었다. 로버트 1세는 자기가 탈환한 스코틀랜드 성과 도시에서 어떠한 유혈 사태도 일어나지 않도록 했으며, 잉글랜드 수비대에게 잉글랜드로 돌아가는 걸 허락했다. 1313년,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는 프랑스를 방문한 에드워드 2세에게 그해 6월 10일에 만료될 예정이던 스코틀랜드와의 휴전을 1년 연장하라고 권고했다. 에드워드 2세는 이를 받아들였고, 스코틀랜드인들은 잠시 공세를 중단했다가 1314년 초부터 전쟁을 재개했다. 1314년 2월 20일 밤, 스코틀랜드인들이 야간 공격을 감행해 록스버러 성을 함락시켰다. 그해 3월, 스코틀랜드군은 에든버러 성 인근 바위에 올라간 뒤 성으로 잠입해 함락시켰다.

3.2.4. 스코틀랜드의 해상 공세

1310년 여름, 잉글랜드 왕국의 지배로 인해 중단되었던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간의 무역이 로버트 1세가 스코틀랜드 서부 해안을 장악한 덕분에 재개되었다. 스코틀랜드 상인들은 아일랜드로 들어와서 곡물, 고기, 기타 식료품뿐만 아니라 철, 무기, 갑옷도 구입했다. 무기와 갑옷은 아마도 아일랜드에서 생산된 것이 아니라 잉글랜드에서 생산되었다가 유럽 대륙에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제 스코틀랜드인들은 아일랜드해의 지배권을 얻으려 했다. 그들은 맨 섬은 1310년부터 1317년까지 스코틀랜드인이 접수했다가 잉글랜드인이 탈환하고, 스코틀랜드인이 다시 접수하는 식으로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스코틀랜드는 유럽 대륙의 도시들과도 무역 활동을 수행했다. 그들은 북해를 통해 플란데런 백국한자동맹 도시들에 양모를 수출하고 곡물, 철, 무기를 수입했다. 심지어 하위치, 노리치, 킹스린, 헐 출신의 수많은 잉글랜드 상인이 당국의 엄격한 처벌을 무릅쓰고 스코틀랜드와 비밀리에 무역했다. 만약 이러한 무역과 밀수가 없었다면, 로버트 1세는 무기와 갑옷을 제대로 구하지 못해 전쟁에서 이기기는 요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1315년 3월 동앵글리아 함대 제독으로 임명된 존 보테투르만이 스코틀랜드 항구에 대한 효과적인 봉쇄를 구축하는 데 성공하면서, 당시 기근을 겪고 있던 스코틀랜드의 밀 가격이 급등했다.

1312년 10월 29일, 로버트 1세는 인버네스에서 노르웨이 국왕 호콘 5세가 파견한 사절과 협정을 맺었다. 스코틀랜드는 이 협정에서 1266년 퍼스 조약에서 약속한 대로 서부 스코틀랜드 섬의 양도에 대한 연간 지불금 100 마크를 계속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여기에 오크니 제도에 대한 스코틀랜드인의 습격과 스코틀랜드 북부에 대한 노르드인의 공격에 대한 보상이 합의되었고, 해적 행위에 대한 사건은 법원에서 조사하기로 했다.

3.2.5. 1314년 전역과 배넉번 전투

1314년 3월, 스코틀랜드인들은 스털링 성을 포위했다. 이 성은 스코틀랜드에서 잉글랜드가 차지한 최후의 요충지였다. 그해 5월 중순, 스털링 성주 필립 드 모브레이는 포위군과 휴전 협정을 협상했는데, 1314년 6월 24일까지 성이 해방되지 않으면 항복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한편, 에드워드2세는 1314년 2월 26일에 귀족들과의 갈등을 해결한 뒤 4월 7일 이후에 스코틀랜드로 원정을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이제 수많은 귀족이 스코틀랜드 원정을 지원할 준비가 되었다. 제2대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가 에드워드 2세가 도착할 때까지 스코틀랜드의 총독이자 사령관으로 선임되었고, 잉글랜드 기사이자 궁정 신하 에드먼드 몰리는 컴벌랜드에 있는 요충지인 코커머스 성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1314년 5월 19일, 에드워드 2세는 보병 17,000명을 동원했고, 웨일스에 3,000명 이상을 동원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동원한 군대를 베릭에 집결시켰다. 여기에 왕실 기사와 잉글랜드 귀족 징집병들이 추가되면서, 수천 명의 기사와 기병이 확보되었고, 얼스터 백작의 지휘하에 아일랜드에서도 군대가 파견되었다. 잉글랜드군이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로버트 1세는 기존 전략대로 산악지대로 퇴각해 정면 대결을 회피하고 유격전으로 일관하려 했지만, 더 이상 영지들이 파괴되는 걸 원하지 않은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회전을 피하면 이탈하겠다고 압력을 가하자, 전면전을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아군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전장을 물색한 끝에, 배넉번에서 승부를 보기로 했다.

