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3-10 22:17:47

윌리엄 멜튼

파일:윌리엄 멜튼.jpg
성명 윌리엄 멜튼
William Melton
생몰년도 미상 ~ 1340년 4월 5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킹스턴어폰헐 인근 멜튼 마을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노스요크셔 카우드 성
직위 요크 대주교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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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요크 대주교. 에드워드 1세, 에드워드 2세, 에드워드 3세 3대를 섬기며 요크 대주교로서 사목했으며,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 참여했다.

2. 생애

잉글랜드 왕국 킹스턴어폰헐 인근 멜튼 마을 출신의 가난한 평민 집안에서 출생했다. 부모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일찍이 성직자가 되기로 마음먹고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해 1297년경 졸업했다. 왕위 계승자 에드워드 왕자가 웨일스 대공으로 임명된 직후인 1301년 4월 17일, 에드워드 왕자의 영지인 체셔의 수입을 관리하는 시종으로 선임되었다. 유능한 금융 관리인이었던 그는 1301년 에드워드 왕자가 부왕 에드워드 1세를 따라 스코틀랜드 원정을 떠날 때 대동한 웨일스 보병들의 급여를 책임졌다.

1299년 링컨셔 주 리펌의 목사가 된 이래, 수년간 사우스웰 대성당, 더블린, 링컨, 요크, 솔즈베리 대성당 등지에서 6차례 더 목사 직을 역임했다. 1307년 7월 8일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 2세는 그를 초대 대법관으로 선임했으며, 왕실 의상 담당자로 선임되어 왕실 재정의 대부분을 책임졌다. 1308년 초 에드워드 2세가 프랑스로 건너가서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의 딸인 프랑스의 이자벨과 결혼할 때 결혼식에 참석했으며, 한동안 국새 보관인을 맡기도 했다. 1309년 에드워드 2세에 의해 베벌리 교구장에 선임되었고, 1314년에는 헤이스팅스 왕립 교회의 성직 임무를 맡았다.

1308년부터 1309년까지 반스테이플의 대주교를 맡았으며, 1308년부터 1316년까지 런던의 생마르탱르그랑 교회의 수석 사제를 맡았다. 1308년 6월 왕의 총애를 받는 피어스 개버스턴이 아일랜드 보안관으로 선임되는 의식을 참관했다. 이후 피어스 개버스턴 문제로 에드워드 2세와 대귀족들 간의 대립이 격화될 때 어느 쪽도 가담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1312년 왕에게 유리한 세금 부과를 거부한 잉글랜드 북부 성직자 대표 중 한 명이었지만, 왕의 총애를 계속 받았고, 잉글래드 남동부 항구도시 5곳의 특권을 늘려달라는 요구를 왕을 대신해서 그들과 협상했다.

1313년 스코틀랜드와의 평화협상에서 사절로 활동했으며, 1315년 10월 내각에 참여했고, 1316년 1월 21일 요크 대주교로 선출되었다. 교황 요한 22세가 그의 선임 인정을 차일피일 미뤘지만, 에드워드 2세의 거듭된 요청과 잉글랜드 대표단의 중재 끝에, 멜튼은 1317년 9월 25일에 교황으로부터 요크 대주교로 인정받았다. 이때 교황청의 인정을 받으러 아비뇽까지 갔던 그는 귀국 길에 캔터베리 대주교와 요크 대주교와의 사이에서 오랜 분쟁을 지속해, 켄트와 런던, 즉 캔터베리 교회 관구의 영토를 지날때 십자가를 앞으로 나르게 했다.

에드워드 2세 치세 동안, 요크 대주교구의 영토는 스코틀랜드인들의 습격과 약탈의 표적이 되었다. 1314년 초, 멜튼은 스코틀랜드와의 국경을 방어하기 위해 세금을 징수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인들의 습격은 1318년부터 프레스턴과 버러브리지까지 퍼졌으며, 멜튼 본인도 자기 교구 지역을 방문할 때 스코틀랜드인들의 위협을 받았다. 1319년 여름,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의 최측근인 제임스 더글러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이 요크로 쳐들어왔다. 그는 이를 막기 위해 왕실 대집사 존 호담, 요크 시장 니콜라스 플레밍의 협조하에 요크 시를 방어하기 위해 병력을 모집했다. 이때 모인 병력은 10,000 ~ 20,000명에 달했다고 전해지나, 그 대부분은 요크와 주변 지역의 징집병이었고, 많은 성직자들이 함께 했다.

