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3-21 20:18:42

앤드류 모레이

이름 앤드류 모레이
Andrew Moray
출생 미상
스코틀랜드 왕국 모레이 지방
사망 1297년 9월 11일 또는 11월
스코틀랜드 왕국
아버지 페티의 앤드류 모레이
어머니 바데녹 영주 존 코민 1세의 딸
자녀 앤드류 머레이
직위 스코틀랜드 반란군 사령관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스코틀랜드의 귀족.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초기 윌리엄 월레스와 함께 에드워드 1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인물이다. 당대 연대기에는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 '모레이의 앤드류'(Andrew of Moray)로 명기되기도 했다.

2. 생애

아버지는 모레이 지방의 페티, 브라콜리, 보하름, 아르텔돌의 영주 앤드류 모레이이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어머니는 바데녹 영주 존 코민 1세의 딸이다. 아버지 앤드류 모레이는 클래버링, 워크워스, 호스포드의 영주 로저 피츠존의 딸이자 킬브라이드의 영주 윌리엄 코민의 미망인인 유페미아와 두 번째로 결혼하여 윌리엄 모레이를 낳았다. 이복형제 윌리엄 모레이는 드럼사가드의 영주로, 다른 가족과는 달리 1304년 사망할 때까지 에드워드 1세에 대항하지 않고 충성을 유지했다.

페티의 모레이 가문은 스코틀랜드 국왕 다비드 1세로부터 영지를 하사받고 스파이니 호수 북쪽 해안에 모트 앤 베일리 성을 지은 플란데런 귀족 프레스킨에서 유래한다. 스코틀랜드 북동쪽 모레이 지방은 오랫동안 스코틀랜드 국왕의 지배에 대항한 반란이 일어났다. 967년에는 두브 막 말 콜룸 왕이 모레이 지방의 포레스에서 피살되기도 했다. 다비드 1세는 이 불온한 지방을 복종시키기 위해 프레스킨 및 여러 앵글로-노르만 귀족들을 모레이에 정착시켰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된 토착 귀족들을 타지로 강제 이송시켰다. 이후 페티의 모레이 가문은 모레이 지방에서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귀족 가문으로 손꼽혔다.

아버지 앤드류 모레이는 1289년부터 스코샤의 판사로서 스코틀랜드 하이랜드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여기에 삼촌인 보스웰의 윌리엄 모레이는 라나크셔와 링컨셔에 광대한 영지를 보유했으며, 사우스 라나크셔에 보스웰 성을 건설했다. 그는 아버지와 삼촌의 상속자로서, 장차 하이랜드, 로우랜드, 잉글랜드 북부에 걸친 광대한 영지를 물려받을 예정이었다. 페티의 모레이 가문은 스코틀랜드 교회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의 조상 앤드류 모레이(? ~ 1242)는 로스와 모레이의 주교였으며, 1224년 주교구 소재지를 엘긴으로 옮기고 이 도시에 대성당을 건설했다. 또한 그의 또다른 삼촌인 데이비드 드 모라비아는 보스월 교회의 주임사제를 맡다가 1299년 모레이 주교가 되었고, 로버트 1세의 확고한 지지자로서 그가 잉글랜드에 맞서 싸우는 걸 도왔다.