1314년 6월 23일~24일, 로버트 1세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과 에드워드 2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스털링 성 인근의 베넉번에서 격돌했다. 그 결과, 로버트 1세의 탁월한 지휘력과 에드워드 2세의 전술적 무능으로, 스코틀랜드군은 아군의 3배 가까운 전력을 자랑하던 잉글랜드군을 무너뜨렸다. 이 광경을 똑똑히 지켜본 스털링 성주 필립 드 모브레이는 전의를 상실하고 스털링 성을 넘겨주고 로버트 1세에게 충성을 서약했으며, 앵거스 백작과 아솔 백작은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이제 로버트 1세는 스코틀랜드의 모든 귀족과 백성으로부터 왕으로 인정받았다.

3.3. 이후의 전쟁

3.3.1.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국경에서의 무력 충돌

로버트 1세는 배넉번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뒤 잉글랜드 왕국과 평화 협상할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해 잉글랜드 북부 습격을 이어갔다. 1314년 8월 초, 로버트 1세의 동생 에드워드 브루스와 로버트 1세의 심복 제임스 더글러스는 잉글래드 북동부로 진군해 리치먼드셔까지 진군하면서 가축을 약탈하고 곡물 밭을 파괴한 후, 스웨일데일과 스테인무어를 거쳐 막대한 전리품을 챙긴 뒤 스코틀랜드로 돌아갔다. 그들은 후퇴하면서 브러, 애플비, 커크 오스월드를 방화했다. 또한 로버트 1세는 13세기에 조부가 소유했던 타인데일을 방문해 그곳 주민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1314년 8월, 에드워드 2세는 에이머 드 발랑스를 베릭 성과 트렌트 강 사이의 잉글랜드군 사령관으로 선임했지만, 잉글랜드군은 베릭 수비대를 강화하는 것 외에는 스코틀랜드군의 공세에 어떠한 대응도 하지 못했다.

1314년 9월 20일 스코틀랜드 사절과 존 보테투르가 이끄는 잉글랜드 대표단이 더럼에서 평화 협상을 벌였다. 양자는 1314년 10월 6일부터 휴전하기로 합의했으며, 배넉번 전투에서 생포되었든 잉글랜드 영주 및 기사들 대부분이 풀려났다. 그 대가로, 에드워드 2세는 로버트 1세의 아내 엘리자베스 드 버그와 그의 딸, 자매, 그리고 글래스고 주교 로버트 위셧을 풀어줬다. 그해 11월, 요크의 윌리엄 그린필드 주교, 더럼의 리처드 켈로 주교, 요크의 세인트 메리 수도원장이 추가 협상을 위한 사절로서 스코틀랜드를 방문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2세는 로버트 1세를 스코틀랜드의 왕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바꾸지 않았고, 결국 평화 협상은 결렬되었다. 1314년 11월 6일, 켐버스케네스 수도원에서 열린 스코틀랜드 의회는 잉글랜드 왕국을 아직도 지지하는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작위와 영지를 몰수한다고 선언했다.

평화 협상이 실패한 후,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 북부에 대한 약탈을 재개했다. 1315년 1월 3일, 요크 대주교와 더럼 주교는 북부 잉글랜드의 여러 귀족을 요크에 초대하여 회의를 연 뒤, 스코틀랜드의 침입으로부터 북부 잉글랜드를 방어할 방안을 논의했다. 1315년 2월, 에이머 드 발랑스는 노섬벌랜드를 더욱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미트포드 성을 건설했다. 그러나 배넉번 전투에서 막대한 전력을 잃은 여파가 여전히 심했기 때문에, 스코틀랜드군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채 잉글랜드 북부를 여러 차례 습격했다. 로버트 1세가 직접 습격을 지휘한 적은 거의 없고, 대신 에드워드 브루스와 제임스 더글러스가 습격을 지휘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약탈전을 점점 더 대담하게 벌였다. 그들은 '호빈(Hobin)'이라고 불리는 작고 튼튼한 말을 탔고, 기수들은 이 말의 이름을 따서 호벨라(Hobelar)'라고 불렸다. 병사들은 보통 가벼운 갑옷만 입었고, 공격할 때는 스킬트론을 형성할 수 있는 무기를 가지고 다녔는데, 이는 배넉번 전투에서 매우 효과적임이 입증되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아마도 전리품을 운반하기 위해 많은 짐마차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공격할 때는 신속하게 이동했지만, 철수할 때는 가축 떼를 북쪽으로 몰아야 해서 느릿느릿하게 이동했다.