1319년 9월 12일, 윌리엄 멜튼과 존 호담은 스코틀랜드군을 기습 공격하여 격파하기 위해 20km 떨어진 마이톤온스웨일로 진격했다. 척후병으로부터 적군이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제임스 더글러스는 평원에 잔뜩 깔린 건초 더미에 불을 지르라고 명령했다. 건초 더미를 태운 불에서 나오는 연기는 스웨일 강의 다리를 건넌 잉글랜드군의 시야를 가렸다. 스코틀랜드 기병대가 그 사이에 우회하여 다리를 건너 퇴각하는 것을 막았고, 스코틀랜드 주력군은 방향 감각을 잃고 전투 경험이 부족한 잉글랜드 민병대를 향해 맹공을 퍼부었다. 잉글랜드 민병대는 삽시간에 와해했고, 적에게 사살되거나 스웨일 강으로 뛰어들었다가 익사하는 자가 태반이었다.(마이톤 전투)

스코틀랜드의 시인 존 바버는 <운율 연대기>에서 잉글랜드군의 손실을 사제 300명을 포함해 1,000명이 죽었다고 밝혔고, 라네코스트 연대기는 잉글랜드인드인 4,000명이 스코틀랜드인에게 살해되었고, 1,000명은 스웨일 강에서 익사했다고 밝혔다. 요크 시장 니콜라스 플레밍은 전사했고, 여러 잉글랜드 장교들이 생포되었다. 윌리엄 멜튼과 존 호담은 간신히 요크로 탈출했고, 예상했던 스코틀랜드의 포위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성문을 닫았다. 이때 전투에 참여했던 수많은 잉글랜드 성직자가 살해되었는데, 후대 사람들은 마이톤 전투에서 전사한 성직자들을 "마이톤의 모임(Chapter of Myton)"이라고 일컬었다. 그 후 제임스 더글러스는 요크를 며칠간 포위했다가 다른 지역으로 진군하면서 약탈을 자행했다.

1321년, 멜튼은 다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사이의 평화를 중재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322년 에드워드 2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이 실패로 돌아간 뒤, 1323년 5월 30일 멜튼 궁전에서 13년간 휴전하기로 한 비숍소프 휴전 협정이 맺어졌다. 그러나 이후의 평화 협상은 실패로 끝났고, 1328년 노샘프턴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스코틀랜드인들의 습격이 연이어 이어졌다. 스코틀랜드인들의 연이은 습격과 약탈로, 잉글랜드 북부 대부분이 황폐해졌다. 그 여파는 실로 심각해서, 북부 잉글랜드 성직자들은 1339년에도 너무 가난해서 왕에게 세금을 낼 수 없다고 선언했다.

한편, 윌리엄 멜튼은 1318년 에드워드 2세와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 추종 세력간의 화해를 도모한 리크 조약이 체결된 후 설립된 개혁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1322년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왕에 대한 충성심을 유지했지만, 그의 성직자들이 반란군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걸 막지 않았다. 1322년 봄, 그는 랭커스터 백작, 스코틀랜드의 모레이 백작 토머스 랜돌프, 제임스 더글러스 경 사이의 편지 사본을 발견했다. 그는 이 사본을 왕에게 보냈고, 왕은 이를 랭커스터 백작이 반역했다는 걸 입증하는 증거로 사용했다.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가 처형된 후, 그의 무덤에서 병자가 회복되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이에 주민들은 토머스를 순교자로 반들었고, 그의 무덤을 순례했다. 멜튼은 반역자로 처형된 토머스는 절대로 시성될 수 없다며, 랭커스터 대집사에게 2차례 경고했으며, 왕이 순례자들을 막기 위해 경비 부대를 배치하는 걸 지지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2세가 폐위된 후 등극한 에드워드 3세의 섭정 로저 모티머가 토머스의 시성 운동을 단행할 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1324년, 헤리퍼드 주교 아담 올튼이 대법원장 허비드 스턴튼 앞에 끌려왔을 때, 그는 성직자는 오직 주교 법원에서만 심판받을 수 있지, 속세 법원에 회부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고, 캔터베리 대주교 월터 레이놀즈, 더블린 주교 알렉산더 빅노어와 함께 법정으로 향해 올튼을 데려갔다. 이후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 간의 전쟁이 발발하자, 멜튼은 왕으로부터 요크에서 관직에 있는 외국 성직자를 추방하거나 해를 끼칠 수 없는 먼 곳으로 전근시킬 것을 요구받았다. 이에 멜튼은 자기 교구에서 그렇게 인기 있는 성직자를 찾을 수 없다고 대답했다.