13세기 말, 스코틀랜드의 정계는 무척 혼란스러웠다. 1286년 3월 19일, 스코틀랜드 국왕 알락산더르 3세가 남성 후계자를 두지 못한 채 사고사했다. 그의 손녀이자 스코틀랜드의 마거릿과 노르웨이 국왕 에이리크 2세의 외동딸인 마르그레트 에이릭스도티르가 스코틀랜드 여왕으로 선포되었지만, 1290년 노르웨이에서 스코틀랜드로 가던 중 심한 뱃멀미로 인해 오크니 제도에서 병사했다. 이리하여 200여 년간 스코틀랜드를 다스렸던 둔켈드 왕조가 단절되었고, 14명에 달하는 왕위 주장자들이 스코틀랜드 왕관을 놓고 치열한 분쟁을 벌였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분쟁을 자체적으로 해결할 가망이 없자, 가장 가까운 이웃인 잉글랜드의 국왕 에드워드 1세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에드워드 1세는 자신이 알바 왕국을 안정시켜줄 의향이 있다며, 그 대신 모든 왕위 요구자가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로드 파라마운트(Lord Paramount: 최고의 주권자)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해 관철시켰다. 1291년 6월 6일, 에드워드 1세는 베릭어폰트위드에서 새로운 회의를 소집해 왕위 요구자 14명이 직접 또는 사절을 통해 알바 국왕이 되어야 할 이유를 설명하게 했다. 이후 대부분의 왕위 후보자가 배제되었고, 오직 존 발리올과 로버트 브루스만 남았다. 에드워드 1세는 브루스와 발리올이 선택한 사람들로 구성된 대규모 배심원들과 논의한 끝에, 1292년 11월 17일 존 발리올을 스코틀랜드의 새 국왕으로 선포했다.

그러나 존 발리올은 에드워드 1세의 간섭에 시달린 끝에 1295년 에드워드 1세를 더 이상 주군으로 섬기지 않고,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와 동맹을 맺어 잉글랜드에 대항하기로 결심했다. 이에 에드워드 1세는 불충실한 봉신 존 발리올을 응징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스코틀랜드 침공을 준비했다. 1296년 봄, 존 발리올을 추종하는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잉글랜드 북부를 선제 공격했다. 이때 앤드류 모레이는 아버지와 삼촌 윌리엄 모레이와 함께 이 군대에 가담했다. 스코틀랜드군은 컴벌랜드와 노섬벌랜드 일대의 여러 마을을 약탈한 뒤 제6대 애넌데일 영주 로버트 브루스가 지키는 칼라일을 포위 공격했지만 공략에 실패한 뒤 철수했다.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를 침략하기 위해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국경지대에 대규모 군대를 집결했다. 1296년 3월 25일, 제6대 애넌데일 영주 로버트 브루스와 그의 아들인 캐릭 백작 로버트 브루스를 포함한 반(反) 발리올 성향의 스코틀랜드 귀족이 에드워드 1세를 알현해 충성을 서약했다. 그 후 에드워드 1세는 국경을 넘어 3월 30일 베릭을 포위했고, 사흘만에 함락한 뒤 주민 수천 명을 학살하고 막대한 재물을 약탈했다. 1296년 4월 27일, 제6대 서리 백작 존 드 워렌이 이끄는 잉글랜드 선봉대는 던바 성을 포위하던 중 존 발리올이 급파한 스코틀랜드군을 던바 전투에서 요격해 섬멸했다.

던바 전투 패배 후,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저항 의지를 급격히 상실했다. 존 발리올과 스코틀랜드 영주들은 몬트로즈 성에서 에드워드 1세에게 항복했고, 존 발리올은 왕위에서 물러난 뒤 런던 탑으로 끌려갔다. 에드워드 1세는 몬트로즈에서 출발하여 스코틀랜드 북부로 향해 1296년 7월 26일 엘긴에 도착한 후 스코틀랜드 귀족으로부터 스코틀랜드의 국왕으로 받들어진 뒤, 스코틀랜드 역대 국왕들이 대관식 때 썼던 운명의 돌을 챙긴 채 런던으로 귀환했다. 이때 던바 전투에서 생포된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잉글랜드로 끌려갔다. 아버지 페티의 앤드류 모레이와 같은 가장 중요한 죄수들은 런던 탑으로 이송되었고, 그의 아들 앤드류 모레이는 체스터 성에 이송되었다.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를 정복한 뒤 잉글랜드 행정부를 도입했으며, 서리 백작 존 드 워렌을 총독으로 세웠고, 휴 드 크레싱엄을 스코틀랜드 재무관으로 선임했다. 로디언, 스코샤와 갤러웨이의 판사직은 잉글랜드에서 임명되었으며, 모든 주요 스코틀랜드 왕궁과 요새에는 잉글랜드 수비대가 주둔했다. 이후 잉글랜드의 세금 징수원들이 거듭된 전쟁으로 피폐해진 왕실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스코틀랜드 주민들을 대상으로 높은 과세를 부과하고 닥치는 대로 거둬들였다. 또한 에드워드 1세는 프랑스를 상대하는 전쟁에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참여하라고 강요했다. 이에 스코틀랜드 각지에서 잉글랜드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일기 싲가했다.