1315년 초, 스코틀랜드인들은 타인데일까지 진격하여 홀트휘슬, 헥섬, 코브리지를 점령했다. 그해 6월에는 제임스 더글러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이 더럼 주로 쳐들어가서 하틀풀을 파괴했다. 에이머 드 발랑스는 그해 8월 초 베릭에 도착한 뒤 6월 22일부터 포위 공격을 받고 있던 칼라일을 구원하기 위해 일부 군대를 파견했다. 스코틀랜드군은 칼라일을 맹공격했지만, 초대 칼라일 백작 앤드류 하클레이의 거센 저항으로 공략에 실패하고 8월 1일에 철수했다. 1315년 8월 30일, 에드워드 2세는 겨울 동안 잉글랜드 북부에 머물러서 스코틀랜드를 막겠다고 선언했고, 11월 1일 에이머 드 발랑스를 대신해서 헨리 드 보몬트를 스코틀랜드 변경의 동부 지역을 지휘하는 사령관으로 선임했다. 1316년 1월 7일, 베릭 수비대는 로버트 1세와 제임스 더글러스가 이끈 스코틀랜드군의 공세를 물리쳤다.

3.3.2. 스코틀랜드군의 아일랜드 원정

1315년 5월, 에드워드 브루스는 형 로버트 1세의 지시에 따라 아일랜드에 상륙했다. 그는 잉글랜드 왕국의 지배를 받는 아일랜드 영지를 파괴함으로써, 아일랜드에서 병력과 물자가 차출되어 잉글랜드군이 스코틀랜드를 침공하는 걸 돕지 못하게 하려 했다. 또한 잉글랜드 함대들이 아일랜드 동부 항구인 더블린, 던독, 드로이다에 자리 잡고 스코틀랜드 서해안을 위협했기에, 이를 원천 봉쇄하려면 아일랜드 공략이 필요했다. 한편, 에드워드 브루스는 형과 아일랜드에 거주하는 게일인들의 지원을 받아 아일랜드의 아르드리가 되어 자신만의 나라를 세우려는 야망을 품었다. 로버트 1세는 1315년 칼라일 공략 실패 후 1316년 여름까지 거의 1년간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하지 않고, 아일랜드로 간 동생을 지원하는 데 힘을 쏟았다.

에드워드 브루스는 아일랜드에서 종횡무진했다. 그는 얼스터의 잉글랜드-아일랜드 군주들의 군대를 잇달아 격파했고, 캐릭퍼거스 성 수비대를 굴복시킨 뒤 던독까지 진군했다. 이후 앤트럼의 코너를 본부로 삼고 남쪽으로 약탈을 감행해 아일랜드 보안관 에드먼드 버틀러가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을 여러 전투에서 잇달아 격파했다. 그러나 그의 맹활약에도 불구하고, 게일인들은 그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얼스터를 제외하면 열렬히 호응하지 않았다. 1316년 8월 캐릭퍼거스 성을 공략한 에드워드 브루스는 그해 가을 지원군을 모집하기 위해 스코틀랜드로 향했다.

1317년 1월, 로버트 1세는 친히 스코틀랜드군을 이끌고 동생과 함께 아일랜드로 진군했다. 그러나 두 형제의 겨울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 많은 스코틀랜드인들은 물자 부족으로 고통을 겪었고,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었다. 로버트 1세는 군대를 얼스터로 이동시킨 뒤 스코틀랜드로 귀국했고, 잉글랜드 북부에 공격을 집중했다. 에드워드 브루스는 아일랜드에서 남아 전쟁을 이어갔지만, 1318년 10월 던독 인근의 포하트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고 전사했다. 1318년 12월, 잉글랜드군이 캐릭퍼거스 성을 함락시키면서, 아일랜드에서의 스코틀랜드 세력은 일소되었다.

3.3.3. 지속되는 전쟁과 협상

1316년 2월 또는 3월, 제임스 더글러스, 윌리엄 2세 드 소울스, 헨리 발리올이 이끈 스코틀랜드군이 콜드스트림 근처의 스캐이스뮤어 전투에서 머스와 티비엇 강어귀를 습격해 식량을 약탈하려 했던 베릭의 기병 수비대 300명을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피어스 개버스턴의 조카 레이몽 드 칼로를 비롯한 여러 기사가 전사했고, 잉글랜드인 50명 만이 무사히 탈출했다. 제임스 더글러스는 베릭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벌어진 또 다른 전투에서 잉글랜드 기병대를 격파했고, 그 부대의 지휘관이었던 라비의 로버트 네빌을 사살했다.