1325년 7월 3일, 에드워드 2세는 멜튼을 재무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재무관으로 활동하는 한편, 터베리 교회 관구에서 십자가를 자신 앞으로 운반할 권리를 계속 주장하며 레이놀즈 대주교와의 분쟁을 벌였다. 1326년, 에드워드 2세는 스코틀랜드인들의 잉글랜드 북부 침략을 어떻게든 저지하기 위해 제7대 서리 백작 존 드 워렌에게 멜튼을 대신해 요크를 지키는 임무를 부여했다. 1326년 9월 에드워드 2세가 폐위되고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의 이자벨 왕비와 로저 모티머에 의해 등극하자, 그는 11월 14일에 자기 사무실과 57,915 파운드가 넘는 보물을 후임 재무관인 존 드 스트랫퍼드에게 인계하고 재무관에서 물러났다.

멜튼은 에드워드 2세가 몰락한 후에도 그를 지지했다. 1327년 1월 13일 의회에서 왕의 폐위에 반대했으며, 2월 1일 에드워드 3세의 대관식에 참석했다. 하지만 나중에 로저 모티머와 타협했고, 미성년 왕의 섭정을 맡은 국가 평의회의 주교 4명 중 한 명이 되었다. 1328년 요크 대성당에서 열린 에드워드 3세와 에노의 필리파의 결혼식을 주관했다. 1330년, 켄트 백작 우드스톡의 에드먼드는 아직 살아있다는 소문이 돌던 에드워드 2세를 풀어준 뒤 그를 옹립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가 적발되었다. 이때 그는 조사 과정에서 멜튼도 음모에 관여했다고 주장했다. 멜튼은 1330년 4월 우드스톡에서 의회의 소환을 받고 이에 관해 심문받았지만 혐의를 끝까지 부인했다.

1330년 10월 에드워드 3세의 친위 쿠데타로 모티머를 주살한 뒤, 에드워드 3세는 12월에 멜튼이 완전히 무관하다고 선언하고 판사들에게 더 이상의 조사를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그 후 멜튼은 에드워드 3세를 전심으로 섬기기로 했고, 1330년부터 1331년까지는 다시 재무관으로, 1333년부터 1334년까지는 국새 보관인으로 선임되었다.

멜튼은 대주교로서 의롭고 순결하게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대하게 베풀었고, 일찍 일어나서 정기적으로 교회 예배에 참석했다. 스코틀랜드인들에게 잡힐 위험이 종종 있었는데도 정기적으로 자기 교구를 방문했으며, 교구와 수도원에서 영적 규율을 준수하도록 장려했으며, 이를 위해 성직자 임명과 성직 수여 의무 면제를 감독했다. 또한 이 시기에 여성들을 선동하는 이단 설교자와 흑마법사가 나타나자, 그는 이들을 단속하는 데 골몰했다. 멜튼은 요크 대주교구 내 성전 기사단의 재산을 다른 종교 단체에 배분하는 어려운 문제를 규제했으며, 1312년 해체된 성전 기사단 소속 연금을 지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종종 보좌 주교들과 어려운 관계를 맺었고, 자기 교구 방문에 반대했던 더럼 주교 루이스 드 보몬트를 파문하기도 했다.

멜튼은 재정을 검소하게 관리했다. 당시 다른 주교들이 막대한 빚에 시달리고 있을 때, 그는 왕에게 많은 돈을 빌려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영국 북부의 영주들, 가난한 수도원들, 심지어는 바르디 가문의 이탈리아 상인들에게도 돈을 빌려줄 수 있었다. 그는 요크 대성당 재건에 700파운드를 기부했고, 자신의 비용으로 세인트 윌리엄 의 무덤을 복원했다. 그는 면죄부 판매업자 와 자금 모금자들의 업무를 직접 살펴보고 모금된 자금을 책임감 있게 처리하는 사람들을 칭찬했다. 백성들은 그런 그를 존경했고, 에드워드 2세도 1316년경에 멜튼의 훌륭한 봉사에 감사를 표하면서 그가 나중에 어떤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멜튼은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카우드에 있는 대주교의 궁전으로 은퇴했고, 1340년 4월 5일 그곳에서 사망한 뒤 요크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의 형제 헨리의 아들인 윌리엄 멜튼이 그의 영지를 계승했으며, 윌리엄 멜튼의 후손들은 요크셔 남부에서 가장 강력한 기사 가문으로 자리잡았다. 멜튼은 생전에 요크 대주교로 재임하면서 자신의 활동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작성했는데, 이는 5권으로 구성된 <윌리엄 멜튼의 기록>으로 출판되었다.