1296/1297년 겨울, 앤드류 모레이는 체스터 성에서 탈출했다. 그가 어떻게 탈옥할 수 있었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그는 스코틀랜드 북부에 있는 아버지의 영지로 돌아간 뒤, 1297년 5월 로스 주의 아보크에 있는 자신의 성에서 반기를 들었다. 과거에 아버지의 봉신이었던 이 중 다수는 기꺼이 그에게 가담했다. 또한 스코틀랜드 북부의 아가일과 로스에서도 반란이 일어났고, 스코틀랜드 서해안에서는 라클란 맥루아이드리와 루아이드리 맥루아이드리 형제가 반기를 들었다. 스코틀랜드 남동부의 갤러웨이 지방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반란이 일어났고, 파이프에서는 파이프의 맥더프 백작과 그의 아들들이 반란군을 이끌었다. 그들은 왕실 관리들을 살해하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았으며, 잉글랜드 수비대가 주둔하던 성을 잇달아 공략했다.

앤드류 모레이는 모레이 지방에서 반란을 이끌었다. 인버네스의 보안관 레지날드 르 첸은 1297년 5월 25일에 인버네스 성에서 회의를 소집한 뒤 앤드류 모레이에 어떻게 대항할지를 논의했다. 회의가 끝난 후 돌아가던 어콰트 성주 윌리엄 피츠워린은 인버네스에서 남쪽으로 멸 마일 떨어진 지점에서 앤드류 모레이와 알렉산더 필체가 이끄는 반란군의 매복 공격을 받고 많은 사람과 많을 잃고 가까스로 탈출했다. 다음 날, 앤드류 모레이와 알렉산더 필체는 어콰트 성을 포위했다. 이때 로스 백작부인 유페미아가 수행원들과 함께 현장에 예상치 못하게 나타났다. 런던 탑에 에드워드 1세에게 잡힌 남편 윌리엄 2세를 둔 백작부인은 모레이에게 항복하라고 권했다. 모레이는 그녀의 제안을 거부했지만 안전하게 돌아가도록 배려했고, 윌리엄 피츠워린은 훗날 에드워드 1세에게 유페미아의 행동을 칭찬했다.

앤드류 모레이는 공성 장비가 없기에 정공법으로는 성을 공략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야간 기습으로 공략하려 했지만 실패한 뒤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그 후 윌리엄 피츠워린은 1297년 7월 에드워드 1세에게 서신을 보내 "사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로스의 아보크 성에서 앤드류 모레이와 합류했다."고 보고했다. 어콰트 성은 그 시기에 앤드류 모레이에게 재차 포위되었고, 식량이 다 떨어져서 굶주림에 시달린 성 수비대는 결국 항복했다. 이때 윌리엄 피츠워린은 어콰트 성이 포위되기 전에 그곳을 떠나 존 드 워렌과 합류했다. 이후 앤드류 모레이는 1297년 여름까지 모레이 지방의 모든 성채를 장악했다.

에드워드 1세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스코틀랜드 영주들을 활용해 반란을 진압하기로 했다. 에버딘 주교 헨리 체인, 로스 백작의 아들 가르트나이트 드 마르, 그리고 부컨 백작 존 코민과 바데녹 영주 존 코민 2세, 존 코민 3세 부자 등이 에드워드 1세의 지시를 받고 스코틀랜드로 파견되었다. 그들은 애버딘에서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진군했고, 엔지의 스페이 강둑에서 앤드류 모레이의 반군과 만났다. 하지만 그들은 별다른 전투를 벌이지 않다가 동시에 철수했다. 그렇게 앤드류 모레이가 별다른 훼방을 받지않고 하이랜드를 접수하는 동안, 윌리엄 월레스는 스코틀랜드 남부에서 세인트앤드루스 주교 윌리엄 램버튼, 글래스고 주교 로버트 위샤트 등의 지원을 받으며 스코틀랜드 남부를 순조롭게 접수했다.