1316년 봄, 5월 30일에 만료되는 휴전 협정의 연장에 대한 예비 협상이 있었지만,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다. 1316년 2월 초, 링컨의 잉글랜드 의회는 배넉번 전투 이후 처음으로 스코틀랜드를 상대로 새로운 작전을 시작하기로 결의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새로운 세금과 병력 모집이 승인되었다. 그러나 군자금이 제대로 모이지 않는 데다 브리스톨에서 시민들이 봉기를 일으키면서, 원정일이 7월에서 8월로 연기되었다. 1316년 여름, 스코틀랜드군이 제임스 더글러스의 지휘하에 잉글랜드 북부를 향한 새로운 공세를 개시했다. 이들은 더럼 주와 요크셔 주의 도시와 마을들을 휩쓴 뒤 랭커셔 주에 처음으로 진군해 베로인퍼니스를 약탈했다. 이후 잉글랜드군의 원정은 10월 6일로 연기되었다가 더럼의 리처드 캘로 주교가 사망하자 더럼 주교를 뽑는 문제가 급해졌고, 결국 11월에 취소되었다. 그해 11월 24일, 에드워드 2세는 스코틀랜드와의 휴전을 협상하기 위해 사절단을 선임했다.

1317년 3월 17일, 교황 요한 22세는 추기경 고슬랭 드 장과 루카 피에스키에게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간의 평화를 중재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해 3월 28일, 교황은 로버트 1세를 재차 파문했고, 5월 1일에 휴전을 선포하고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 북부와 아일랜드에 대한 공격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는 칙서를 반포했다. 두 추기경은 7월에 런던에 도착해 중재 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로버트 1세는 교황의 칙서를 묵살하고 전쟁을 이어갔다. 1317년 4월 23일, 아룬델 백작 에드먼드 피츠앨런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제드버러 남쪽의 린탈리에서 제임스 더글러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에게 격파되었다.

한편, 1317년 5월 13일과 6월 11일 사이에 잉글래드 함대가 포스만 북쪽 해안에 상륙한 후 약탈을 시도했다. 잉글랜드군이 던펌린에 상륙하자, 제9대 던바 백작 패트릭 5세 드 던바가 이에 맞서려 했지만 군대가 전투를 벌이기 전에 도주하면서 실패했다. 이때 둔켈드 주교 윌리엄 싱클레어가 몇 마일 떨어진 오크터폴에서 패주한 장병들과 만나 그들의 비겁함을 꾸짖고, 직접 창과 갑옷을 챙기고 잉글랜드군을 공격했다. 잉글랜드군은 윌리엄 싱클레어가 이끄는 적군의 맹공격으로 패주했고, 탈출을 시도했다가 배가 과적 상태를 버티지 못하고 침몰하면서 많은 사람이 죽거나 사로잡혔다.

1317년 여름, 에드워드 2세는 스코틀랜드로의 원정을 재차 계획했다. 이 작전은 원래 7월 8일에 시작될 예정이었으나, 국왕을 대신하여 외교 사절로 대륙에 파견되었던 펨브로크 백작과 배들스미어 남작이 아직 잉글랜드로 돌아오지 않아 연기되었다. 이후 8월 11일 뉴캐슬에서 재차 원정을 떠나기로 했지만, 이보다 전인 7월 8일에 스코틀랜드 군대가 국경을 넘어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해 약탈을 자행했다. 이에 에드워드 2세는 그동안 자신과 대립했던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에게 스코틀랜드에 대한 공동 원정에 참여해 달라고 요청했다. 토머스는 이에 받아들이는 듯한 자세를 취했지만, 끝내 군대를 이끌고 나타나지 않았고, 원정은 9월 15일로 연기되었다.

에드워드 2세는 주교 7명과 펨브로크 백작, 헤리퍼드 백작으로 구성된 고위 사절단을 랭커스터 백작령의 중심지인 폰트프렉트 성으로 보내 토머스에게 합류를 요청하게 했지만, 토머스는 목숨이 위협받고 있기 때문에 갈 수 없다며 끝내 가지 않았다. 에드워드 2세는 일단 단독으로 진군하기로 하고, 1317년 9월 4일 요크로 출진했다. 그러던 중 폰트프렉트 성 근처를 지나갔는데, 토머스는 왕이 지나가자마자 다리를 막아서 지원군이 왕에게 도달하지 못하게 했다. 이후 에드워드 2세는 뉴캐슬에서 기병 1,500명, 경기병, 궁수, 석궁병 및 보병으로 구성된 상당히 큰 규모의 군대를 조직했다. 그러나 더럼에서 새로 선출된 주교인 루이 드 보몽과 그의 추기경인 고슬랭 드 장, 루카 피에스키가 길버트 미들턴에게 공격받아 재산을 약탈당했다. 에드워드 2세는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가 이 습격을 주도했다고 의심하고, 9월 8일 직후 원정을 중단했다. 그 후 1317년 11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휴전 협약을 맺기로 결의했다.

1318년 4월 초, 스콭르랜드군이 야간에 기습 공격해 베릭 성을 함락했다. 이리하여 스코틀랜드에 남아있던 유일한 요충지인 베릭 성이 스코틀랜드의 수중에 넘어갔다. 그 후 로버트 1세는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하기로 마음먹고, 5월에 요크셔로 쳐들어가 하보트, 워크 및 미트포드 성을 점령한 뒤 노샐러튼, 리폰, 폰트프랙트까지 진군했다. 리폰 주민들은 대성당으로 피신한 뒤 도시가 파괴되지 않는 조건으로 1,000 마크를 지불했다. 그 후 스코틀랜드군은 나레스버러를 불태운 후 스키튼을 거쳐 철수했다.

베릭이 함락된 사건은 잉글랜드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이에 에드워드 2세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는 화해한 뒤 1319년 늦여름에 함께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진군해 9월 7일부터 베릭을 포위했다. 그러나 월터 스튜어트가 이끄는 스코틀랜드 수비대는 적의 공세를 잘 막아냈다. 제임스 더글러스는 적이 포위를 저절로 풀도록 유도하고자 베릭을 우회하여 요크셔를 위협했다. 요크의 대주교 윌리엄 멜튼과 보안관 존 호담이 그를 물리치기 위해 군대를 모았지만, 9월 12일 미톤 전투에서 제임스 더글러스에게 패배했다.

랭커스터 백작은 미톤 전투 소식을 접하자 자기 재산을 지키기 위해 영지로 돌아갔고, 에드워드 2세는 9월 17일에 가망이 없다는 걸 깨닫고 철수했다. 그 후 에드워드 2세는 요크에 병사 600명과 함께 남았지만, 제임스 더글러스는 그런 그를 무시하고 잉글랜드 북부를 향한 새로운 공세를 벌여 1319년 11월 1일 길슬랜드 시를 파괴했다. 에드워드 2세는 스코틀랜드에 다시 휴전 협상을 제의했고, 1319년 12월 22일에 최소 2년간 휴전을 맺기로 합의했다. 잉글랜드 측은 이 협정에 따라 1년 이내에 성을 철거하거나 스코틀랜드에 반환한다는 조건으로 노섬벌랜드에 있던 하보틀 성을 돌려받았다.

1320년 4월 6일, 스코틀랜드 백작 8명과 남작 30명이 아브로스 수도원에서 "우리는 절대로 잉글랜드 왕국의 지배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라는 선언서를 작성하고 서명한 뒤 교황 요한 22세에게 발송했다. 이후 스코틀랜드 사절단이 아비뇽으로 가서 교황과 협상하기 시작하자, 잉글랜드 당국은 교황이 로버트 1세를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을 철회할까 봐 두려워했다. 이에 에드워드 2세는 가장 가까운 심복인 펨브로크 백작, 배들스미어 백작, 휴 르 디스펜서를 사절단 대표로 선임해 1320년 8월 칼라일에서 스코틀랜드 측과 협상하도록 했다. 하지만 잉글랜드 정부는 8월 14일에 스코틀랜드에 사절을 보내 협상을 연기해달라고 요청했는데, 그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1321년 1월 19일, 에드워드 2세는 스코틀랜드와 평화 협상을 진행하기 위한 대표단을 결성했다. 이 사절단에는 요크 대주교, 칼라일의 존 홀튼 주교, 우스터의 토머스 콥햄 주교 , 윈체스터의 리고 드 아세리오 주교, 펨브로크 백작, 헤리퍼드 백작, 배들스미어 백작, 내각장관 로버트 불독, 윌리엄 에어민, 그리고 랭커스터 백작의 추종자인 스티븐 시그레이브, 니콜라스 시그레이브, 폴크 레스트랭, 존 드 클래버링이 포함되었다. 여기에 교황 특사와 프랑스 대표단도 참여했다. 다만 펨브로크 백작은 여전히 프랑스에 있어서 참여하지 못하고, 리치먼드 백작이 그를 대신해 사절단에 합류했다. 3월 26일, 밤버러에서 양측이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회의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9월 1일로 연기되었다.