에드워드 1세는 좀더 교묘한 방법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아들이 왕의 인질로서 런던 탑에 들어간다면, 런던 탑에 갇혀 있던 페티의 앤드류 모레이를 풀어주고 플란데런에서 잉글랜드군에 참여하게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여기에 1297년 8월 28일, 앤드류 모레이에게 잉글랜드로의 안전한 통행을 허가하는 왕실 헌장이 발급되었다. 이 헌장이 앤드류 모레이에게 전달되었는지는 불분명하나, 전달되었다고 해도 무시되었고, 페티의 앤드류 모레이는 런던 탑에서 끝내 빠져나오지 못하고 1298년 4월 8일에 옥사했다.

1297년 9월, 앤드류 모레이는 윌리엄 월레스와 연합한 뒤 던디 성을 포위했다. 1297년 늦여름, 서리 백작 존 드 워렌이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이 스코틀랜드 중부로 파견되었다. 적군이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앤드류 모레이와 윌리엄 월레스는 일부 병력을 남겨둬서 던디를 계속 포위하도록 한 뒤, 주력군을 거느리고 스털링 성에 주둔한 존 드 워렌에게 접근했다. 두 사람은 기병 180명과 5,000~6,000명 가량의 무장이 거의 되지 않았고 훈련을 받지 않은 보병대를 이끌었다. 모레이의 군대는 4,000~5,000명으로 스코틀랜드 군대의 대부분을 차지했다고 전해지며, 윌리엄 월레스의 군대는 1,000명에 불과했다.

윌리엄 월레스와 앤드류 모레이는 포스 강 북쪽 기슭의 약간 가파른 언덕인 애비 크레이그(Abbey Craig)의 남쪽 경사면에 군대를 배치했다. 이들은 스털링 성의 좁은 다리에서 북쪽으로 약 1.5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진군로는 다리 북쪽 끝에서 애비 크레이그 시작 지점까지 제방 위로 이어져서 초원과 곡물밭을 지났으며, 양쪽으로는 구불구불 흐르는 강이 경계를 이뤘다. 습지는 없었지만, 땅이 대체로 부드러워서 기병 돌격에 적합하지 않았다. 한편, 스털링 성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존 드 워렌과 휴 드 크레싱엄은 스코틀랜드 대집사 제임스 스튜어트와 제4대 렌녹스 백작 맬컴과 합류한 뒤, 9월 10일 지원군을 데려오고 스코틀랜드군에게 항복을 설득하는 임무를 맡겨 보냈다.

1297년 9월 11일 아침, 제임스 스튜어트와 렌녹스 백작 맬컴이 돌아와서 스코틀랜드인들이 항복을 거부했으며, 자신들을 따르던 가신들조차 항복시키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이에 존 드 워렌은 두 사람을 윌리엄 월레스에게 보내 항복 의사가 있는지 물어보게 했지만, 윌리엄 월레스는 단 번에 거부했다. 이에 존 드 워렌은 무력으로 적군을 섬멸하기로 했다. 잉글랜드 편에서 복무하던 스코틀랜드 기사 리처드 런디는 군대의 일부와 함께 서쪽의 넒은 여울을 통해 강을 건너 스코틀랜드군을 뒤에서 공격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휴 드 크레싱엄은 아침에 지연이 있었으므로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반대했고, 존 드 워렌은 스코틀랜드 반란군은 오합지졸일 뿐이니 정면 돌격으로도 손쉽게 물리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전군에 다리를 건너라는 명령을 내렸다.