얼마 후, 웨일스 변경 지방에서 왕의 총애를 받는 휴 르 디스펜서에 대항한 변경 지방 영주들의 반란이 발발했고, 헤리퍼드 백작도 여기에 가담했다. 1321년 여름에는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가 참여하면서 잉글랜드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스코틀랜드와의 평화 협상은 자연히 이뤄지지 않았다. 에드워드 2세는 어쩔 수 없이 반란 수습에 전념하는 한편, 사전에 약속한 대로 하보틀 성을 철거하도록 했다. 한편,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는 제임스 더글러스와 비밀 회담을 갖고 스코틀랜드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322년 1월 6일, 제임스 더글러스는 휴전 협정이 만료되자마자 잉글랜드 북부를 향한 공세를 개시했다. 그는 티사이드를 약탈한 뒤 하틀풀과 클리블랜드를 약탈하고 몸값을 받아냈으며, 부관인 월터 스튜어트는 리치먼드셔를 약탈하거나 몸값을 확보했다. 당시 랭커스터 백작은 남부 요크셔에 상당한 규모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스코틀랜드에 대항하지 않았다.

1322년 초, 에드워드 2세는 랭커스터에 대한 군사 행동을 취하고 그를 북쪽으로 몰아냈다. 컴벌랜드의 보안관인 앤드류 하클레이는 왕에게 스코틀랜드인에 관해 경고했고, 왕의 승인을 받아 경기병대를 모집했다. 하지만 그는 이 병력을 스코틀랜드인에 대항해서 쓰지 않고, 1322년 3월 북쪽으로 도망치는 랭커스터를 비롯해 헤리퍼드, 배들스미어를 포함한 나머지 반군을 공격해 버러브리지 전투에서 반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하고 랭커스터 백작을 체포했다. 그 사이 에드워드 2세는 랭커스터의 성을 접수한 뒤, 스코틀랜드인들과 비밀 협상을 한 증거를 발견했다. 결국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는 반역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다.

에드워드 2세는 반란을 진압한 뒤 스코틀랜드를 향한 새로운 원정을 준비했다. 하지만 로버트 1세가 1322년 7월 1일에 먼저 잉글랜드로 진군했다. 그는 컴벌랜드 서부로 진군하여 더든 샌즈에서 더든 강어귀를 지내 퍼니스로 진군해, 그곳 시민들로부터 몸값을 받아냈다. 이후 스코틀랜드군은 켄트 강 어귀를 건너 랭커셔로 진군했고, 랭커스터와 프레스턴을 파괴한 뒤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7월 24일에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에드워드 2세는 이들을 추격하기로 하고, 8월 10일 스코틀랜드로 진입해 8월 19일 에든버러 인근의 머슬버러에 도착한 후 리스로 이동했다.

로버트 1세는 적을 저지하지 않고 북쪽으로 후퇴하면서, 잉글랜드군이 지나갈 진군로 주변을 초토화했다. 보급품을 좀처럼 확보할 수 없자, 굶주림과 질병으로 약해진 잉글랜드군은 철수했다. 로버트 1세는 퇴각하는 적을 추격해 9월 30일 국경을 넘어 잉글랜드로 진입했다. 에드워드 2세는 적이 쫓아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하고 대부분의 군대를 해산한 뒤 리보 수도원에 머물렀다. 그러던 중 스코틀랜드인들이 자신을 추격하고 있으며, 이미 몇 킬로미터 떨어진 노스앨러튼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여러 귀족과 군대에 복귀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들은 제때 도착하지 못했고, 10월 14일 스코틀랜드군이 바이랜드 전투에서 리치먼드 백작이 이끄는 왕의 호위대를 격파했다. 에드워드 2세는 가까스로 체포를 모면하고 요크 지방으로 도주했다. 타인머스 수도원에 머물던 프랑스의 이자벨 왕비도 스코틀랜드군을 피해 도주한 끝에 배를 타고 탈출했다. 이후 스코틀랜드군은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약탈을 자행했다.

1322년 원정이 실패한 후, 요크 의회는 1322년 11월에 또 다른 원정을 위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새로운 세금을 승인했고, 1323년 2월 2일에 새로운 군대가 요크에 소집되었다. 그러나 많은 귀족은 1322년 대규모 캠페인의 비참한 실패와 바이랜드에서의 패배 이후 에드워드 2세가 스코틀랜드를 상대로 이길 가망이 없다고 확신했다. 스코틀랜드 변경 지방에서 가장 경험이 풍부한 잉글랜드 군인이었던 앤드류 하클레이는 1323년 1월 로크마벤에서 로버트 1세와 직접 협상했다. 그는 잉글랜드 국왕의 승인을 기대하고 스코틀랜드 왕과 평화 조약을 맺었는데, 이때 스코틀랜드를 잉글랜드와 별도의 왕국으로 인정하고 로버트 1세를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인정한다고 밝혔다. 이 소식을 접한 에드워드 2세는 격분해 조약을 무효로 처리하고, 하클레이를 체포한 뒤 반역 혐의를 적용해 처형했다.

이후 양국은 3월 14일에 5월 22일까지 유효한 임시 휴전을 맺었다. 4월 29일 휴전 기간이 6월 2일로 연장되었고, 세인트앤드루스의 윌리엄 램버튼 주교가 대표하는 스코틀랜드 대표단이 뉴캐슬로 향했다. 5월 1일, 에드워드 2세는 펨브로크 백작, 엑서터의 월터 스테이플던 주교, 휴 르 디스펜서, 로버트 불독에게 장기 휴전 협정을 체결할 권한을 위임했다. 처음에는 협상이 느릿하게 진행되었다. 에드워드 2세는 5월 11일 자 편지에서 펨브로크 백작에게 최근 몇 년 동안 스코틀랜드인들이 저지른 수많은 습격과 범죄에 대해 불평했다. 그러다가 1323년 5월 말, 대표단은 평화 조약에 합의하지 않고, 1336년 6월 12일까지 최소 13년간 유효한 휴전 협정에 합의했다. 로버트 1세는 이번에도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두 대표단은 요크의 비숍소프에 도착했고, 요크 대주교의 궁정에서 국왕과 특별히 소집된 내무부는 5월 30일에 장기 휴전을 인정했다.

휴전 협정이 체결된 후, 로버트 1세는 잉글랜드 왕국과 평화 조약을 통해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인정받기 위해 추가 협상을 시도했다. 1324년 11월 18일, 그의 사절인 세인트앤드루스의 윌리엄 램버튼 주교와 모레이 백작 토머스 랜돌프는 요크에서 잉글랜드 대표단을 만났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잉글랜드 국왕이 스코틀랜드 왕에 대한 모든 주장을 포기하고, 스코틀랜드가 요크까지 이르는 잉글랜드 북부의 대부분을 넘겨받을 것을 요구했으며, 로버트 1세가 잉글랜드 동부 에식스에 있는 그의 가문의 옛 영지를 돌려받을 것을 요구했다. 또한 잉글랜드 측은 스코틀랜드의 전통적인 대관식에 사용되는 운명의 돌을 반환해야 했다. 그 대가로, 로버트 1세는 자기 딸 한 명과 잉글랜드 왕위 계승자인 에드워드 왕자 사이의 결혼 동맹을 프랑스 국왕과 교황이 지켜보는 가운데 체결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측은 그들의 주장이 지나치다고 여기고 거부했다.

3.3.4. 웨어데일 전역

1327년 1월, 에드워드 2세가 로저 모티머프랑스의 이자벨 왕비에 의해 폐위되고 장남 에드워드 왕자가 에드워드 3세로서 잉글랜드 국왕이 되었다. 에드워드 3세의 대관식 날인 1327년 2월 1일, 스코틀랜드군이 노럼 성을 기습 공격해씾만 격퇴되었다. 1327년 4월, 로버트 1세는 얼스터로 가서 그곳을 장악하려 했지만, 현지인들의 외면으로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327년 7월 스코틀랜드로 돌아갔다. 그 사이, 로저 모티머는 스코틀랜드를 응징하기 위해 원정을 벌이기로 하고, 전국에 징집령을 내렸다.

1327년 봄, 잉글랜드 왕실군이 노섬벌랜드 일대를 지속적으로 습격하는 스코틀랜드인들을 물리치기 위해 북상했다. 왕실군의 공식 사령관은 에드워드 3세였지만, 실질적인 지휘관은 로저 모티머였다. 에드워드 3세는 5월 말에 요크에 도착한 뒤 6월 내내 그곳에서 보내면서 시장, 마을 사람들, 수도원장들의 접견을 받았다. 7월 초, 로저 모티머가 이끄는 왕실군이 요크에서 출진해 더럼으로 진군했다.