휴 드 크레싱엄과 초대 트윙 남작 마마듀크 트윙이 지휘하는 기병 150명과 보병 1,800명이 먼저 다리를 건너갔다. 이때 윌리엄 월레스와 앤드류 모레이가 선제 공격을 명령했고, 스코틀랜드 보병들은 언덕을 내려와 초원을 건너 댐을 향해 달려갔다. 그 후 일부 스코틀랜드 장병들이 쉴트론[1]을 결성한 뒤 다리로 진군해 길목을 막아버렸고, 이미 포스 강 북쪽 기슭으로 건너간 잉글랜드군은 더 이상 지원군을 받지 못한 데다 전투 대형을 제대로 갖추기도 전에 적의 맹공에 시달렸다.

그 결과 학살이 일어났고, 휴 드 크레싱엄을 비롯한 상당수 지휘관들이 피살당하고 기병 100명과 보병 1,500명 가량도 사살되었다. 마마듀크 트윙을 비롯한 소수의 장병 만이 적의 포위를 뚫고 강을 건너 후퇴할 수 있었다. 수탈을 자행해 스코틀랜드인들의 증오를 받았던 휴 드 크레싱엄의 유해는 스코틀랜드인들에 의해 가죽이 벗겨지는 등 온갖 모욕을 당했다. 한편, 다리를 아직 건너지 않았던 존 드 워렌은 전투에서 패했다는 걸 깨닫고 다리를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그 후 살아 돌아온 마마듀크 트윙에게 스털링 성 방위를 맡긴 뒤, 자신은 베릭으로 퇴각했다. 잉글랜드 수송대는 폴커크로 가는 길을 통해 탈출을 시도했지만, 여러 개의 개울이 교차하는 늪지대에서 스코틀랜드 반란군 편으로 돌아서기로 한 제임스 스튜어트와 레녹스 백작 맬컴이 습격하는 바람에 모조리 노획당했다.

스털링 다리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뒀지만, 스코틀랜드 반군도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특히 앤드류 모레이가 이 전투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대다수 연대기에 따르면, 모레이는 이 전투를 치른 직후 사망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1297년 가을에 두 통의 편지를 보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첫번째 편지는 1297년 10월 11일 헤딩턴에서 한자 동맹의 주요 도시인 뤼베크와 함브루크의 시장에게 보낸 것으로, 발신인은 "스코틀랜드 왕국과 왕국 공동체의 지도자, 앤드류 모레이와 윌리엄 월레스"로 기재되었다. 두 번째 편지는 11월 7일에 발행되어 핵섬 수도원장에게 보내진 것으로, 거기에는 "앤드류 모레이와 윌리엄 월레스, 스코틀랜드 군대와 왕국의 지도자"로 기재되었다. 모레이의 이름은 이후의 어떤 문서에도 나타나지 않았는데, 이를 볼 때 11월 7일 직후에 사망했을 것이다. 현대의 대다수 학자들은 모레이가 스털링 다리에서 중상을 입고, 1297년 11월경에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앤드류 모레이가 사망한 후, 윌리엄 월레스가 잉글랜드의 지배에 대항하는 스코틀랜드 반란군의 유일한 지도자가 되었다.

앤드류 모레이는 생전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인과 결혼해 외아들 앤드류 머레이를 낳았다. 앤드류 머레이는 아버지가 사망한 후 4개월이 지난 1298년 오순절에 태어났다고 전해지며, 5살 때인 1303년 잉글랜드군에 붙잡힌 뒤 11년간 잉글랜드에서 포로 생활을 하다가 배넉번 전투 이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간의 포로 교환이 이뤄지면서 1314년 가을에야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1315년 할아버지 앤드류 머레이의 영지였던 아보크, 보함, 페티의 영주권과 삼촌인 윌리엄 머레이의 영지였던 라나크셔의 보스웰의 영지를 계승했다. 그 후 1332~1333년과 1335~1338년에 2차례 스코틀랜드의 호국경을 역임하면서, 에드워드 3세의 스코틀랜드 침략에 맞서 싸워서 스코틀랜드가 독립을 유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 Shiltron: 최전방에 창병이 있는 조밀한 원형 대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