그러나 8월 3일 또는 4일 밤에 스탠호프 인근의 웨어 계곡에서 제임스 더글러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의 기습 공격을 받고 와해했다. 당시 원정군에 동행하던 에드워드 3세는 스코틀랜드인들에게 하마터면 잡힐 뻔했다. 한 연대기에 따르면, 제임스 더글러스가 "더글러스!"라고 외치며 곧장 잉글랜드 숙영지 중앙 지점으로 달려가서 왕실 텐트의 밧줄 몇 개를 잘라내는 바람에 텐트가 무너졌고, 그 안에 있던 에드워드 3세는 한참 동안 그곳에서 허우적거리다가 가까스로 구조되었다고 한다. 로저 모티머는 군대를 가까스로 수습했지만 사기가 너무 떨어져서 더 이상 원정을 이어갈 수 없다고 보고 철수했다. 일부 연대기 작가들은 에드워드 3세가 원정 실패에 너무 격분해 철군하는 내내 울었다고 밝혔다.

그 후 스코틀랜드군은 잉글랜드 북부로 쳐들어가 심각한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이에 잉글랜드 왕실은 북부 잉글랜드에 세금 감면 혜택을 제공했다. 당시 잉글랜드 정부 지출은 7만 파운드였는데, 그중 41,000파운드가 용병에게 지급되었다. 반면 잉글랜드 정부의 연간 수입은 30,000파운드였고, 수입을 제외한 지출액은 빚으로 충당되었다. 이에 잉글랜드 당국은 1327년 9월 중순 링컨에서 의회를 소집한 뒤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국경을 보호하는 데 들어가는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동산의 1/20를 직접세로 거두기로 했다.

3.3.5. 애든버러-노샘프턴 협약

1327년 10월, 로버트 1세가 노섬벌랜드로 출진해 그 일대의 여러 성을 하나씩 공략하고 있다는 급보를 접한 로저 모티머와 프랑스의 이자벨은 더 이상 스코틀랜드와 전쟁을 벌이는 건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로버트 1세에게 사절을 파견해 평화 협상을 제의했다. 당시 중병을 앓고 있던 로버트 1세도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 전쟁을 끝내기를 갈망했기에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후 협상이 순조롭게 이어진 끝에, 1328년 3월 17일 에든버러에서, 그리고 5월 4일 노샘프턴에서 전쟁을 끝낼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다.

에든버러-노샘프턴 협약에 따르면, 잉글랜드 왕국은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인정해야 했고, 에드워드 3세는 로버트 1세와 그의 후손들이 스코틀랜드를 통치하는 것을 인정하고 스코틀랜드 왕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며, 두 왕국 사이의 국경은 스코틀랜드 전임 국왕 알락산더르 3세 치세 말년 때의 국경과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또한 에드워드 3세의 여동생인 6살 된 조앤과 로버트 1세의 어린 아들인 데이비드 사이의 결혼 협약이 체결되었다. 또한 스코틀랜드는 북부 잉글랜드를 황폐화한 것에 대해 2만 파운드의 배상금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리하여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이 종결되었다.

4. 이후

30여 년간 이어진 기나긴 전쟁 끝에, 스코틀랜드 왕국은 잉글랜드 왕국으로부터 독립하는 데 성공했고, 로버트 1세와 브루스 왕조는 반석 위에 오르는 듯했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많은 영주들은 스코틀랜드에 있던 영지를 포기하게 된 것에 깊은 불만을 품었고, 로버트 1세에게 축출된 스코틀랜드 출신 귀족들 역시 복귀를 꾀했다. 에든버러-노샘프턴 협약을 이끌었던 로저 모티머는 많은 비난을 받았고, 결국 1330년 10월 에드워드 3세의 친위 쿠데타로 실각 후 처형되었다.

한편,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로버트 1세는 1329년 6월 7일에 사망했고, 5살의 어린 아들 데이비드 2세가 스코틀랜드의 새 국왕이 되었다. 이후 스코틀랜드 정계가 혼란스러워지자, 잉글랜드 북부 귀족들은 이 기회에 잃어버린 스코틀랜드 영지를 되찾기로 마음먹고 1332년 아일랜드 영지를 안정시키기 위해 아일랜드로 출진하려던 에드워드 3세에게 아일랜드 대신 스코틀랜드를 침공해달라고 강하게 요청했다. 에드워드 3세는 직접 개입은 거부했지만, 그들이 자발적으로 사병대를 일으켜 스코틀랜드를 침공하는 건 암묵적으로 받아들였다. 이에 잉글랜드 귀족들이 지난날 에드워드 1세가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세웠던 존 발리올의 아들인 에드워드 발리올을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내세우고 스코틀랜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의 막이 올랐다.

5. 주요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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